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스크린 부르듯, 후배의 급작스런 호출에 불려나간 란딩에서 올해 두번째 9자를 봤다.
캐디언니가 써 준 점수는 96. 카운팅 끝나고 호기롭게(?) 덧붙인다.
“나 96개 아니야. 올 보기 첫 홀에서 트리플. 그리고 파5 18번 홀에서 좀 긴 파 펏 놓친거…그게 어떻게 OK냐. 99개야 99개.”
OK는 낙장불입이라는 지인들의 만류에도 당당하게 솔직담백한 제 타수를 주장한다.
그렇게 그 짧기로 유명한 더반에서 9자를 두 개나 봤다.
몇 번 못 나간 올해 란딩에서 아주 제대로 체면을 구겼던 드라이버가 80점 정도는 받아준 덕분이다. 연습그린에서 한 30분 집중 퍼팅 연습을 한 효과로 쓰리펏을 줄인 것도 한 몫했다. 숏게임은 한 50점. 비록 이젠 제법이라 자평했던 아이언에서 빵점 쇼크를 받긴 했지만 말이다.
뭐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드라이버가 맞아 들어가더니, 어이없는 아이언 쌩크가 발목을 잡는다. 전혀 몸이 돌지 않는다. 하지만, 99를 주장하는 내 목소리에 어쩐지 자신감이 어려있다. 그래도 9자 아니냐…라는 의기양양의 발로다.
그리고 하루 남은 아쉬운 주말, KLPGA 현대건설 서울경제여자 오픈 FR을 시청한다.
장수연. 고작 고 1, 17세 소녀가 어쩜 저렇게 다부지고 차분한가. 최근 KPLGA의 아마돌풍의 배경을 묻는 김하늘 인터뷰 대답처럼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아마추어라는…그 쟁쟁한 프로들로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자격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FR에서 김하늘, 김보경이라는 하늘같은 대선배와 붙어서도 전혀 흔들림 없었다. 참으로 의젓하고 꽉 찬 플레이였다.
그런데, 18홀을 마치고 샴페인 세례도 다 받은 다음 첫 우승의 스코어카드를 제출하려는 순간, 클레임이 들어온다. 그린을 놓친 15번 홀에서 캐디백을 플레이하는 앞 쪽 깃대 방향에 놓은 것이 문제다. 그것이 비록 의도가 없었다 해도, 그 자체만으로 플레이에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수연이 어겼다는 골프규칙 8조2항 ‘플레이 선의 지시’에 대한 위반이란 무엇인가?
===============================================
8-2. 플레이 선의 지시 (Indicating Line of Play)
a. 퍼팅 그린 이외
퍼팅 그린 이외의 곳에서 플레이어는 누구로부터도 플레이 선의 지시를 받을 수 있으나 스트로크하는 동안에는 플레이 선 또는 홀을 넘어서 그 선의 연장선 위에나 그 선 가까이에 아무도 세워 두어서는 안 된다. 플레이 선을 지시하기 위하여 플레이어가 놓아두었거나 플레이어의 승인 하에 놓여진 마크는 스트로크하기 전에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결국, 장수연 어린이는 2벌타를 받고, 2타 뒤진 채 18홀 마감한 이정은5와 연장에 들어가 우승을 놓친다. 아마추어가 우승을 하면, 상금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KLPGA 퀄리파잉 스쿨(Q School)을 거치지 않고 투어 출전권을 얻을 수 있다. 현재 KLPGA 등록선수는 정회원, 세미프로, 티칭프로 등을 모두 합해 1,471명. 이 가운데 120명만 올시즌 경기 출전권을 획득했고 우승한 선수는 29명뿐이라고 한다. KPGA 기준 1/3600의 경쟁, 사시도 이보다 어렵지 않을 거라는 지옥의 바늘 구멍 레이스를 스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마침 쏟아진 미친 폭우로 경기는 중단되었고, 코스 관리팀은 스폰지를 동원해 그린에 고인 물을 빨아들이고, 더 이상의 빗물 흡수를 막고자 비닐로 그린을 덮고 난리도 아니다. 하지만, 저 지난한 과정을 감수하고도 지켜내야 하는 것이 바로 골프의 룰이었던가.
음…
더 반에서의 내 플레이를