CategoriesMoive/TV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

exit

누군가 이 영화를 ‘뱅크시 영화’로 찾기에, ‘아니예요. 뱅크시가 나오긴 하지만, 뱅크시 영화는 아니라구요. 뱅크시보다 더한 놈이 나오긴 하죠. 반전이 아주 오묘해요’라는 요지로 답변했다. 물론, 감독 크레딧에 뱅크시가 올라가지만…

한 마디로, as-is 내 올해의 영화다. 너무 재미있게 봤다. ‘Funny As Hell’ 뉴요커의 평가가 무색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전개도 결론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막판 반전 쎄게 한 방- 아,,,이거였구나.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가 있는 거였구나. 알쏭달쏭한 제목을 확 꽂아준다.

백남준 선생이 봤다면 아주 좋아했을 것 같은 영화다. 다큐멘터리가 증거나 자료를 이야기화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84년 백남준이 고국에 와서 선언한 “예술은 사기다”에 대한 빼도박도 못할 그리고 빼어난 증거를 제시하고 있으니까. 예술이 사기가 되는 실제 과정을 매우 희귀하고도 흥미로운 사례를 통해 정밀 포착하여. 백선생의 또 다른 선언. “나에게 예술이란 돈이 벌리는 것” 그런 것이다. 조금 특이한 무늬의 500달러짜리 아디다스 운동화를 4,000달러에 튀겨 파는 것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예술적 수완’이 바로 ‘예술’ 그 자체다. 심지어 회사에서도 흔히 쓰이는 Value-add 능력이다. 티몬의 ‘사업적 판단’이 업계에서 오래 사업하신 분들에게 남긴 상대적 박탈감의 실체이기도 하다.


선배 사무실에 걸려있던 데미안 허스트 Opium 가격을 듣고, 깜짝 놀랬었다. 그저 색깔 물방울 몇 개 찍어놓은 것일 뿐인데…저 가격을 이해할 수 없는 나는 저 그림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예술이란 이해의 깊이에 가격표를 매겨놓은 것일까. 저 그림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 준 사물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의 단면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나아가, 모든 ‘가격표’의 세계에 대해서도. 그리고, 소위 ‘진성’주의자들이 가격표를 높게 붙여 팔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에 대해 가지는 불편함과 부러움의 양가감정을 멋드러지게 표현해냄으로써, 역으로 ‘진짜 예술’이란 것에 대해서조차 대놓고 편들지 않는 오묘한 입장을 견지한다.

난, 명백한 가짜 예술의 폭로같은 촌스러운 주장보다는 이런 ‘경계선의 스탠스’가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띠에리. 오덕의 끝을 달리는 캐릭터들은 늘 흥미롭다. 그들은 자신의 집착과 열정으로 범인의 상식을 뛰어넘음으로써, 선과 악의 경계까지도 허물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띠에리의 변신을 끝까지 애정을 가지고 지켜볼 수 밖에 없다. 그는 ‘진짜’의 편이므로…거의 영화의 결말에 다다르기 전까지.

그는 희대의 오덕질로 ‘진성’ 뱃지를 획득했지만, 예술을 통해 ‘사이비’ 뱃지를 새로 달았다. 더할 수 없이 진성이자 동시에 막장 사이비인 띠에리라는 오묘한 캐릭터는 영화의 화룡점정이다.

끝으로 직업병일까? ‘촬영주의’라는 기상천외한 컨셉트의 산물인 방 가득 제멋대로 쌓여있는 비디오 테이프들을 볼 때, 왠지 마음이 무거워지며 ‘구글’…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여기서 구글은 정리 안됀 빅데이터를 눈뜨고 못 볼 뿐만 아니라, 금광묻힌 신천지를 발견한 듯 마음 한 구석에 환호성을 울리며 온갖 기술력을 동원해 미친 데이터를 더욱 광적으로 정리하고야 마는 이들을 대표한다. 이미지 매칭, 보이스 딕테이션, 얼굴 인식, 사물인식, OCR 총동원해 메타 데이터를 뽑고 유의미하게 정리해 내는 과정을 아주 잠깐 상상했다. 쩝.

CategoriesDiaryMoive/TV

그을린 사랑/ 진실의 힘

그을린 사랑

Opening Sequence from Incendies from Dirk Roth on Vimeo.

시나리오를 처음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라디오헤드의 노래들을 염두에 뒀다. 오프닝 시퀀스에 사용할 우울하면서도 몽환적인 음악을 찾던 중 곧바로 ‘You and Whose Army?’가 떠올랐다. 다른 곡은 아예 생각도 안 했다. 비슷한 분위기의 고전음악을 사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라디오헤드의 이 곡에는 다른 어떤 음악에서도 찾기 힘든 낯설고 소외된 풍경의 느낌이 있다. 내게 멜랑콜리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내 인성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 멜랑콜리는 물론 즉각적으로 위안을 필요로 한다. < 그을린 사랑>의 주된 정서적 목표는 위안이다. 씨네 21 – 감독 드니 빌뇌브 서면 인터뷰 중

절대로 스포일러에 당하지 말야할 영화라는 경고를 듣고 서둘러 봤다. 증오가 먹구름처럼 몰려들고, 소나기처럼 총알이 쏟아지는 풍경 속을 한 여자가 뚫고 지나간다. 그녀는 ‘더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싸그리 긁다못해 바닥을 칸칸히 무너뜨려가는 가혹한 생의 채찍질은 그 생각이 상상력의 한계였다는 사실을 각성시킨다. 하지만, 그런 모진 시간조차 노래부르며 견뎌낸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 삶을 놓아버리게 한 건 가혹한 고문이나 15년간의 독방 수감이 아니라 우연처럼 혹은 숙명처럼 맞닥뜨린 ‘진실’이었다. 그 모든 것을 시작하게 만든 사랑에 관한 진실.

소문난 ‘충격과 전율’의 반전보다 더 놀라웠던 건, 오히려 ‘용서’였다. 죽음을 앞두고 쓴 세 통의 편지. 편지의 주제는 그저 ‘사랑’이다. 이로써, 분노의 끈을 끊었단다. 함께 하는 것 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어. 기나긴 고통의 여정 끝에 다다른 결론은 뫼비우스의 띄처럼 다시 사랑으로 되돌아간다. 동트긴 전 새벽, 아무도 몰래 계단을 뛰어내려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던 삶을 버리고 영원반복의 연옥같은 ‘생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게 한 맨 처음 눈부신 사랑의 약속으로. 영화는 점점 하강하며 바닥을 쳤다 다시 처음으로 상승해 돌아가는 원의 궤적으로, ‘사랑’이라는 결론이자 시작점에 닿는다.

나에겐 오히려 이게 반전같다. 가혹한 고통의 끝에서 사랑으로 점프하는 가장 극적이고 성스러운 반전. 누구도 증오하지 않고, 더 이상 분노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나로선 머리나 분석으로는 알겠지만, 마음이나 육체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태. 헥, 저기서 어떻게 저렇게. 영화에 대한 딴지가 아니라, 그저 그러한 상태가 무엇인지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서 그런다. 애가 없어서 그런 건지ㅠ

Rien n’est plus beau que d’être ensemble.
함께 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단다.

너무나 기괴한 결론이지 않은가. 그녀가 그토록 찾아헤맸던 아들과 함께 했던 *순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고통은 보이지 않는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으로 그려지고, 잔인한 순간은 최소한의 표현으로 추상화된다. 처참한 고통의 순간조차 우아하기 짝이 없어 감독의 취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영화는 스너프 필름식의 고통의 관음 대신, 한 여자가 사지를 부딪혀 밀고 가는 고통스러운 생의 도저한 흐름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필연적 부산물일 증오와 분노는 관객들의 상상의 몫으로 남겨진다. 그래서, 더 먹먹하다. 방문 뒤에서 소리만 들려오는 상상 속의 애로함이 더 빠르게 심장을 뛰게 하는 것과 똑같은 메카니즘으로.

고통받는 여자들. 몇 년 전 읽었던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떠올랐다. 그리고 예전에, 15년 전 쯤에 몹시 좋아했던 < 비포더레인>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레바논과 마케도니아. 풍광과 벌어지는 일들이 꼭 닮아있다. 끔찍한 현실이지만, 아이러니하게 스크린 가득한 시적인 표현들도 그렇다.

남는 질문이 있었다.

‘하지만, 왜 그녀는 자식들에게 그토록 가혹한 사실을 찾아나서게 했을까?’
‘왜, 그 사실을 사랑하는 그에게 알려야만 했을까.’

분노의 끈을 끊기 위함이라는 나왈의 부연 설명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그러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뜯어본 한 통의 우편물을 통해서 찾았다.

진실의 힘

오늘, < 진실의 힘> 재단에서 보내온 마이데이 맘풀이 자료집을 받았다. < 진실의 힘>은 군사독재정권시절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고문당하신 분들을 위한 법인이다. 재판을 통해 무죄를 밝히기도 하고, 국가의 손해배상을 묻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행정 절차만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분들이 함께 모여 자신의 고문 경험을 나누며, 마음을 치유하는 집단 상담을 가지신다. 오늘 받아본 자료집은 그 집단 상담을 녹취한 기록이다. 고작 180 페이지. 무게는 가볍지만 내용은 천근만근이다. 한 세월에 짓이겨진 영혼들의 무게…

t

“내가 옷을 안 벗을려구 뻗댔더니 막 두들겨 패고 홀딱 벗기는 거여. 빨리 안 벗으면 두드려팽께. 사정없이 죽어라 팽께, 옷을 빨리빨리 벗는데 내복 소매가 안 빠져. 손이 부서(부어) 갖고, 어거지로 뺀께, 난 죽지. 안빠진께 그 놈이 칼 갖다가 모가지를 한쪽을 찢어갖고 내복을 벗었어요. 무르팍 꼬부려서 허벅지 밑에 파이프 넣고, 손 양짝 발 앞으로 묶고, 파이프를 번쩍 들어버리니….빨개벗겨져서 통닭구이식으로. 그렇게 맞아서 탱탱 부은 몸을 거꾸로…물 한 바가지씩 갖다가 쭉쭉 찌그리면 말이여. 방망이로 몇 대 맞고 말지. 하아~ 물에다 물 한 바가지씩 찌그리면 막 벼락 불이 번쩍 하는 것 같어.” – 임봉택

“(그러다) 찐득찐득한 수건을 얼굴에 뒤집어 씌우더라구. 거꾸로 있는데, 좀 있으니까, 물을 갖다 콧구녁에다가 붓는 것이여. 계속 붓고 있으니까 콧구녁에 물이 안 들어갈려고, 숨이 한도가 있지. 그래가지고 그 놈을 숨을 마실려니까, 수건이 딱 달라붙어. 공기가 안 들어올 뿐 아니라 같이 물이 들어오더라구. 금방 죽게 생기니까 “야 안 내놔. 너죽어.” 그러고 있는 순간에는 진짜 ‘내가 그 책을 얼마나 좀 받어봤으면, 이북 책을 내가 받어봤으면 얼매나 좋을까!’ 이런 생각 뿐이지.” – 임봉택

“소문이 개야도에 봉택이는 반공법으로 징역을 산다드라, 간첩이 돼갖고 징역을 산다드라, 소문이 떠돌았대. 그때부터 밥도 안 드시고 기죽어 계시고 그랬대. 술이나 드시고 밥도 안 드시고 하시다가 어느날 갑자기 목 매 자살을 하셨대. 우리 막내가 자다 일어나 보니까 그러고 계시더래…이렇게 앉았다가도 아버지 말만 나오면 아, 맘이 울컥하고 저녁에 자다가도 아버지하면 아무도 모르게 눈물이 콱콱 흘립니다. 하아, 오죽했으면 자결하셨겠습니까.” – 임봉택

“남들은 통닭구이라고 하는데 저는 꽁꽁 묶여 매달린 돼지새끼, 도살 직전의 돼지새끼를 더 연상해요…그 치욕스러운 거,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벗을 수 없는 치욕. 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하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치고” – 이준호

“목이 타서 물 좀 달라고 했는데 교도관이 “참아, 내일 먹어” 그래요. 보안법은 뭐 하나 꺾어져도 아무렇지 않단 얘기죠. 그때 고무신짝으로 그(변기의) 물을 먹으면서, 아, 참, 변기도 더럽잖아요. 그 물을 먹으면서. 아, 그 물을 먹으면서 내가….아! 그러니까 내가 세상을 살아가겠어요?” – 이준호

“괴로움이 때려서 아픈 것 이외에도 잠 안 재운다던지, 뭐 그냥 손톱 밑을 찌른다던지 그건 참 보통 고통이 아니예요…그 고통은 좋게 말해서 고통인데, 그 괴로움이라는 것은 겪어보지 않으면 이해를 못하실 겁니다.(침묵)” – 김성규

“무죄를 받았을 때, 무죄를 두 번 받았는데 어리벙벙, 변호사님이 무죄됐다고 해서 듣고 그랬는데 그 때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다가, 다시 어깨 무거운 건 마찬가지예요. 왜 그런지 그게 안 없어지네요. 괴로웠던 그게 안 없어진다 이 말이예요.” – 김성규

“허리가 구부러져가고 육 십이 지나고 젊음이 없어져가고 옛날 사람들이 말하듯 일장춘몽이라고, 지금 나한테 판결물 당신 무죄야, 그 판결문 몇 자 그리고 진실위원회 몇 장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어요. 이십 몇 년을 싸우고 이를 악물고 싸운 결과물이 종이 몇 장에 끝나는 거더라구. 그럼 내 인생은 어디로 갔는가? 내 젊음은 어디로 갔는가? 나도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권리가 나도 있을 껀데, 기쁘고 웃고 즐겁고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거 한 번 느껴보지도 못하고…” – 박춘환

“허~말을 못하고, 계속 술만 먹었지요. 아직까지 안 풀링당께, 안 풀린당께, 내가 그 놈을 죽여야 풀리는디 정말로…그 사진이라도 있으면 막 그냥 불이라도 지르고 응어리가 풀렸으면 좋겠어요.” – 박춘한

현실은 상상을 압도한다. 영화 속 나왈의 인생이 믿기지 않지만, 자료집에는 나왈 못지 않은 사연들이 180페이지에 가득했다. 내용의 의도적 가감이나 표현적 포장도 없다. 그저 본인들이 겪어온 일들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뿐이다. 통닭구이처럼 매달려 매질과 물질을 당하고, 목이 말라 변기 물을 떠먹고, 살기 위해 고향 친구를 허위로 고발한다. 고발하는 쪽이나 고발당하는 쪽이나 지옥이다. 그들이 우연히 같은 눈병에 걸려, 같은 감옥에 수용된다. 용서가 되겠나. 하지만, 용서한다. 그냥 영화다…

억울함만큼 사람을 돌게하는 감정이 또 있을까. 동료의 사소한 오해나 진심을 곡해하는 이웃의 한 마디에도 울컥하고 잠 못 들며 머리가 빙빙 도는 게 인간인데, 열심히 살던 와중에 아무 이유없이 끌려가 허위 자백을 요구받으며 잔인한 고문을 받고, 그것도 모라자 오랜 생활 수감에 나와보니 가족은 망가지고 이웃은 외면하고 간첩으로 낙인찍혀 관찰 속에서 평생을 살아간다라… 억울한 게…억울하다는 게, 그 억하심정이란 게…대체 어떤걸까. 얼마만큼인걸까.

4년 전부터 급속도로 괴로워졌지만, 그래도 이만큼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윗 세대에 빚진 마음이 있었다. 그 빚을 조금이나마 이 분들을 통해 돌려드릴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깃발들고 앞장선 투사들도 아니셨다. 하지만, 이 분들의 문제는 지금 이 사회의 공동 책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을 누리는 우리들이 오늘을 만든 과거에 대해 져야하는 책임.

진실의 힘 재단 홈페이지> 후원하기

자료집의 제목은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들어줘서 감사합니다.”이다. 말하고 듣는다는 것, 그렇게 어려운 일이고 또 중요한 일인가보다. 가족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한 채 혼자 품고 왔던 과거의 기억을 말하고 난 뒤, 큰 짐을 내려놓은 듯한 한결 홀가분해진 톤을 텍스트에서도 느낄 수 있다. “같은 고생을 한 사람끼리 풀어놓는 것이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진실의 힘이란, 진실을 마주하는 힘. 진실을 말하는 힘. 진실을 들어주는 힘이 아닐까. < 그을린 사랑>의 나왈도 결국 진실의 힘을 믿었던 것 아닐까. 진실은 위태롭게 버텼던 그녀의 등을 떠밀어 사지로 밀어넣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진실을 버틸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랬다 하더라도 아이들만은 진실의 힘으로 살아주기를 바랬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란 없으므로.

이틀 간격으로 두고 나에게 온 한 편의 영화와 한 편의 책이 전혀 다르게 같은 말을 던지는 것 같았다. 난, 일단 가만히 있어본다. 열심히 던져진 말들을 프로세싱하면서. 여전히 홀이 너무 많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수 있을까. 고통의 진행형 속에서 고통을 제공한 대상을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고통스러운 것일까. 용서의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일까. 어렵다. 머리로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일이다. 뭔가가 빠져있다.

CategoriesMoive/TV

7월의 끝, 싸이코 (Pscycho)

토요일 밤 10:40분. 차들이 줄줄이 늘어선 여의도를 위태로이 칼질하는 사브 한 대. 그녀를 11시 정각까지 집으로 돌려보니, TV 앞에 앉히기 위한 질주였다. 물론, 서울 최후의 병목으로 꼽히는 신림 4거리의 교통 상황은 그녀의 정시 귀환을 허락치 않았다. 하지만, 하늘이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버리지 않으셨던 것일까. 집에 도착한 그녀가 황급히 리모콘을 켜고, EBS를 틀었을 때 < 싸이코>는 그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된 첫 번째 여관방 시퀀스를 전개시키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모범적인 여자와 이혼 수당의 부담 때문에 그 여자를 허락하지 않는 남자가 한낮의 정사 후 나누는 괴로운 대화를. 오후 2시 45분. 그녀는 그 시간대에만 연인과 침실에 들 수 있다.

당시 TV 한 편 제작비에 불과했다는 80만 달러(약 9억) 들여 만든 영화 < 싸이코>는 현재 IMDB에서 Top 25를 기록 중이다. 히감독님 영화 중에서는 21위를 기록하는 < 이창>에 이어 2위. 검증된 영화이고, 영화 역사 사상 가장 많은 분석된 영화 중 하나가 아닐까 예상해본다. 그런데, 난 분석이나 열광은 커녕 보다가 꾸벅꾸벅 졸다가 심지어 그 유명한 샤워씬이 끝나고 나자 쿨쿨 잠에 들어버렸다. 이 영화 꼭 봐야 한다는 징징댄 것도, 그 압박에 못 이긴 사브의 질주도 모두 무색하게시리 말이다. 물론, 몹씨도 몰아부친 24시간이기도 했지만…

다시 깨어난 것은 사립탐정 아보가스트가 살해되는 씬에서였다. 고조에 달한 버나드 허먼의 싸이코표 BGM이 잠든 나를 깨웠다. 이후 반쯤 정신이 나가서 영화를 끝까지 보긴 봤다. 이상한 영화다. 이토록 웃음기 없는 히감독님 영화라니. 여자 주인공은 나오자마다 1/3도 못되서 갑작스레 퇴장하고, 뒤는 질질 늘어지며 기나긴 설명을 늘어놓는다. 노먼 베이츠가 잡히고 난 후, 정신분석학자의 설명은 아예 영화가 말하는 영화 속 캐릭터 분석이다. 이런 마무리는 < 이창>의 느닷없는 엔딩씬과 대척점을 이룬다.

하도 졸면서 정신없이 봐서 감흥이 없다. 뭐 사는 게 이런 거지. 기대했던 게 별볼 일 없을 수도. 그게 대상 탓이 아니라 내 컨디션 탓일 수, 충분히 있는 거지. 그리고, 난 역시 장난치고 뺀질거리는 터무니없는 캐릭터들이 좋다. 나중에 망가지고 변질되고 비극에 빠진다 할지라도. 인형같은 마리온에도, 박제같은 노먼 베이츠에도 닿지 못해 그냥 그렇게 < 싸이코>가 흘러갔다. 어쩌면, 하이 앵글이 빈번히 등장하는 이 영화는 이입의 대상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게임의 대상일지도 모르겠다. 이럴까? 저렇겠지? 관객과 감독이 벌이는 한 판의 두뇌 게임. 결국 관객이 지는 것으로 각본이 짜여져 있는. “나는 관객들을 통제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마치 오르간을 연주하듯이 관객들을 연출했다고 말입니다.”(‘히치콕과의 대화’ 중) 요런 스탠스로 봐야 하는 영화에 내가 크게 관심이 없는 중이기도 하다.

어쨌든 7월도, 7월의 EBS 히감독님 특집도 이렇게 끝이 났다. 무더운 여름밤과 어울리는 히감독님 영화를 내내 공포스런 장마비와 함께 해야 했지만, 오랫만에 ‘영화보는 즐거움’…좋아하는 영화에 열광하는 순수한 관객으로서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특집을 다 보고, 남는 질문은 하나다. ‘지금 히감독님이 계셨다면, 어떤 영화를 만드셨을까?’ 어쩌면 우리는 지금과 전혀 다른 걸작 트랜스포머나 해리포터를 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히감독님은 상업 감독이었고, 흥행시켰고, 당대를 등지지 않으셨으니까. 천재성을 가지고, 상업적으로 생존했으며, 영화 밖에 몰랐다. 이 희귀한 미덕의 조합이 내 눈앞에서 펼쳐질 때, 난 그저 흐뭇할 뿐. 비록 내 방안 작은 TV 모니터를 통해서 일지라도.

< 싸이코>를 안 봤더라도 누구나 한 번 쯤을 봤을 샤워씬. 빠듯한 촬영 일정이었지만, 이 45초를 찍기 위해 1주일이 걸렸고, 카메라 위치를 70번 넘게 바꾸었다고 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놀라거나 공포를 느낄 수도, 혹은 그냥 정신없이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잊을 수는 없다.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 그것을 통해 당신과 내가 교감한다는 것. 8월, 깊어질 당신과 나의 여름을 위해 건배- 샤워 커튼 뒤에서 서서히 다가올 검은 그림자를 기다리며.

p1

이런거이 히감독님 ㅎㅎㅎ ♥ ♡ ♥ ♡ ♥ ♡ ♥ ♡….라부라부 ,..싸/랑/해/요! 히감독님 우유빛깔 희감독님!

h1

CategoriesMoive/TV

7월의 히감독님

어제 밤이 히(치콕) 감독님이 꿈에 나오셨다. 팩토리 27층에서 영화 워크샵 같은 걸 하고 있는데, 직접 오셔서 8mm로 시범을 보여주셨다. 캠을 들고, 창밖을 촬영하시는데 낮게 천천히 찍다가 갑자기 캠을 하늘로 들어올리시며 건물 아래쪽으로 렌즈 방향을 트셨다. 카메라에 연결된 화면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던 나는, 화면에서 느껴지는 갑작스런 높이감에 현기증을 느끼며 뒤로 물러서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야. 역시 히감독님은 화면으로 모든 걸 보여주시는구나. 꿈속에서도 히감독님의 촬영에 연신 감탄을 했다. 어제 본 <39계단>이 너무 재미있었던거다.

hitch

EBS < 세계의 명화> 7월 히치콕 특집. 나에게는 하늘에서 보석들이 막 떨어지는 것 같은 시간이다. 토요일 밤마다 죽이 딱 맞는 누군가와의 데이트가 잡혀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스크린에서 보고 싶은 것들을 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데, 그게 내 취향의 문제인지 세상의 문제인지 영화의 문제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특히나 여름이면 더더욱 극장에서 볼 영화가 없어지면서 왠지 모를 소외감도 깊어지는데, 이런 때 히감독님의 영화는 큰 위안이 된다. You’re not alone~ I’m here with you~

선배 생일 챙겨주느라 < 이창>은 반절 밖에 못 봤다. 사실, 피핑 톰질하는 앞부분이 재밌는데. 그래도, 코넬 울리히의 원작 를 읽는 계기가 되었다. 코넬 울리히, 일명 윌리엄 아리리쉬는 내가 제일 좋아했던 추리작가 Best 3에 꼽는다. 두 대가의 만남이라니. 원작도 멋있었다^^ 순수한 ‘관찰’을 통해 자기 자신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진실에 한 발 한 발 다가서는 과정이 설득력있게 그려진다. 대가들은 군더더기가 없고, 명료하다는 생각이 확고해진다. 그냥 이해가 다 되고 뭉게뭉게한 부분이 없다. 사술을 부려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법이 없이 늘 정공이다. 그러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열광하게 만든다.

문장과 영상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원작에서 히감독님이 더한 캐릭터들의 맛을 확인하게 되어 기뻤다. 능글맞은 제임스 스튜어트와 공주님 그레이스 캘리. 하지만, 사건이 진전되면서 그레이스 캘리는 누구보다도 더 깊게 사건 속으로 빠져들고,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위험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재치넘치게~임기응변. 반전 금발미녀랄까. 이런 캐릭터들을 더해 원작의 의도를 명확히 표현하면서도, 자신의 세계를 명확하게 만들어내신 솜씨가 대단하다. 여력이 뻗쳤다면, 코넬 울리히의 문장과 히감독님의 영상 캡쳐를 교차 편집해서 올려보고 싶으나…여력이 안 뻗친다. 누가 해 주면 좋겠다만 ㅠ

< 현기증>에서는 킴 노박의 아름다움이 새삼스러웠다. 이상한 여자다. 두 가슴을 봉곳이 세우고, 개미 허리를 있는대로 조여맨 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걷는 금발 미녀. 우아하면서도 천박하고, 지적이면서도 육감적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피카소 그림 속 여자같은 신비감을 준다. 영화의 이중 캐릭터에도 딱이지만, 제목에도 딱 맞는 참으로 적절한 캐스팅이지 싶다. 여자인 내가 보기에도 현기증이 나는데, 남자들이 보면 어떨까? 그냥 스토리와 관계없이 현기증, 그 자체다.

< 현기증>은 어두운 영화다. 한 여자에게 천착하지 못하고, 지 좋다는 여자에게 농담따먹기 밖에 안되는 느물느물한 퇴직 형사 제임스 스튜어트. 트라우마에 발목잡혀 누구에게도 진심을 주지않았던 잔머리 뺀질남이 한 여자에게 있는대로 진지해져 미쳐가고 결국 정신 병원에 갇히기까지의 과정은 서스펜스 이상의 서늘함을 던진다. 하지만, 이 조차 끝이 아니다. 전반부에 가득한 농기는 점점 물이 빠지고, 영화는 점점 이상한 심연으로 관객들을 데려간다. < 현기증>은 히치콕의 어두움이 가장 여과없이 날을 세운 영화 같다. 하지만, 희망 한 가닥 남기지 않는 비극에서조차 히감독님은 오바하는 법이 없으시니…..그저 납죽. 개인적으로 제임스 스튜어트 짝사랑하는 여자 캐릭터. 이런 게 히감독님만의 묘미일거다.

그리고 어제의 <39계단>. 예~전에 봤는데, 스토리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서 다행이었다. 순간순간이 촌철살인이고, 모든 기대를 한치의 주저도 없이 뒤엎어 버리는 반전의 연속이다. 35년도 작품이니 36세 때 감독하신 거지만, 아직 히감독님의 진짜 전성시대가 오기 전인 ‘영국 시대’ 끝물의 작품이다. 흑백의 철지난 영상이지만, 그때 이미 히감독님이 히치콕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면이나 촬영이 좀 촌스럽다 뿐이지, 캐릭터는 왠만한 요즘 영화/드라마보다 훨씬 더 모던하다. 보다가 너무 많이 웃고, 놀래고… 왠만한 기대는 칼처럼 잘라버리는데, 아…진짜 재미가 뭔지 아는 감독님이시다. 그리고 이 현란한 캐릭터들의 향연. *살아있는* 인간들. 핵심작렬의 대사들. 한 순간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악마적 디테일들. 유머감각까지도. 사실 히감독님 영화는 분석보다도 명장면을 꼽으며 낄낄거려야 제 맛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거의 모든 장면이 명장면이라서, 정리를 할 수가 없다. 그래도 빼놓을 수 없는 것. 직업 의식! 직업 의식…ㅎㅎ 영화 전체를 풍미하다가 결국 반전의 포인트로 승화되는 캐릭터들의 직업 의식이 너무 웃기고 재미있다.

거장의 초기 작품처럼 재미있는 게 없다. 다소 어설프기도 하고 허술할 수도 있지만, 그를 그답게 만들어 주는 것, 그래서 내가 그에게 열광하는 모든 것들은 이미 초기 작품에 다 들어가 있다. 형태의 촌스러움이나 다소 거친 표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앞으로 펼쳐나갈 ‘세계’의 증명이다. 오히려, 그런 세계는 초기 작품이 더 생생하게 나타난다.

나는 이상한 영화를 만들다가 경험을 쌓고 성장해서 갑자기 멋진 영화를 만든 감독을 본 적이 별로 없다. (반대의 경우는 종종 있지만) 물론 내가 영화를 많이 보는 건 아닌지라, 그냥 철저한 나만의 편식성 통계치일 뿐이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의 영화는 처음부터 다 ‘그들’의 영화였다. 코헨은 < 블러드 심플>부터 딱 그냥 씨네필 영화쟁이였고, 우디 알렌은 < 돈을 갖고 튀어라>같은 데서부터 자학피학 인간 코메디였고, 알모도바르는 < 페피, 루시, 봄>에서부터 미친 열정이었다. 막 시작된 ‘한 세계’가 숙성되고, 세련되어지고, 깊어져 또 다른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본다는 것은 행운이다. 하지만, 거장이 된 후에 접해서 거꾸로 그의 초기 작품을 다시 거슬러 보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인 것 같다. 내가 열광하게 될 세계의 ‘어린 싹’을 발견하는 즐거움.

<39계단>에서도 내가 거장이 된 후 히감독님 영화에서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다 느낄 수 있었다. 어떨 땐, 그냥 나란 사람을 분석해서 나 재미있으라고 만든 영화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히감독님의 영화가 가장 아름다운가? 가장 화려한가? 가장 감동적인가? 그런 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히감독님은 가장 영화같은 영화를 만드셨던 감독님이었던 것 같다. 문학도 연극도 아닌, 영화라는 방식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씬들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영화든 문학이든 언론이든 뭐가 됐든 한 분야의 가장 깊은 정수를 다다른 이들이 멋있어 보인다^^

어쨌든 기대 많이 했던 특집이었는데, 어느덧 7월도 다 가고 ….이제 히감독님 특집도 한 주 남았다. < 싸이코> ㅋㅋ 문제적 작품!

CategoriesMoive/TV

브로크백 마운틴 : I swear…

어떤 때는 남이 나보다 더 잘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다. 이런 글을 볼 때 그렇다.

A great love story: Brokeback Mountain

항상 숙제처럼 < 브로크백 마운틴>에 대해서 뭔가 남겨놔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몇 줄…그러니까 한 세 줄 정도 끄적거리기도 했다. 첫 문장은 영화 속 애니스의 마지막 대사였다. “I swear…” 덧붙일 이미지는 겹쳐진 셔츠 두 장. 그 후로 몇 년 동안, 그 세 줄에서 진도를 빼지 못했다. 논리로 분석하기 이전에, 감정적으로 압도되어 한 발짝도 더 나갈 수 없는 느낌이었다. 매 번 그랬다. 히스 레저가 죽었다는 뉴스를 들은 날에도. 하지만, 마음에서 지울 수도 없었다. 겹쳐진 셔츠 두 장의 이미지를. 그 의미를.

오늘 아침, 마닐라에서 보내왔고, 로저 에버트가 업로드했다는 저 리뷰를 읽으며 가슴이 저며오는 아픔을 느꼈다. 뻔한 표현이지만,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 세상에 몹시도 치열하게 아픈 일들이 많다는데, 그런 일들을 껄껄껄 웃어 넘겨야 멋지다는데. 나는 겨우 이런 영화 얘기에 슬퍼하고 있구나. 하지만, 난 역시 이게 아프다. 그리고 누군가도 그렇지 않을까. 세상 모두가 알아줄 수 없는 이면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있는 것이다.

tan

하루에 고작 몇 분 주어지는 직딩의 점심 시간. 밖으로 뛰어나가 비오는 탄천을 걸었다. 아아..비가 온다. 그토록 지긋지긋해했던 비가 정말로, 여전히 내리고 있다. 아늑했다. 에어컨 바람이 부족함없이 쿨링하는 19층 높은 데에서 통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비와는 전혀 달랐다. 우산을 팽개치고 자전거를 타고 빗속을 달리고 싶었다. 흠뻑 비에 젖어 한없이 달려나가고 싶었다. 이대로 영원히 365일 비만 오는 나라가 된다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It cares much less about promoting gay rights than about telling the sad tale of two people who have discovered each other, that they’re not alone, and that they can’t live without each other. They just happen to be men. If that isn’t star-crossed, I don’t know what is.

두 번째 책을 쓰면서…폭주하는 일상의 업무 속에서, 출퇴근 빼고 남는 얼마 안돼는 시간을 온통 책상머리 앞에 헌납해야 했던 2년 여의 시간 속에서 영화라고는 딱 세 편을 봤다. 홍상수 < 해변의 여인> 알모도바르 < 귀향> 그리고…이 영화 < 브로크백 마운틴> 매일매일 바들바들 조여오는 강박관념에 술 마실 시간조차도 죽여야 했던 나날이었지만 < 브로크백 마운틴>을 본 날 밤엔, 좋아하는 후배를 불러 소주를 실컷 마시고 뻗어버렸다. 그 2년 중에, 딱 하루였다. 하지만, 난 그 날도 이 영화의 비극성을 오롯이 체감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말로 깨닫게 된 건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bm1

물론 결론적으로는, 정해진 회의 시간에 맞춰 우산을 든 채로 보송보송하게 회사로 무사 귀환. 업무 보고도 하고, 리포트도 쓰고, 틈날 때 각종 흰소리도 살포하며 낄낄거리는 등등.

이 영화는 두 번 보지 못했다. 다시 볼 용기를 오늘에서야 내 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언제나 그래왔듯 ‘빛’. 그리고 오늘, 내 맘에 가장 아픈 단어를 발견했다. ‘Discover’

CategoriesMoive/TV

히치콕 ‘새(The Birds)’ – 갑툭튀의 공격

birds

EBS 대박기획! 7월 세계의명화 여름특집 < 히치콕감독 HD걸작선>
2/새, 9/이창, 16/현기증, 23/39계단 30/싸이코 (Thanks to @aeravera)

초딩 여름방학을 종종 목포 외할버지 댁에서 보냈다. 목포 다운타운 한 복판에서 수퍼를 하셨던 외할버지 가게에는 작은 흑백 TV가 놓여있었다. 그 밤도 어느 날과 같이 소시적 동네 훈장 선생님이셨던 외할아버지의 데일리 한자 퀴즈를 패스하고, 상으로 받은 하드를 베어먹으며 본 영화, 바로 마봉춘님이 틀어주신 영화 ‘새(The Birds)’였다.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무더운 여름 밤, 어린 마음에도 조여오는 서스펜스에 심장이 쿵.쿵. 뛰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람들 많이 오가는 가게였는데도 왠지 고립된 기분에 아악- 소리도 못지르고 벌벌 떨었지만, 한 시도 그 조그만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정신없이 봤었다. 오늘의 나처럼.

지금 생각해 보면, 본격적인 새들의 공격이 시작되긴 전 영화의 2/3에 해당하는 저 女3: 男1 신경분열직전의 위태로운 여초 로맨스를 당시의 쬐끄만 꼬맹이가 어떻게 받아넘겼을지 의아하다. 기억나는 것은 오로지 공포스러운 새들의 공격 뿐. 대학교 때 ‘새’를 봤을 때는 냉전 직후의 The others 위협이니 뭐니 하는 ‘새’나 영화 상징을 해석하는 부분에 몰두했었다. 졸업 후 동네 비디오 방에 구색맞추기 식으로 끼워져 있는 히치콕 영화를 하나씩 빌려다 봤을 때는 < 마니>에 홀딱 빠져 있었고 모든 영화가 최고였기기 때문에 ‘새’가 특별하지 않았다. 오늘 난, 새들의 공격을 전 후로, 영화 속 네 인물이 주고받는 대담한 대사들과 거기서 교차되는 감정이 화면에 표현되는 방식에 열광한다. 갑툭튀의 공격…그 속의 인간…이걸 바라보는 히치콕의 눈.

여자

한 남자를 중심에 둔 세 여자가 있다. 이들의 감정은 아스팔트 위의 열기처럼 강렬하지만, 밤인지 낮인지 실체를 분간하기 힘들다. 그 미묘한 속내는 오직 폭로를 두려워하지 않는 상대방 여자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한 남자를 중심에 둔 이 여자들이 쏘아대는 팽팽한 성적 긴장감은 새의 공격을 받고서야 깨져 나간다.

첫 번째 여자, New face. 샌프란시스코에서부터 굽이 굽이 해변 도로를 운전해, 앵무새(love bird) 두 마리 들고 보 데가 만에 도착한 속물적인 부자집 딸래미. 고급 차에 꽉 죄는 하이힐, 모피코트를 걸치고 금발머리를 한 치의 틈도 없이 우아하게 틀어올린 다니엘스(티피 헤들렌)다. 하지만, 이 여자가 주인공인 이유는 예뻐서가 아니다. 상황을 맞닥뜨리면 두 팔 걷어부치고 당면한 상황 속으로 돌진해 해야 할 일을 다하는 대담함 때문이다. 그러니까, 블라우스 버튼을 목까지 채워 올리지만, 엘레베이터에 둘이 남겨지만 남자의 지퍼를 내리는 데 주저함이 없는 여자 – 히치콕이 사랑해 마지않는 영국식 여주인공의 전형이다.

‘새’에서의 다니엘스도 그렇다. 그녀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가볍기 짝이 없다. 새 가게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에게 뻑이 가, 다음 날 그 남자에게 장난 하나를 치기 위해서. 로마의 분수에 알몸으로 뛰어들어 신문의 가십면을 오르내리는 천방지축 신문사 사장 딸래미의 가벼운 작업질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녀는 신문사 사장 딸의 직위를 이용해 남자의 신상을 털고, 그 먼 길을 운전해 오는 것도 모자라, 대여한 보트의 자가 운전을 마다하지 않는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만, ‘유주얼 서스펙트’의 케빈 스페이시처럼 매서운 눈썰미로 캐치한 팩트를 백분 활용해 치밀하게 남자에게 다가간다. 이러한 그녀의 ‘총명한 열심’은 치기어린 작업질에 충실함을 부여하며, ‘내 남자에게 최선까지 다하는 미녀’로 남자의 로망을 업글한다. 못생긴 여자가 열심이다, 라는 숫컷의 통념을 뒤엎는는 히치콕식 반전.

다이엘스로 분한 티피 헤들렌. 장만옥, 까르멘 마우라, 그리고 헐리웃 이전의 페네로페 크루즈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 그녀는 유난히 동물과 친하다. < 새>에서는 새 < 마니>에서는 말. 위대한 영화를 줄줄이 비엔나처럼 뽑아내셨지만, 히감독님 영화 중 퍼스널 베스트는 누가 뭐래도 ‘마니’다.

두 번째 여자, Ex. 언뜻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다니엘스의 의도를 한 눈에 꿰뚫어 보고 있는 여자가 바로 옛날 애인다. 그녀가 뉴 페이스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이전 모습이기 때문이다. 뉴페이스가 아무리 포장을 해도, ex에게는 환하게 읽힌다. 남자와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고도 오직 그 남자를 친구로라도 옆에 두기 위해 황량한 이방에 정착해 평생을 사는 여자. 감히 뉴 페이스가 이런 여자를 속일 수 있을까. 심지어 그녀는 남자가 사랑하는 동생을 구하고 대신 죽어 버린다. 누가 이 여자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정말 이길 수 없는 여자는 세 번째 여자다. Mother. 기댔던 남편을 잃은 그녀는 대신할 아들에게 집착한다. 돌아선 아들의 등에 넌 정말 니가 원하는 게 뭔지 몰라, 라고 독백하는 그녀는 영화에서 동물적 모성을 가진 ‘마더’라기보다는 보호받고픈 집착을 감춘 ‘여자’로 그려진다. 아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에게 다른 여자의 틈을 빼앗는 그녀가 여타 동종의 마더와 차별화 되는 건 다음과 같은 Ex의 촌철살인 분석 때문이다. 엄마는 이기적인가? “그녀는 그를 원하는 게 아니예요. 다만, 버림받고 싶지 않을 뿐.” 아들의 선택인가? “아니, 그녀가 그를 놓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고 생각해요.”

이런 Ex의 분석은 자연스럽게 ‘싸이코’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난 오늘 그녀에게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를 본다. 기대야 하는 여자. 남자없이 자립할 수 없는 존재. 그래서 결국 돌아버린 채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금발 미녀. ‘새’의 마더는 스탠리와 맺어진 50년 후의 블랑쉬같다. 기대는 대상이 근육질의 애인에서 아들로 바뀐 것 뿐. 마더로 분한 제시카 탠디의 얼굴은 놀랍도록 티피 헤들렌과 닮았다. 그래서 마더를 더욱 불안하게 한다. 나과 비슷하지만 나 보다 우열한 존재에게 느끼는 본능적 불안감.

영화는 새들의 공격에 다니엘스의 얼굴이 점점 질려가고, 결국 공포 이외의 모든 표정을 잃는 과정을 보여준다. 블랑쉬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가고, 다니엘스는 불길한 탈출길에 오른다. 하지만, 영혼이 빠져나가 버린 듯한 두 여자의 마지막 표정은 비슷하다. 당돌하고 자신감 넘쳤던 두 미녀가 닥친 상황과 싸우다 맞는 비슷한 결말.

재미있는 건, ‘새’에서 마더에 분한 제시카 탠디가 연극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 역으로 47년 토니상을 탔다는 사실이다. (보고 싶다!) 금발 미녀의 얼굴로 당의을 씌우고 그 아래 동동 감싸놓은 히치콕의 비틀린 여성관이 읽힌다. 이 맛이 히치콕이다. :-)

남자

세 여자의 너무 많은 사랑을 받는 남자는 능글맞게 여자의 마음을 뺏을 줄은 알지만, 정작 선택을 할 줄 모른다. 엄마를 떠나지 못하는 건 그의 선택인가? 영화에서는 ex가 지적했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조차 불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 불분명한 사각 관계는 생존을 위협하는 새들의 공격 앞에서야, 비로소 명쾌해진다. 영화의 끝에서 남자는 선택을 하고, 남자의 선택은 여자들의 감정에 교통정리를 하고 평화를 가져온다. 비록 그 평화가 맞서 싸울 방법이 없는 적들에게 둘러쌓인 일시적인 것일지라도. 평화가 오기까지, 한 여자는 죽었고, 또 한 여자는 영혼을 잃었고, 또 한 여자는 버림받았다. 진정 이 남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겐지.

남자는 클리쉐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게 그려지기에,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여자들의 연대다. 영화의 중반을 지나 남자의 출연 빈도가 급격히 뜸해지면서 부각되는. Ex와 뉴 페이스는 학교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손을 잡고, 같은 집을 지키려는 마더와 뉴 페이스는 어쩐지 화해 모드다. 한 남자를 바라보는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으면서도, 영화에서 부각되는 건 질투라는 감정보다는 함께 힘을 합쳐 외부의 적에 맞서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 계열로는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실재 사례를 매일 목격 중이라. 김진숙과 김여진.

구경꾼들

누구 하나 허투루 그려지지 않는다. 조연이든 주연이든 엑스트라든 상관없다. 몇 초, 몇 분을 나와도 나온 이유를 명확히 보여주고 들어가는 인간들로 인해 영화는 빽빽하고 모든 장면이 흥미만점이다. 고작 몇 분 등장하는 소소한 인물들에게조차 존재의 의미를 부여한 악마적 디테일이 영화를 살아있게 만든다. 왜 이런 영화의 미덕이 요즘 영화들에서는 점점 사라져가는 것일까…영화의 캐릭터들도 점점 부익부 빈익빈.

‘왜 새들이 공격하는가?’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지만,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 질문이다. 사람들은 새라는 존재를 분석하고, 나름의 이유를 따지고, 사태에 대한 개똥철학을 펼치지만 아무도 답하지 못한다. 시조새 이후 1억 4천만년 동안 잠잠히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공격을 퍼붓는 존재의 의도를 무슨 수로 파악한단 말인가. 원인이 없기에 원인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대처할 수 없을 때, 인간의 논리는 무력해진다. 게다가 물리적 싸움도 안된다. 아니, 새랑 어떻게 싸워-_-;; 길가에 비둘기 한 마리랑 싸운다는 것도 이상한데, 수 천억 마리나 된다는 새들이랑 어떻게 싸워.

결국 불똥은 엉뚱하게 다니엘스에 대한 마녀사냥으로 튄다. 치밀한 논리와 철학을 펼치던 인간들이 비이성적 본능으로 대동단결하는 와중에도, 새는 아무 힌트없이 나타나서 공격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유없이 나타나 뜬금없이 사라지는 갑툭튀의 공격. ‘새’에서 표현되는 공포의 근원은 ‘갑툭튀의 불가해함’이다. 고속도로의 미치광이. 동기없는 연쇄살인. 죄없는 어린 존재를 고통 속에 빠뜨리는 페스트.

인간을 딱 그 깊이만큼 들여다보고, 들여다 본 딱 그만큼을 아무 군더더기 없이 최단거리로, 더 이상 명쾌할 수 없게 쇼트로 살려내신 히감독님. 너무 오래 놓고 있었다. 추억 속 열광의 ‘기록’만이 남아있을 만큼. 오늘 다시 히감독님을 이렇게 뵙자오니, 감동의 눈물만이 흘러 내린다. 스쿨씬이나 공중부스씬, 다락방씬, 이웃집 방문씬 등 대표 명장면들도 좋았지만, 그 외의 모든 장면이 다 너무 좋았다. 단, 한 장면도 뻔하지 않다. 어떻게 영화가 이래. 아니, 영화가 원래 이런 거였지…영화가…영화라는게.

미스트(전체 스토리와 결말), 신체강탈자의 침입(Invasion), 악마의 씨(쫓기는 여자와 전화부스씬), 봉준호 감독님 마더(마더! 제시카 탠디…특히 이웃집 방문하고 돌아오는 전경씬) 등등의 영화가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음. 정말 행복한 여름 밤이었다. EBS에 감사!

CategoriesMoive/TV

운다

Veuillez installer Flash Player pour lire la vidéo

솔직하기가 얼마나 힘든건지,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솔직할 수 있는 능력만으로도 칸에서 상도 받을 수 있다. 우는 게 얼마나 레어한 거냐면, 한 남자가 인터뷰 중에 엉엉 울었다는 것만으로 기사가 쫙 깔린다.

Canne. 김기덕 감독 Canal Plus 인터뷰. 13년 동안 15편의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다는 못 봤지만, 볼 때마다 줄기차게도 ‘구원’이었다. 그토록 간절히 구원을 갈구했던 남자가 운다. 백발 성성한 아저씨가, 엄마 손 놓친 어린애처럼 엉엉 운다. 쳐다 보는 사람 신경 하나 안 쓰고, 부르던 ‘아리랑’도 다 부르지 못하고.

김기덕의 영화는 불편하게 한다. 사람 사는 꼴에 좋은 것만 있을 수는 없는데, 대부분 덮어놓거나 (이만해도 양반) 심지어 나쁜 거라며 욕하고 비하하고 단죄하는 것을 떡하니 끄집어내니까. 하지만, 그냥 그런 일들보다 더한 일들도 세상에는 벌어지므로, 그보다 더 가학 피학인 관계도 지천하므로, 그 보다 더 부담스러운 행각들도 벌어지므로, 어쩔 수 없지. 그런 것들이 있어서 있다고 하는 걸 뭘 어떻게 해?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이런 심정이 되고 만다.

이번에 운 것도 그렇다. 다 큰 한국 남자가, 그것도 상도 많이 받은 저명하신 영화 감독씩이나 되는 분께서 어디 칸 나가서, 전 세계에 송출될 방송에 나와 인터뷰중에 울어? 쪽팔리게. 그것도 무방비로 하나도 안 멋지게. 임재범이 ‘여러분’ 부를 때 멋스럽게도 아니고. 이거 한국 남자에 대한 심각한 명예 훼손이 아냐? 정말이지 불편한 장면이다. 날 것의 슬픔을 있는 그대로 노출하는 불편함.

하지만, 늘 이상했었다. 왜 다 큰 남자들은 이렇게 울지 않을까. 다들 그렇게 괴로워 하면서들.

영화는 사적인 것일까? 공적인 것일까? 둘 다일 거다. 둘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영화 보는 쾌감의 극대치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균형이 깨진 지는 이미 오래다. 자본의 논리는 영화를 사적 성취가 아닌 (나에겐 다소 재미없는) 공장의 산출물로 개조한지 오래다.

자기 방어와 포장은 공적 세계의 에티켓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김기덕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존재하게 한 자본에 대한 예의라고는 하나도 없이 에티켓 따위 무시하고, 정 반대편의 사적 세계로 초월해갔다. (미움받을 수 밖에) 그리고, 각종 찌라시 정보를 종합해 봤을 때, 그는 그 세계의 끝에서 ‘전무후무한’ 영화 하나를 만든 것 같다. 맛집과 스위트홈과 오늘의 멋진 하루로 가득한 타임라인. 부정적 단면조차 위트있는 문구로 가다듬은 후에나 포스팅 할 수 있고, 블로그 사진 한 장 올리는데도 포토샵과 라룸이 필수인 자기 과시, 자기 포장의 세상에서, 연약하고 상처받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과연 실행 가능한 일인가. 아니, 그게 대체 영화로서 어떤 의미가 있다는 건가.

예를 들어, 유진이는 과연 독자도 거의 없다시피하며 늘 자기 자신이 메인 클라이언트인 추억의 로깅장이라 주장하는 유진닷컴에서나마 100% 솔직할 수 있는가. 슬플 때 내 블로그에서 엉엉 울 수 있는가? Oh, No…아무리 숨어 있어도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의미가 있다고도 보지 않는다.

하지만…심지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영화 행사 한 가운데서 엉엉 울어버린 김기덕에 삘받아 발언해 보자면, 그러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언제냐고 묻는다면, 나 역시 ‘구원’을 바랄 때라고 답할 수 밖에. 이 지점에서, 나는 김기덕을 만난다. 그래서, 김기덕의 도전이 몹시 흥미롭게 느껴지고, 그 결과가 무책임한 자의식의 과잉일지 아니면, 구원에 한 걸음 다가가는 신세계의 발견일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이건 작정하고 남들 보여주겠다고 만드는 ‘영화’가 아닌가.

‘한 인간이 카메라(타인의 시선) 앞에서 어디까지 솔직해질 수 있을까?’ 김기덕의 ‘아리랑’이 나에게 던진 질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남의 실명까지 밝혀가며 극단적으로 ‘솔직해 진다’는 것이 구원이나 치유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건지. 그게 흥미를 배가시키며 동시에 진정성을 망쳐버리는 속된 뒷담화와 뭐가 그리 다르다는 건지. 곰곰 생각해보면, 어쩌면 이 영화는 개인적으로 내가 나 자신에게 조작하고 있는 어떤 림보 상태에 킥을 강요하는 대단히 불편한 영화가 될 수도 있겠다. 까야되나? 덮어야 되나? 고민된다.

개봉도 안 하고 심지어 국내 판권조차 팔리지 않은(누가 살지??) 영화에 대해 벌써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들다니, 역시 대~단하신 김기덕 감독님ㅋ 거칠고 소박하지만 날 것이어서 레어하고 강렬한 존재들이 있다.

CategoriesMoive/TV

더 브레이브(True Grit) – 하드보일드 러브스토리

더 브레이브(True Grit) directed by my favorite 코헨형제 (2010)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서부의 복수극이다. 하지만, 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영화는 아버지의 죽음인 자에게 복수를 실행하는 당돌한 소녀, 마티(헤일리 스타인펠드)의 모험의 여정을 따른다. 여기에, 전혀 반대의 성정을 가진 두 어른이 개입된다. 잔인하고 인정머리없기로 소문난 알콜중독 보안관 루스터(제프 브리지스)와 포상금을 위해 열심히, 성실하게 살인자를 뒤쫓는 텍사스 경비대원 라뷔프(맷 데이먼)이다. 서로 코드가 맞지 않는 두 전문가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살인자를 쫓다, 결국 살인자를 눈 앞에 두고 추격을 포기하는 순간 오직 14살짜리 어린 여자애만이 그 앞에 다가가 총을 겨눈다.

영화의 제목, True Grit을 실현하는 마티는 < 레옹>의 마틸다를 연상시킨다.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총을 든 조숙한 소녀들. 이름부터가 마티와 마틸다다. 게다가 두 소녀 옆에는 그녀들을 결국 사건, 즉 잔인한 어른 남자의 세계로 들어오도록 허락하고, 그 거친 환경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그녀들을 보호하며, 끔찍하게 아끼는 굉장한 나이 차이의 아저씨들이 등장한다. 한물 간 킬러 레옹과 보안관 루스터. 많은 인간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직업을 연명한다는 공통점까지 있다.

사랑과 부정 사이의 경계를 줄타기하는 이들은 결국 결단을 내리고 복수를 완성시킨 후, 사력을 다해 소녀를 안전한 세상으로 돌려보내고, 그 결과는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소녀는 그들을 땅에 묻어주고, 그 앞에 무언가 맹세하며, 살아 생전 평생 떠돌이로 살아야 했던 그들을 죽어서나마 간신히 지상에 뿌리내리게 한다. 남자는 소녀를 육체적으로 구원하지만, 소녀는 그들의 영혼을 구해낸다. 이런 식의 구원의 exchange는 오그라드는 로맨스와는 비교조차 수 없는 하드보일드한 여운으로 너무 많은 나이 차이가 나는 소녀와 남자의 영혼을 하나로 묶어낸다.

궤도에서 이탈한 괴팍한 캐릭터들과 장광설의 수다, 걸걸한 속어들. 사소한 개인의 디테일에 집착하는 캐릭터들. 그리고, 결국엔 예상 밖의, 전혀 진부하지 않은 코헨식의 상식과 휴머니즘. 아무리봐도 전형의 코헨형제다. 하지만, 뭔가 아쉽다. 언제부터인가, 그랬다. 아카데미 작품상씩이나 수상한 칭송 자자한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접선하지 못했고, < 번 애프터 리딩>은 아예 보다 꺼서, 끝까지 보지 못한 최초의 코헨 영화로 등극했다.

‘문화적 차이’라고 막연히 생각해 보지만…쩝. 요즘은 코헨영화 볼 때마다 스티브 부세미와 존 터투로와 …존 굿맨!이 프레임에 엉키고 설켜 들락날락하는 코헨의 황금 시대가 너무나 그리워진다. 제프 브리지스만해도 < 빅 레보스키>의 더드…ㅠㅠ 아휴, 저 대책없는 인간들~~ 한숨이 절로 나오는 껄렁껄렁 엇박자 인생을 살지만 동시에 그 무대뽀 대책없음에 실실 웃음이 터져나오게 만드는,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는 아쉬움이 너무 많이 든다.

< 더 브레이브> 역시 접선은 뒤늦게 이루어졌다. 서부극의 메인 스토리가 종료되고, 갑자기 뜬금없으리만치 이상한 수위로 박차올라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루스터가 뱀에 물린 마티를 안은 채 종마 리틀 블랙키를 타고 황량한 서부의 낮과 밤을 뛰는 장면. 왜 이 텁텁한 먼지 투성이 복수의 서부극에 이런 서정적인? 감상적인?? 장면이 필요했을까?

마티를 데리고 다니는 내내 자신의 실패한 인생과 여인들을 복기하는 주절거림에 바빴던 루스터가 쓰러지며 남긴 마지막 말은 “난 이제 늙었어”다. 루스터는 그날 새벽 소녀가 눈을 뜨기 전 떠나가고, 독사에 물려 한 쪽 팔을 잃은 소녀는 ‘짧지 않은’ 1/4세기 동안 결혼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 여차하면 추격자를 죽이는데 인색하지 않아 대놓고 공공의 적이자 필요악이었던 남자는 어처구니없이 서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쇼단의 일원으로 죽음을 맞는다. 죽음을 목전에 둔 남자는 그제서야 소녀를 부르지만, 외팔이로 서른 아홉이 되어서도 여전히 무표정인 하드보일드의 그녀가 도착했을 때 이미 남자는 죽고 없다. 한치의 여지도 주지 않는 주인공들의 행적이나 태도에서 로맨스를 읽어낼 여지는 없다. 하지만, 이야기는 몹시도 아련하다는 느낌으로 끝을 맺는다.

끝으로. 이 영화 역시 코헨형제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보이스 오버로 시작한다. 한 사내의 시신이 천천히 줌인되는 동안 그 사내 즉,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사연을 말하는 마티의 오프닝 나레이션은 이렇게 끝맺는다.

You must pay for everything in this world, one way and another. There is nothing free except the grace of God.

제길. 뭐라 할 말이 없게 만드는 타이밍이었다. 방점이 찍힌다고나 할까. 이렇게까지 강조할 필요는 없었을텐데, 누군가 저 위에서 누가 시켜 자막이라도 찍어서 내보내는 느낌이었다. Pay해야 한다는 거, 그거 나도 안다고요!!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몰랐던 것. 유일한 예외인 신의 은총은 어디에. 세상에 말할 수 없는, 두 사람만이 공유했던 True했던 한 순간…어쩌면 그것이 은총의 순간이었을까.

CategoriesMoive/TV

예고편

페드로 알모도바르 – La Piel Que Habito


La Piel Que Habito (The Skin I Live In)

솔까, 난 < 그녀에게>도 < 내 엄마의 모든 것>도 < 부서진 포옹>도 다 마뜩찮았음. 알모도바르의 정점은 여전히 극세사의 감정이 아닌 덩어리의 몸, 아니 욕망에 미쳐 날뛰는 ‘살’의 세계 < 라이브 프레쉬(Carne trémula)>라고 주장함. Flesh. Carné. Meat. 고기덩어리. 마음같은 자의적 해석의 여지같은건 껌으로 보는 살의 세계를 믿어 의심치 않음. 그런 그가 이제야 비로소 다시 살의 세계로 돌아왔을까? 그렇다면, Welcome!…

그리하여, ‘비명과 경기가 없는 공포영화가 될 것. 과거 나의 어떤 영화보다 가장 심한 영화가 될 것’이라는 그의 선언은 매우 짜릿함. 더 과할 수 있어? 어떻게?? 최상급의 표현에 걸맞는 극한의 이야기를 기대함. the harshest among the so&so harsher.

almodovar_old
그래도, 많이 늙었다. 알모도바르씨. 그래도, 혹은 그래서 어떻게 여기까지 밀어부쳐 볼 수 있었던 건가? 박수는 영화 보고 치기로 하고…

Esta es una historia durísima de venganza, entre hombres y mujeres, que incluye un personaje muy diabólico que me está costando bastante ponerme en su piel
이건 여자와 남자 사이에 벌어지는 터프한 복수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악마적인 캐릭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의 살 속에 살기위해 꽤나 많은 것을 지불해야했어요.

헥- 간만에 스페니쉬. 번역 자신없음.-_-;;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지불.cost. 해야 한다는 것.
많은 이들이 하고서 얻은 것과 하지 않음으로 포기해야 하는 것 사이를 저울질 하는 동안, 그는 이미 지불하고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포인트. 꽤 깊은 사적 경험이 녹아있을 듯한 기대감을 주는 멘트다.

우디 알렌 – Midnight in Paris

칸 개막작. 이번엔 파리다. 자타공인 우디 알렌 영화의 백미는 촌철살인의 ‘대사’에 있다. 하지만, 뭐랄까. 그 대사들은 이미 나에겐 내재화된, 조금은 당연해진 세계. 그래서 요즘 영감님 영화에서 그 특유의 대사들보다 더 신선하게 느끼는 건, 한 도시의 essence을 오롯이 잡아내는 공간 창조의 스타일. 뉴욕에 이어 런던, 바르셀로나에 이어 파리의 미드나잇으로. 기대 된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바, 언뜻 오랜만의 Everyone says I love you 풍이 아닐까…그냥 예상만.

왕가위 – 일대종사(The Grandmasters)

대체 언제 개봉할 셈이냐. 이런 멋지구리한 예고편만 떨궈놓구. 혜교양은 재촬영을 위해 며칠 전 중국으로 떳다하고. 칸엔 불참. 알모도바르씨도 우디알렌씨도 왔는데, 뭔 배짱으로 영화를 이렇게 길게 만드냐고.

이소룡의 무술 사부로 알려진 엽문 스토리. 근데 너무 웃긴건 왕가위 기다리다 못한 제작자들이 견자단을 캐스팅해 영화 엽문 제작완료하고 개봉까지 마쳤다는거.-_-; 역시 대륙의 영화제작.

영화의 내용에서 영화가 만들어지는 여정까지 < 동사서독>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장국영과 장만옥이 빠져있다는 거… 그런 신화적인 캐릭터들을 이 영화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I don’t think so….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구시대의 향수, 시대착오에 빠져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ㅎㅎ 이 모순적인 기대감의 정체는 대체 모지? 왕가위니까!

CategoriesMoive/TV

환상의 그대 – DELUSION, A NECESSITY

You will meet a tall dark stranger
환상의 그대 – You will meet a tall dark stranger (2010)

런던 외곽, 한 할머니가 택시에서 내려 불안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다 허름한 뒷골목으로 스며든다. 40년간 같이 살던 남편에게 이혼 ‘당’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다 지쳐 마침내 점쟁이를 찾아 간 헬레나(젬마 존스). 오갈 데 없는 그녀가 자신에게 남은 한 가지, ‘돈지갑’을 들고 막장으로 향하는 모습 위로 나레이션이 흐른다. “인생은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차 있고,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다.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그녀 주변에는 어느밤 갑자기 ‘영원’을 보게 되어, 조강지처 버리고 새인생 출발해 보겠다 발버둥치는 전남편 알피(안소니 홉킨스)와 갤러리 운영이 꿈이지만 팔리지도 않는 소설이나 쓰고 있는 남편 덕(?)에 갤러리 어시스트 해야 하는 딸 샐리(나오미 와츠), 의대 나와서 안정된 길 버리고 소설 쓰다가 재능의 한계로 이제 리무진 운전수를 해야 할 처지에 놓인 샐리의 남편 로이(조시 브롤린)이 있다.

모두 미래니 전생이니 하는 점쟁이 헛소리에 놀아나는 샐리를 보며 비웃고 짜증내지만 정작 다들 제 꾀에 넘어가 파국을 맞고, 가지를 늘어뜨린 빼곡한 수목, 풍성한 초록의 나뭇잎들 사이에서 벤치에 둘이 앉아 해피엔딩의 키스신을 맞이하는 것은 오직 헬레나 뿐이다. 하지만, 이조차 ‘해피엔딩’이라 부르기엔 뭔가 어색하다. 정신줄 놓은 이들의 ‘그들만의 연대’가 주는 불편함 때문이다. 동의할 수 없는 전제에서 꽃 핀 행복을 지켜봐야하는 자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디 알렌씨는 이런 말도 안되는 전제라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인생은 무의미하고 엉망징창이라는 사실을 아름다운 런던의 구석구석에서 밝혀내며, 관객을 항복시킨다. 너의 그 대단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전제가 정작 너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할 때, 어떻게 할거냐고 질문하며.

이 영화는 집 안에서 행복하지 않은 이들이 집 밖으로 나가 행복을 찾다 병신되는 이야기다. 그래서, 영화는 집 안의 이야기와 집 밖의 이야기로 나뉜다. 집 안에서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다른 것을 바라고, 말을 하지만 내용은 상대방에게 닿지 않는다. 이 엇갈림을 표현하는 것은 샐리의 집 구조다. 서로 분리된 작은 공간들이 복도와 같은 좁은 통로로 연결된 이 집에서, 각자의 공간과 욕망은 이미 분리되어 있다. 그 공간은 이야기하다 불리해지면 도피하는 곳이기도 하고, 양해도 없이 불쑥 침범해 히스테리를 자아내는 곳이기도 하고, 아내의 눈치를 보며 건너집 여자를 관음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들이 대화라는 것을 시도할 때, 카메라는 이들을 편안하게 안정된 고정 프레임으로 잡지 못하고, 이들이 움직는 공간과 공간 사이를 분주히 따라다니며 불쑥 끼어들거나 불쑥 도망친 사람들을 쫓아가며, 커트없이 원숏-투숏-쓰리숏이 연속해서 교체되는 역동적인 변화를 만든다. 두 사람이 소리칠 때,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쓰리숏을 만들었다가, 좌절한 사람이 빠져나가 투숏을 만들고, 갑자기 모두 사라져 보이스만 남겨지는 등 가족이 집 안에서 서로에게 가지는 복잡한 속내와 소통의 난해함을 카메라워크로 보여준다. 숏트가 바뀔때마다 화면에 남겨진 이들은 프레임을 바톤터치 받고, 절망적으로 갈등을 이어달린다. 특히, 로이의 책이 거절당하고 샐리가 상사와 친구의 진실을 확인한 후, 신경쇠약직전의 샐리-로이-헬레나가 서로에게 퍼붓는 3분여 간의 롱테이크는 이들이 직면한 감정적 붕괴를 탁월하게 그려낸 것 같다. 쇼트를 못 보는 내가 쇼트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으니.

집에서 불행한 그들은 시선은 자연스럽게 밖을 향한다. 샐리는 갤러리 오너 그렉(안토니오 반데라스)을 바라보고, 로이는 건너 편 집 창문으로 넘겨다 보이는 빨간 옷의 여인을 욕망한다(이창적 상황!! 히치콕 만세~) 심지어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다른 집을 만든다. 밖은 런던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우디 알렌의 공간이다. 뉴욕에 대해 그러했듯, 우디 알렌은 런던의 아름다움을 속속들이 끄집어내 펼쳐보인다. 그냥 보기 좋은 풍경 말구…그 도시의 진가를 알고 소중히 하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꽃가게, 공원, 거리…런던에 가본 적 없지만, 런던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공간에서 펼쳐지는 비극이라니.

이 비극은 아비를 살해하고, 총기가 난사하고, 출생의 비밀이나 거대한 정치적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일상의 순간 순간 겪게 되는 ‘불안’ 젊은 와이프 몰래 비아그라를 먹고 약기운이 돌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하는 노인네의 ‘불안’ 친구의 귀에서 마음에 둔 남자와 예전에 골랐던 귀걸이를 발견하게 된 순간의 ‘불안’ 홀딱 빠져버린 여자가 멋드러진 약혼자와 팔장 끼고 걸어가는 것을 목격할 때의 ‘불안’ 영혼을 잠식하는 깨알같은 불안의 순간들이 집 밖의 멋진 삶을 찾아 헤매이는 불안한 영혼들의 뒷통수에 끔찍한 비극의 칼날을 꼽는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이들이 당면하게 된 망연자실은 한 번쯤 새 삶을 찾아본 댓가라기엔 너무 과하다. 그리고, 평화의 한 순간은 욕망의 가해자로 가득한 이 스토리에서 우스꽝스러운 ‘환상’에 기댄 유일한 피해자에게 잠시 드리운다.

제 정신 가지고는 살 수 없는 세상, delusion은 일용품일까?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고 다시 돌아오고 싶지만, 집은 무너지고 없다. 너무 과한 댓가를 요구했던 risk-taking. 저 위에서 인생을 부감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우디 선생이 위트를 당의삼아 그린 잔인한 인생 지형도. 가장 어둡고 비극적으로 느껴졌던 내 27번째 a tall dark 우디 알렌.

PS.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에 박수-!

CategoriesMoive/TV

만추

패키지 여행은 재미없다. 패키지 영화도 그렇다.

기대가 컸었다. 시크폐인, 주원앓이로 몇 달 살았지만, 현빈 때문이 아니다. 닿고 싶었던 건 김태용이었다. 휴가 나온 여자 죄수와 날탱이 제비족의 2박 3일 짧은 만남. 쫓기는 남자와 돌아가야 하는 여자. 여고괴담 2와 가족의 탄생같은 *놀라운* 영화를 만든 감독이, 너무 심하게 뻔한 이 설정에 어떤 마법을 걸어줄까가 관전 포인트였다. 드라이하게 말해서 그렇지, 설레였었다. 다시 강조. 현빈 때문 아니고!! 김태용 감수성과의 조우에.

결론적으로 난 이렇게 울부짖는다. 마안추~~마안추~~~만추야, 이 자슥아~~!!! 일단 난 이 영화가 김태용 감독의 영화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안개에 덮힌 시애틀, 더 오리무중인 두 사람의 만남. 그림 엽서같은 멋진 풍광. 현빈과 탕웨이. 어쩌구 저쩌구…영화보다 욕나왔다. 씨발. 돈 받고 아웃소싱만 해 준 거지 쓴 건 아닐꺼야…애써 진정하는데, 떡하니 엔딩에 Written and Directed by 김태용하고 뜬다. 납득도 안돼 집에 와서 찾아보는데, 역시!!! 영화사 사장이 제안한거고, 정황상 탕웨이도 영화사에서 물어온 것 같다. 현빈은 탕웨이 맞춰서 대충 끼워넣은 것 같고. 1년 전 현빈은 애매했을 테니. 둘이 해야 되니까 한국도 중국도 아닌 시애틀 같은 데로 갔어야겠지. 김태용은 열심히 구상했겠지만, 이미 정해진 셋팅이 워낙 타이트해서 운신의 폭이 없었을 거고. 기본적으로 클래식한 로맨스 감정을 잘 못 푸는 것 같다. 어거지스럽구 무리구. 애초에 그거 해야 될 사람도 아니고. 아니, 그런 뻔한 거 정반대의 것을 해야 되는 감독 아닌가!! 그런 유니크한 재능을 왜 이런 패키지 영화에…낭비. 물론 여기까지 다 추측성 발언.

어쨌든 결과는 또 한 편의 ‘호우시절’이다. 요런 영화, 나는 ‘투어 로맨스’라고 분류하는데. 대충 여자 남자 둘이 우연히 만나서 여기 저기 싸돌아다니는 그런 영화. 로드 무비라고 하기엔 이동거리가 그다지 길지 않고 대략 테두리가 정해진 도시 단위의 공간 내에서 동선이 그려진다. 투어 로맨스의 좋은 예, 비포 선라이즈, 어떤 하루(흠) 나쁜 예, 호우시절, 만추. 우선 포인트는 남 녀의 치고 받기. 워낙 1:1 상황이라 둘의 호흡이 중요하고, 꼭 알콩달콩일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두 남녀사이에 흐르는 어떤 식으로든지의 ‘전류’가 극의 재미를 좌우한다. 그 다음 포인트는 스팟의 매력과 스팟에서 이루어지는 의외의, 하지만 이질적이지는 않은 이벤트. 좋은 예는 비포 선라이즈의 청음실이나 케이블카. 나쁜 예, 호우시절 댄스장(So..Cliche’), 만추의 판타지 무언극(생..뚱). 만추는 아무 것도 못 살린 것 같다.

그래, 저런 거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건 저런 거야. 엔딩씬 롱테이크가 좀 와 닿는 순간 탕웨이 오글거리는 독백. 기다림의 실재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긴 것 같아 촉촉히 젖어드는데, 대사에서 확 깼다. 그래, 이건 영화였지! 그렇게 강조해야 되나. 그냥 경계에 버려뒀으면 안돼는 거였니.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에 잠기듯, 영화 속에서 실재라는 꿈속으로 빠져들게…

색계를 못봤는데, 소문대로 탕웨이 대단했다. 뉴스에서 공항 입국이랑 기자 회견 사진 같은 거 보고 뭐야 얘 왜 이래 그랬는데, 영화 속에서는 180도 변신. 낮은 음성, 무표정 속에 뿜어내는 기가 장난이 아니다. 소박한 백지에서 잠들었던 용들이 꿈틀꿈틀 한 마리 두 마리씩 튀어나오는데 허걱. 백 마리는 본 것 같다. 반면, 현빈은 그저 안습. 도당췌 자기절제가 내면화된 성실 노력 매너남 현빈의 어디에 그런 나쁜 남자, 껄렁남 끌어낼 여지가 있단 말인가. 껄렁해 보이려 하면 할 수록, 껄렁해 보이려고 참 열심히 노력하는구나 이런 느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한 데 대사까지 영어로 할려니…어떤 사람인지 모르겠고, 감정 라인이 전혀 안 잡힌다.

영화 보는 내내 장국영 생각이 너무나 간절했다. 아비정전의 첫 장면, 단 한 씬만으로 여심을 뒤흔들어버리는 그런 나쁜 매력. 하기야 그건 장국영 한 사람밖에는 안 되는 거지만.

하지만, 어찌됐든 만추는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극장 꽉꽉 차고. 최소 백만 정도만이라도 가주고. 그래야 김태용이 다음 작품을, 온전히 자기 것인 김태용표 뭔가를 만들지. 그 훌륭한 가족의 탄생이 겨우 20만 넘었다는데, 힘들었겠지. 아티스트에게 흥행은 어려운 문제다. 그래도 하고봐야 하는 것이기에 T_T 하지만, 가족의 탄생은 소중한 영화인데. 김태용 감독도 그렇고. 임권택, 봉준호, 박찬욱, 홍상수…뭐 이런 뾰죽한 산맥들과는 다른 김태용만의 옹달샘이 있는 거다. 맑고 달고, 예민하고 적확하지만 신경질스럽지않은. 개런티받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감독이 아니잖아. 창작이 고통이 너무 힘들어 잠시 돌아간 길이겠지…그렇다고 믿고 싶다. 오늘은 죄다 추측성 발언. 유난히 타블로이드 돋는 밤이군요.

현빈군, 고마워. 이번 주말에만 10만 넘게 들었다는데. 그렇게 떠가지구 김태용 감독이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게 해줘서. 역시, 기특한 자식. (마무리는 알흠답게~)

전대미문의 가족을 탄생시킨 것처럼, 나를 놀라게 하고 전혀 다른 가능성에 기꺼이 끄덕이게 하는 김태용표 감수성을 기대한다. 예민하고 연약하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는 견고한 감수성을. 김태용 감독을 좋아해, 만추보고 열받았음. 애정이 깊어 뜻없는 열받음조차 기록에 남김. 이상!!

CategoriesMoive/TV

파괴된 사람들

작년에 < 파괴된 사나이>라는 영화를 봤었다. 이 영화가 주는 다른 헛점 불쾌함 등은 차치하더라도, 특히 ‘파괴’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피상적 접근에 매우 실망했었다. 그런데, 전혀 그런 기대없이 본 영화 두 편에서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을 봤다.

브라더스 – And thereafter…

나탈리 포트만, 토비 맥과이어, 제이크 질렌할. 호감형 세 배우의 케미에 기대감이 있었다. 포스터를 보고 전쟁 상황에서의 젊은 부부, 형수와의 강렬한(?) 삼각관계 정도를 예상했는데, 이야기의 초점은 그런게 아니었다. 전쟁이 어떻게 한 인간의 영혼을 망가뜨리는지, 그것이 어느 정도로 회복이 안 되는지를 그려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또 하나의 구제불능 타락남이 회복되어 가는 과정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두 사람의 스탠스는 정 반대로 뒤바뀌지만, 어느 쪽에 있든 그들을 하나로 묶고 있는 ‘형제’라는 끈은 느슨해지지 않는다.

이런 아이러니의 중심 축에 나탈리 포트만이 있다. 상실에 울부짖는 포텐 폭발식의 극적 표현이 아니라, 이 후의 일상을 견뎌가는 캐릭터로 그려진 그녀가 좋았다. 상실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 이후의 삶일테니까. 바퀴벌레처럼 밀려드는 하루 하루의 일상 말이다. 아이들이 억지를 부려도, 동생이 돕는답시고 부랑아들을 몰고 와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도, 그녀는 부서질 듯한 끝자락에서 결국 의연하다.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을테지만, 우는 대신 해야 할 몫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모습은 영화에서든, 일상에서든 감동을 준다. 나탈리 포트만이 참 잘했다. 자기가 어떤 역을 하고 있고,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연기였다.

가족의 이야기지만, 영화는 당연한 혈연의 정을 강조하기 보다는, 결함도 있고 나약하기도 하고 실수도 하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애써 최선을 다하려는 사람들을 그려낸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무서운 사실 앞에서 의연했던 그들은 결국 주저앉고 만다.

토비 맥과이어 “I can’t be there, sir. They can’t understand.”
이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까. 너무 많은 날들이 남아있다.

noone
일리야 레핀 <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러시아, 1884~1888

블랙스완 – Paranoia

세 편을 봤는데…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영화는 늘 힘겹게 한다. 그렇게 될 줄 알면서도 결국 보게 된다. 보고 나면…역시나 힘들다. 밤새 어둡고 깊은 꿈에 시달리고 난 후 처럼.

무대에 서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블랙 스완’은 ‘레슬러’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쇼를 보여주고 지켜보는 관객을 충족시켜야 하만 살아남을 수 있는 직종의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강박. 하지만, 레슬러의 미키 루크는 자신을 가둔 덫에서 빠져 나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나의 삶과 연결시켜 볼 수 있었다. 레슬러는 아니지만, 늙어가고,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후회스럽고 고독하지만, 그래도 해가 뜨면 생활인으로 최선을 다하는 한 인간에 대해 공감했다. 그 끝이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까지도.

그런데, 자구 노력의 개입 여지가 없이 저 높은 완벽의 경지만을 추구하는 아티스트의 강박이란 연결선 당췌 안 그어져서…그래도 영화는 충분히 음미했다. 테크닉적인 화면 실험이 완숙해져 이젠 그것만 튀지 않고 이야기에 녹아 들어 강렬한 체험의 순간을 선사한다. 다음 날 밤, 괜시리 등골이 오싹해질만큼. 당연한 찬사가 쏟아지고 있는 나탈리 포트만. 60년대 여배우들의 클래식한 경지를 느낄 수 있었다.

역시 내 취향은 ‘레퀴엠 포 어 드림’이다. ‘중독’의 황폐한 결말은, 중독을 자각하는 인간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캠페인으로보다는 처한 현실과 다가올 운명에 대한 눈돌리고픈 계시록으로 다가온다. 다들 무엇에든 조금씩은 중독되어 살지 않나. 어느 쪽으로든 이런 강렬한 체험을 줄 수 있는 영화가 많지는 않아서, 그래도 나오면 보게 되나보다.

==

두 편 다 나탈리 포트만이 나오는 영화고, 예전에 좋아했던 배우들을 볼 수 있어 반가웠다. ‘사랑과 슬픔의 여로’에서 딸과 사랑에 빠지는 파탄적 매력남으로 분했던 샘 쉐퍼드가 브라더스의 아버지로, ‘한나와 그 자매들’의 자매 중 생기발랄 막내 바바라 허쉬가 나탈리 포트만의 엄마로 나온다. 오랫만에 뚝 끊어 보니, 왜 이리들 연로하셨는지. 다시금 세월이란.

또 한 가지. 브라더스는 내가 본 첫 번째 Netflix Instant 영화. 블랙스완은 …그냥 어떻게 저떻게 보게 된 영화. 디빅스 음음 -_-;; LG 스마트 7이 연결된 TV로는 ‘엘시스테마’를 봤고,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 다큐멘터리 ‘셉템버 이슈’는 KTH Playy의 2개월 무료 정액권으로 PC-아이폰으로 이어봤다. 격랑의 한 가운데에 선 미디어 소비 환경의 as-is와 to-be를 한 사람의 소비자로서 실감할 수 있었던 연휴.

CategoriesMoive/TV

올해의 내 영화

내 영화가 점점 줄어들어간다. 잘 보질 않으니 만날 확률도 낮아지는데다, 나이먹을 수록 개취의 서클은 좁아져만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해 한해 더 귀해지는 2010년 내 영화.

며칠 전까지도 거의 ‘하하하’가 꼽힐 뻔 했다. 무려, 5번이나 보다 졸아 상당히 오랜 기간 재시도를 해야 했는데, 정말 잠이 들고 싶었던 어떤 밤 검증된 수면제 대용으로 틀었을 때 비로소 끝까지 보고 잠이 확 깼다. 백주 대낮에 하릴없이 과거사를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자기 멋대로 복각하고 앉았는 두 남자. 말하다 막히면 지들끼리 막걸리잔 부딪치면 ‘하하하’거리는게, 아주 가관이다. 하지만, 그 날것의 인간들은 우스꽝스럽긴 해도 그다지 나빠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달라졌다고 느꼈다. 한 발 물러서 메타적으로 평가하지 않거나 비아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신천지에 도달한 느낌? 나아가, ‘하하하’는 인간이 더 갔을 때 종교같은 것을 제하고 선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결론 중 하나같기도 했다. 아니, 결론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행동’ 중 하나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영화보다도 이런 영화를 만든 홍상수라는 사람은 지금 과연 어디에 다다른 것일까, 어떤 눈으로 세상과 인간을 보고 있을까가 더 궁금해지는 영화였다.

“어둡고 슬픈 것을 조심해라. 그 속에 제일 나쁜 곳이 있단다” 쿵~하니 묵직했던 이순신 장군님 말씀. 그리고, 열에 달뜬 열차신의 유준상. “난 너랑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어쩌구 저쩌구….” 영화는 말미에서 비극도 희극도 벗고, 모랄 잣대나 결론이란 것도 버리고, 미지의 터널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더 이상 영화같지가 않았다.

영화를 보고 웃기도 울기도 했지만, 감동도 받아 봤고 머리에 쥐가 나기도 했지만, 진짜 내 일상에서 쓸 수 밖에 없으며, 그로써 삶에 중요한 말뚝 하나가 꼽히는 그런 통찰을 말로 들을 수 있는 영화는 많지 않다. “그래, 사람은 못되도 괴물은 되지 말아야지.” “지금 선배의 비극은 제 짝을 만나지 못한 비극이라구!”. 올해만해도 그의 대사들이 절로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상황들이 아주 널렸었다. 그러니까, 그냥 저냥 평범하게 보내는 일상의 나날들에서 그냥 떠오르며 내 말로 쓰게 되는 대사가 나오는 영화들은 특별할 수 밖에 없다. 홍상수의 영화가 나에겐 그랬고, ‘하하하’는 그 중에서도 꼽겠다.

하지만, 거의 올해 막판에 차원이 다른 영화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그것은 바로 ‘Oh Lucky Man’ 런닝 타임 3시간 가까이 되는 이 영화를 다 보고도, 주인공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냥, 언 놈이 이렇게 기똥찬가 그냥 그랬었다. ‘삼신 할매 랜덤’덕에 우월한 기럭지와 조막만한 얼굴 타고나, 멋이란 그 방면 전문가의 손을 타 만들어지는 요즘 배우들이 말고, 뛰쳐나와 혹성 탈출할 듯한 눈알에서 번쩍번쩍 레이저가 나오고 잔인함과 비아냠과 무심함을 한 표정을 어우를 줄 아는 마성의 배우, 배우이기 전에 무엇인가를 붙잡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한 인간. 알고보니, ‘클라웍 오렌지’의 말콤 맥도웰이랜다. 그 역시, 한 때 뜨거웠던 젊음이었나보다.

떡하니 주인공 남자 배우의 original idea에 기반해 만들었다고 자백하는 이 영화는 이전에도 앞으로도 존재할 수 없는 영화같다. 프리 씨네마라는 게 다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영화 본 적 없고 개봉관 영화도 안 보는 처지에 앞으로 더 이런 영화를 보게 될 것 같지는 않으니, 아마 이 계열로서는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이렇게 고작 3시간만에 이 세상의 모든 권위를 하나도 남김없이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대놓고 까댄단말인가.

종교, 정치, 사회, 문화, 자본주의, 공산주의, 의학, 과학…주인공은 영국의 동/서/남/북을 정처없이 누비며 가치란 가치, 깃발이란 깃발은 죄다 초토화시킨다. 참을 수 없이 가볍고 무책임한 방식으로. 고작 이런 걸로 힘의 역학이, 첩첩의 현실이 바뀌겠냐만 잠시나마 속시원했다. 그 발랄한 까댐의 대상에 어처구니 없는 초현실적 상황의 연속이었던 대한민국의 2010년이 절로 대입이 되었다. 2010년 대한민국의 영화가 앞뒤없는 개싸움 스플래터 같은 걸로 오히려 현실에 등돌리는 동안 40년 전 한 영화가 경쾌하게 실실대며, 영화라는 것이 혹은 매체나 문화라는 것이 이 시대에 해야 할 어떤 역할을 대신 해 준거다.

보너스도 몇 개 있다. ‘초콜릿 샌드위치‘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헬렌미렌 여왕님의 매우 앳되고 아나키한 (그래서, 지금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팔팔 영계 버전을 목격할 수 있다. Try not to die like a dog. 무심한 경구들이 속출해 뒷골 땡기게 한다. 그 속에서 파괴된 주인공의 웃음을, 멀리도 아닌 바로 내 방 거울 속에서 목격하며, 2010년 마지막 날 올해의 *내영화*로 정중히 선정해드린다.

O, lucky man! / Alan Price

If you have a friend on whom you think
you can rely – You are a lucky man!
If you’ve found the reason to live on and
not to die – You are a lucky man!

Preachers and poets and scholars don’t know it,
Temples and statues and steeples won’t show it,
If you’ve got the secret just try not to blow
it – Stay a lucky man!

If you’ve found the meaning of the truth
in this old world- You are a lucky man!
If knowledge hangs around your neck like
pearls instead of chains – You are a lucky man!

Takers and fakers and talkers won’t tell you.
Teachers and preachers will just buy and sell you.
When no one can tempt you with heaven or hell-
You’ll be a lucky man!

CategoriesMoive/TV

시크 폐인의 하루 :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 ep1 연하남

가로수길 예쁜 카페에서 참한 연하남(걍 아는 동생이지만, 설정상 연하男이라 치자) 만나 저녁 먹기로 함.
분당-> 가로수길 가는 내내 PMP로 시크 3화 비느 왕자 구간 집중 반복 학습.

카페 문 여니, 왠 오징어가 앉아 있음. 나름 가로수길인데 카페는 왜 이리 허름하고. 초현실적 상황에 급패닉. 여긴 어디야~~ 난 누구고.
BGM. 듀스 < 우리는> ~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
.
.
# ep2 업무 문의 전화

(전화벨 띠리링)

후배 : 차장님, 그간 너무 적조했죠? 잘 지내셨어요?
나 : 아니, 나 요새 잠을 통 못자고 있어. 밤에 잠이 안 와.
후배 : 왜요? 왜요? 늙어서 그래~~ 어디 아프세요?
나 : 아니, 밤마다 비느 왕자 찬양하느라고.
.
.
.

# ep3 역량 진단 오픈

(진단 오픈 후 후배와의 메신저 대화)

후배 : 우헤헤헤헤헤 나는 나를 과대평가하고 있었어 ㅋㅋㅋㅋㅋㅋㅋ
나 : 지극히 정상이구만
후배 : 동료자 1 이 누군지 밝혀야겠어요. 누굴까? 누굴까?
나 : 내가 그쪽한테 그런 질문이나 받아야할 사람으로 보이나?
후배 : 네 차장님 (__)(–) 죄송해요. 제가 무례를 흐흐흑
나 : 너 의료보험은 들었지?
후배 : ㅋㅋㅋㅋㅋㅋㅋㅋ
나 : (퍽~~퍽퍽)

모든 대화의 시크화

.
.
.
# ep4 티타임

주간회의 끝난 4층 카페,
비느왕자 전도에 몰두하고 있는 나에게 다들 이젠 쫌 그만하라며.

나 : (벌떡 일어나서 90도 각도로 인사)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
.

# ep5 복습

침질질, 시크 복습에 넋나간 모습 뎀비님 도촬

sik

연평도 사태로 세상도 맘도 흉흉한데…난 틈만 나면 시크에 빠져, 이러구 있다.
정신차려 보면 늘…….”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연말 번지수 못찾는 잉여심은 이렇게 달나라로-

CategoriesMoive/TV

이창동 – 시

입이 있어도 그 입을 열어 마음을 말할 수 없는 시간.
입은 닫힌 문. 영혼이 묶인 감옥의 문.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두 영혼이
시 한 편을 통해 합체되었다.

누군간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 보아준다면, 그래서 시 한 편 완성해 준다면
고통 속에서라도 위로받을 수 있을텐데.

적정한 합의금 말고, 시 한 편이 필요하다.

CategoriesMoive/TV

마더, the original

마더 (2009)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47701

1.

엄마의 불안한 눈동자는 필사적으로 자식의 육체를 배회하지만, 자식의 영혼은 어디론가 빠져나가 엄마가 붙잡을 수 없는 먼 곳으로 흘러간다.

자식은 여자에게 홀려 넋을 잃고 뒤를 쫓는다. 엄마는 그런 자식의 뒤를 쫓는다. 여자와 자식이 홀연히 사라지면, 쫓던 이들이 남겨진 곳은 미로.

그렇게 영화는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향한다. 강물의 흐름처럼 서서히 방향을 뒤틀어, 반대편 기슭에 숨어있던 경악스런 사실에 다다르기까지. 엄마는 이 음산한 회전의 중심축이다. 자식에게 속아야 할 모든 이유를 가진 사람, 바로 엄마다.

2.

꿈을 꾼 듯한 시간이 흐르고 천천히 눈을 뜬다. 손은 흥건히 피범벅이다. 손에 묻은 피는 닦아낼 수 있지만, 영혼이 두른 피칠갑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것은 누구의 죄일까.

다쳐서 처음 피를 본 사람은 놀래서 피를 닦지만, 피에 흥건히 젖어 있는 자는 더 이상 피를 닦지 않는다. 그는 웃을 수도 있고, 울 수도 있다. 미소를 지을 수도, 다정하게 말을 걸 수도 있다. 뭐든 다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선을 넘어가면 소리가 안 나온다. 그 어떤 것도 아닌 표정을 지을 수 있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사람은 그럴 수 있다.

난 그래도 사는, 살아야 하는,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다. 엉망진창인 채로라도.

3

여전히 < 마더>에서는 밥 먹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아무리 잔인하고 음습한 현실 속에서도, 밥을 하고 먹여주는 한 걱정없다. 난 봉감독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그 모든 밥 먹는, 정확히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밥먹이는 장면이 너무나 살갑다. 얼어붙어 가는 지구를 달리는 < 설국열차>에서는 또 누가 누구에게 어떤 밥을 먹일까? 폐쇄된 극한의 상황에서 밥은 보다 절실한 생존의 상징이 되리라.

인식의 균열이 임계치에 이르러 단순한 한 마디의 질문으로 발화되는 것도 여전하다. “엄마 없어?” 질문인지 절규인지 모를 이 말은 < 살인의 추억>의 “밥은 먹고 다니냐?”에 필적하는 세기의 명대사다.(나에게는^^) 물론 후자는 송강호의 애들립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죽도록 뒤쫓아도 연기처럼처럼 빠져나가고 마는 징그러운 놈이지만, 그래서 억울하고 분하기 짝이없지만 그런 놈조차 밥 먹고 똥싸고 숨쉬며 살아가는 한 사람이다. 모든 게 엉망징창이 되어버린 순간, 짠~하고 나타나 누명을 뒤집어쓰고 내 자식 살려주는 하늘이 내린 동앗줄처럼 반가운 희생양이지만 내 자식보다 더 덜떨어진 저 아이조차 어떤 엄마에게는 귀한 자식일 것이다.

< 괴물>에서 강두는 현서 대신 살아온 아이를 자기 자식인 양 극진히 키우지 않는가. 칼바람 부는 추운 겨울날, 뜨거운 밥을 해 먹이며. 혜자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혜자는 자기 자식 살리자고 또 한 자식을 죽여야 한다. 내 자식을 살린 기쁨과 동시에 자기 자식을 지키지 못하는 세상 모든 엄마의 고통이 혜자에게 쏟아진다. 보편성과 특수성은 뜯어내지지 않는 악귀처럼 쌍으로 들러붙어, 천국같은 지옥을 선사한다.

4.

< 박쥐>란 영화는 그냥 보면 안되는 영화같았다. 자꾸 뭔가 해석을 하게 했다. 이야기와 영화에서 중간에서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해설자의 시점이 걸리적 거렸다. 그가 설명하려는 대상은 잘은 몰라도 어쩐지 대단히 심오하고 멋들어진 것일 것만 같다. 때깔도 죽여줘서, 매우 유혹적으로 지적 도전 혹은 허영을 부추긴다. 아무 생각없이 살던 와중에 뜬금없이 죄니 구원이니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신선한 경험이다. 그냥 그렇다. 멋지지만 어디 먼 나라 의상을 고쳐 입은 듯한 이질감…

< 밀양>은 거대한 세계이지만 너무 칙칙하다. 그냥 눈을 돌려 버리게 된다. < 밀양>이나 < 박하사탕>은 왠만한 영화라면 감히 시도할 수도 없는 영혼의 깊은 곳으로 인도하지만, 그 밑바닥은 너무 이상한 곳이서 다시 혹은 자주 가고 싶지는 않다.

< 마더>는 오리지널하다. 공식도 해석도 아닌 진짜배기 원형의 텍스트. 한국 사람의 이야기. 엄마의 이야기. 너무 사랑해서 죄를 짓는 줄도 모르는 한 사람의 이야기. 고독한 줄도 모르고 거대한 풍경 속을 홀로 헤쳐 걸어 들어가는 너무 많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 .

5.
첫 장면의 물음표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느낌표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 어떤 설명도 필요없이 그 춤안에는 모든 ‘이유’가 다 들어 있었다. 꿈꾸듯 흐르는 영화 속에 푹 젖어 두 시간을 보내고 난 후, 극장 안에서 나 혼자 박수를 쳤다. 참 나, 이렇게 잘 만들 수가 있나.

생략하고 더 생략해서, 알짜배기만 남겨야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것이다.

CategoriesMoive/TV

박쥐 : B급 걸작의 대국민 낚시극

bat.jpg
박쥐 (Thirst, 2009)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인류에 도움되는 일 해보고 싶었던 좋은 남자의 이야기다. 항상 그렇듯 의도는 빗나가고, 때마침 등장하는 나쁜 여자의 유혹에 상황은 더더욱 엉망이 된다. 결국 선택한 거창한 순교의 결과는 고작해야 사태를 원점으로 돌리는 정도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죽어야 했던 남자의 선택에는 숭고함에 깃든다.

박찬욱의 죽여주는 스타일과 국민 배우 송강호라는 간판, 영화의 핵심을 잘라내고 적절히 호기심만 자극한 마케팅의 3박자가 어울려 다시 한 번 초특급 A급 대접 받는 B급 무비를 탄생시켰다. 친절한 장금씨와 싸이보그라도 괜츈해에 이어. A급 영화에 밀리지도 않고, 적지 않은 예산에 다들 탐내는 A급 배우들을 써 오래 공들여 찍고 전국 개봉관에서 일제히 상영하는 고품격(?!) B급 무비. 그래도 인간의 내장을 후벼내 늘어놓은 것 같은 불편한 감정들과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질주하는 유혈낭자 살색만발 비주얼은 여전히 자신이 타협하지 않는 B임을 주장한다. 몇몇 사람들은 견디지 못해 중간에 극장을 나가 버리게 만들 만큼의 강력한 파워로.

인상적인 것은 뱀파이어 영화답지 않은 일상성이다. 순교집단이 모인 프랑스의 병원에서는 다들 모여 배구를 하고, 불치병을 고친 신부는 초딩 동창이며, 동네 한복집 주인여자는 보드카를 마시며 마작을 한다. 이런 낯선 것과 익숙한 것과의 이종교배가 불러일으키는 ‘이상한’ 느낌은 송강호에 이르러 극에 달한다. 평범한 우리를 대표하는 캐릭터였던 송강호가 전혀 해 본적 없는 이상한 뱀파이어가 되었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뱀파이어가 뭐 별건가. 이건 뭐 식성이나 생활 습관 같은 문제라구요.” 이 송강호는 뱀파이어라는 기괴한 존재가 아니라 마치 밀양이나 우아한 세계의 한 장면에 등장할 법한 송강호다. 이 영화 속에서 송강호의 뱀파이어 스토리는 정말 그렇게 현실적으로 그려진다. 그렇지…저런 게 고민이 되겠지. 특별히 분류되는 뱀파이어 영화 속의 뱀파이어가 아니라 오늘 내가 정말 뱀파이어가 됐다면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떻게 하루를 보냈을까를 상상하게 한다. 그래서 가끔은 키득키득 블랙한 실소를 자아내지만, 사실은 그래서 더 큰 충격을 주는 것이다.

그의 최후가 피빛을 넘어서 진한 황금빛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부분 때문인 것 같다. 그래도 사람인데 두 번씩 죽어야 한다는 것은 참 X같은 일일 것이다. 게다가 마침 이전엔 몰랐던 삶의 꿀맛도 알게 되어버렸거늘. 너무 좋은 나머지 이게 죄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은 걸 알아버리고 나서도 선택한 두 번째 죽음이야 말로 진짜 순교이며 더욱 거룩하다. 삶을 초월한 종교인이 아니라 삶에 연연하는 한 평범한 인간…아니 뱀파이어로서 내린 선택이니까. 역시나 지옥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일까……..

그런 저런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려했으나, 역시나 나를 압도하는 건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다. 이런 걸 느끼기 위해 아름다운 5월의 황금연휴에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서 이런 순간 순간을 다 견디고 싶지 않다. 영화에게 빨대 꼽힌 느낌이랄까? 보고나니 기운이 쪽 빠지고 어지럽고 멍때린다. 잘 가지도 않는 스타벅스가 눈에 띄길래 차가운 망고 슬러시를 사 벌컥벌컥 마셔댄다. 극장 밖 밤공기가 이렇게 시원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어디선가 박찬욱 감독은 이런 풍경을 망원경으로 훔쳐 보며 혼자서 ㅋㅋ 거리고 있는 거 아닐까? ㅋㅋ

주류의 피를 수혈받은 B급 무비는 그 자체로 변종 뱀파이어다. 사람들의 지갑에 링겔을 꽂고 쪽쪽 돈을 뽑아마신다. 물론 인터넷으로 자살단을 모집하는 영화 속 송강호처럼, 관객들의 자발적 동의를 얻어. 이것은 그저 그런 인생에서 위대한 혹은 강력한 뭔가를 갈구하는 관객과 자신의 세계를 고집하는 거장 감독의 의기투합이 이루어낸 괴상한 타협점일까? 아무래도 난 영화보다는 제법 차려입고 서로의 팔장을 낀 채 극장에 들어선 이 수많은 사람들이 스크린 앞에서 이 영화를 만나고 있는 장면이 더 재미있다. 대체 저들은 뭘 보러 왔던 걸까? 또 난? ㅋㅋ 네이버 영화평을 찾아보니 아주 난리가 났다. 확실히 박찬욱 감독은 한 방 제대로 날린 것이다. 그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살아남을지 몹시 궁금하다. 거장의 브랜드를 내세워 관객과 아슬아슬하게 유지해온 이 흡혈 관계의 전개가.

CategoriesMoive/TV

영화 세 편 : 벤자민 버튼/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작전

benjamin.jpg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넌 지나간 세월 앞에서 미친 개마냥 미쳐 버릴 수도 있어…운명을 탓하며 욕을 할 수 도 있어. 하지만 결국 끝이 다가오면 그냥 가게 나 둬야 해.

노인에서 시작해 역순으로 살아가야 하는 벤자민 버튼. 하지만 영화는 원치 않는 삶, 풀 수 없는 숙제가 강제된 이의 내면의 고뇌를 파고 들기보다는 불평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몫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벤자민의 삶의 흐름에 초점을 맞춘다.

사랑을 나누었던 여자가 하루 밤 사이에 갑자기 사라져도, 자기를 버린 아버지가 느닷없이 등장해도,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놀러 가도, 사랑하는 가족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순간이 와도, 그는 말없이 모든 것에 순응한다. 참 좋은 사람. 물려 받은 단추 공장 따위 관심이 없어 모든 걸 팔아 사랑하는 이와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사람. 욕심이 없다. 극단적인 비정상이 애초에 불필요한 욕심따위 거세해 버렸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황폐해지기 보다는 삶의 지평을 넓혀가며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책임지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좋았다.

시간이 거꾸로 가든 똑바로 가든 영원한 것은 없으며, 뭐가 닥치든 어떤 인생을 보내든 우리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결론은 let it go라는 것. 영원하기를 바래야 마땅할 사랑하는 이와 보낸 그 짧은 스윗 스팟의 순간조차도, 그는 다음 순간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문제일 뿐, 결국 벤자민과 우리는 모두 같은 흐름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벤자민의 담담함보다는 ‘유한’이라는 실존의 벽 앞에서 울부짖는 데이지의 절규가 더 가깝게 와 닿는다. 그 절규조차도 지속되지 않지만.

vicky.jpg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간만에 우디 알렌 영감님. 게다가 내가 동경해 마지 않는 스페인…그 중에서도 바르셀로나. 게다가 하비에르 바르뎀! …하비에르 바르뎀!! 말라비틀어진 건어물녀의 가슴조차 다시 콩닥콩닥 뛰게 만들 수 이 남자.

하비에르 바르뎀, 그 남자의 하체 수난기 (2007.10.10) ♨

각개로 보면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베스트이지만, 합쳐놓고 보면 좀 해괴한 조합이기도 하다. 뉴욕쟁이 영감님의 스페인 출장이라니, 게다가 페르소나 운운하기엔 너무 동떨어진 이미지의 바르뎀씨. 실제로 연인인 페넬로페 크루즈양. 하몽하몽에서의 그 끈끈하고 섹시한 두 분의 궁합이 어찌나 강력한지 아직도 눈에 선한데. 계열화시키면 180도 반대편에 찍히실 영감님의 영화. 영감님의 시니컬과는 영 거리가 멀 것 같은 열정으로 충만한 가우디의 도시. 이 의외의 콤비네이션이 익숙한 이야기를 새로운 컨텍스트에서 보게 만든다. 새로운 공간과 인물을 결합시킨 효과이다. 결국 소비하고 싶은 건, 혁명적이고 새로운 영화적 실험이 아니라 우디 알렌이었거든.

크리스티나는 실체도 없는 열정을 추구하지만, 재능이 동반되지 않은 열정은 초라하고 그 멋드러진 열정에 수반되는 인생은 피곤하기만 하다. 게다가 진정한 열정-모순 커플의 깍두기 노릇까지 해줘야 한다. 비키는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지만, 오비에도에서의 휴가를 통해 더 이상 과거의 안정된 삶에 만족할 수 없는 경험을 하고 자신의 숨겨진 욕망을 마주한다. 그들은 어떤 일을 겪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하비에르 바르뎀과 페넬로페 크루즈, 이 두 명의 들끓는 스페인 피는 삶의 클리쉐를 부서뜨리는 역할에 너무나 딱이다.

나라고 생각하는 나, 이럴 것이라고 흔히 받아들여지는 이면의 적나라한 실체를 까발리는 것. 영감님 영화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잘난 주인공들은 그 모순 앞에서 당황하고, 스스로 예상치 못했던 결론 속으로 치달아 간다. 그 바닥에서 한 줌의 씁쓸한 진실이 걸러질 때까지. 그래봤자 고작 한 인간의 좁다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무슨 CIA니 FBI니 외계인의 거대 음모를 밝혀내는 것보다 백 만배는 더 재미있다. 내 안의 펼쳐진 우주의 신비를 탐험하게 해 주고 그 지평을 넓힐 기회를 주는 진정한 어드벤쳐 무비다.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에서는 정말 간만에 부부일기나 애니홀 계열의 캐릭터들이 등장해 바르셀로나의 두 달간 자신을 어드벤처한다.

하비에르 바르뎀이 비키를 작업하기 위해 데려간 기타 신이 넘흐넘흐 좋았다. 깊어가는 여름 밤 바르셀로나. 오래된 건물의 베란다에 드문드문 둘러앉아 황홀한 기타 연주를 듣는다라. …휴우. 그 오감의 어택에 인생을 다시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 봤자 돌아갈 수 밖에 없지만. 영감님의 이야기에서 딱 하나, 달라진 부분은 바로 이 결론이었다.

scam1.jpg
작전

박용하는 조승우, 김민정은 김혜수, 또 누구는 누구…타짜의 공식을 그대로 주식에 대입한 듯한 영화인데, 의외로 재밌었다. 영화 자체가 빼어났다기 보다는 영화가 건드리는 이야기가 한 번쯤 직간접으로 주식을 접해 본(당해 본?) 사람의 아킬레스 건을 건드려 자극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주변 가까이에서 들어봤던 말들, 쓰라린 경험들을 잘 비벼냈다.

그래도, 타짜보다는 한 수 아래다. 연기들도 조금씩들 어색하고. 특히 중심을 잡아줘야 할 김민정 캐릭터가 약했다. 고운 처자처럼만 보이고, 박용하에 맘 주는 부분도 너무 순진하시다. 좀 더 쎄게 하드코어로 밀어부쳐 줬어야 영화가 사는 건데. 명대사도 꽤 나오지만, 막말 한국어의 마법사 최동훈 감독에는 못 미친다.

돈과 욕망의 관계는 뻔하다. 그런데 알면서도 당하는 게 사람이다. 나는 예외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너무나 똑 같은 마음에 똑같이 처신하고 똑같이 당한다. 그걸 이용해 한 탕 헤쳐먹는 놈들의 작전 이야기는 범국민적으로 놀아난 대한민국 대표 재테크 주식을 더러운 한 면을 씁쓸히 곰씹게 한다.

# 기억나는 대사들

주식 시장에 그동안 꼬라 박은 수업료를 모았으면 그랜저 세 대는 뽑았겠다 – 현수
바닥인 줄 알고 사는 놈들 지하실 구경하게 될 겁니다 – 주식 살인마 우박사
대가리 딸려서 깡통찼단 소린 죽어도 안해요 – 현수
주식은 전쟁이야. 미사일 팡팡 쏘는데 달랑 총알하나 들고 달려는 개미들 – 증권 브로커
아무리 발악을 해도.. 안되는 놈은 안되는게 세상이구만.. 좆같네.. – 독가스 황종구

CategoriesMoive/TV

체인질링 : A True Story

changeling.jpg

1920년대 LA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2009년 대한민국의 오늘이 낱낱이 들어있다. 어이없는 공권력의 횡포와 촛불집회, 그리고 연쇄살인과 사이코패스까지. 심지어 그 싸이코패스의 인권까지도. 현재 상태 대한민국의 뜨거운 감자는 다 모아놨다. 엉뚱한 아이를 찾아 준 경찰에 맞서는 엄마의 눈물겨운 투쟁 정도로 기대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오니 가장 선명한 것은 사이코패스의 불가해한 행적. 지난 몇 주 쏟아지는 뉴스에 속수무책으로 시달렸던 탓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힘겨웠다. 어설픈 정의의 구현대신, 희망을 가장한 고문의 뫼비우스 띄를 이어가야 하는 남은 자의 비극에 가슴이 먹먹했다.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죽음 앞에서 나약한 인간의 모습에서 내 안의 감춰둔 공포를 대면했다. 닭장의 헐거운 틈을 찾아내는 생존에의 욕구가 가여웠다. 여유로이 썩쏘를 날리는 경찰의 표정에서 싸이코패스의 또 다른 얼굴을 봤다.

하지만 거기의 피켓집회는 변화를, 희망을 만들어 낸다. 오늘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수준은 80년 전 LA에도 못 미치는 것일까?

영화의 완성도니 이런 건 잘 모르겠다. 이 정도면 끝날 때가 됐는데 쯤에서 타협하지 않고 계속 밀어 부쳐 그 이상을 끌어내는 감독의 경지에 감탄할 기분도 아니다. 다만, 이 이야기를 선택했다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영화의 시작부에 A True Story라는 자막이 뜬다. 이 말의 정체는 영화가 전개될수록 더욱 소름끼친다. 현실은 언제나 픽션을 압도한다. 2009년 2월의 대한민국 역시, 그 현실을 살아내고 있다.

CategoriesMoive/TV

서른 즈음에 출몰한 이 괴상한 여자애들 – 사랑니와 홍당무

miss.jpg

요즘은 특이한 걸 보면 “신기하다” “기발하다” “그 근원을 더 파헤쳐 보고 싶다” 등등 보다는 “쩝이다” “왜 저러냐” “거기까지~” 이런 반응이 먼저다. 연로의 동반자이신 귀차니즘. 에너지가 딸려서 그렇다. 굳이 필수불가결한 의식주와 일상의 안위에 기여하지 않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집중할 수 없는 현실이다.

연달아 두 편의 특이한 영화를 보면서 이런 나의 경향을 더욱 확실히 인정했다. 김정은의 사랑니공효진의 미스 홍당무. 영화 이름 앞에 여배우들을 붙여도 충분할 만큼 이 두 편은 그녀들의 영화다. 서른의 김정은은 학원 수학 선생이고, 스물 아홉 공효진은 러시아어 가르치다 부당하게 업글(?)된 학교 영어 선생님. 일단 나이 및 학원을 배경으로 한 활동무대 상당히 유사하다.

그녀들의 유일무이한 관심사, 사랑에서는 어떤가? 정은은 같은 반 첫사랑과 꼭 닮은 열 일곱살 짜리 고딩 학원생을, 효진은 이제는 세월이 흘러 같은 학교 동료 선생이 되었으나, 과거 고3 수학여행을 인솔했던 ex담임 선생님을 사랑한다. 정은은 이가 아프고, 효진은 얼굴이 빨개진다. 둘 다 병원을 찾지만 병의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나란히 놓고 보니 둘이는 막가파 배틀 중인 것 같다. 김정은이 좀 나긋나긋하게 맛간 여자 계열로 격하다면, 공효진은 대놓고 막장 왕따 엽기녀 컨셉을 불태운다. 김정은은 심한 나이차의 청소년을, 공효진은 같은 학교 유부남 선생을 사랑하는데, 영화가 이런 사회적 금기의 삼팔선에서 오락가락하는 ‘안타깝고 아스라한’/’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 과정이겠거니,,,요런 나의 하찮은 기대감은 영화 시작 5분 만에 박살이 났다. 금기에 대해 조마조마하는 건 영화 보는 나밖에 없고, 정작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런 금기 따위는 발에 낀 때 취급도 안 하고 훌쩍 선을 넘어 어디론가 가버린다. 아주 낯설고 기괴한 곳으로. 따라가기 힘들었다. 정신에도 체력이 있나보다. 심력이 딸려 걍 중간까지 가다 말았다. 내가 미처 따라잡지 못한 먼 곳에서 그녀들은 알을 깨고 나오듯 호된 열병을 치르고 성장을 했다고 한다. 뭔가를 발견했다고도 한다. 그 순간이 감동이었는지 미소였는지 도중에 가다 만 나는 모른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이십대를 보내고 나면, 이런 이상한 여자들이 되어 있을 수 밖에 없는 걸까? 그녀들보다 한참을 더 나이 먹어버린 난 그냥 그런 덜떨어진 생각 속에 남겨졌고…

어쨌든 괴상한 그녀들이 30대의 기점에서 도착하게 되는 정류장은 “현실인식”이다. 다행이다. 과정은 못 따라갔지만, 이 결론에서 내 눈높이의 상식은 끝에 조금 간신히 영화와 도킹했다. 거기서 그녀들은 비로소 그토록 애닲았던 첫사랑이 마음 속에 간직했던 모습과 다르게 변해있음을 깨닫기도 하고, 나에게 매일 전화하고 싶지 않았던 당신을 인정하고 과감하게 새출발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렇다. 29-30은 성장에 어울리는 나이다. 아니 성장이 강제되는 나이라고 해야겠다. 25-26에 이미 조루해 사랑이니 인생이니를 다 알아 남의 속을 꿰뚫어 보는 꿍한 표정 짓는 것도 어색하지만, 34-35가 되어서도 똥, 된장을 구분 못해 마냥 퇘퇘 거리고만 있는 것도 한심하다. 그 사이에는 분명히 뭔가가 있다. 29-30의 여자들은 그 강을 건너며, 전에 없던 낯선 풍랑과 씁쓸함을 겪게된다. 그리고, 더 이상 젊지 않은 상태에서 많이 늙지는 않은 상태로 변화해간다. 어깨에 주렁 주렁 매달린 한 짐의 ‘현실 인식’과 함께. 그 과정은 지친다. 아홉수라는 것도 결국 그런 필연적 과정을 일반화한 개념이 아닐까.

그 힘든 걸 거쳐낸 그녀들에게 축하를. 서른의 딱지는 고달픈 20대를 잘 보낸 그녀들에게 붙여진 훈장이다. 그 훈장을 달고 다시 새로운 길을 떠나겠지. 현실을 흡수한 힘으로 보다 현명하고 의연해지길. 그리고…좀 평범해지고, 괴상한 사랑들에 빠지지들 말길. 쓸 것도 아니면서, 시트콤 소재만 늘리지 말고들 쫌…!!!!

ps. 사랑니, 미스 홍당무를 비롯 연애의 목적, 번지 점프를 하다, 누가 그녀와 잤을까? 생날선생 등등 어쩌다 대한민국 학교/학원 선생님이 비정상 캐릭터 전담 직업군이 되어 버렸는지. 만만한 게 선생인가?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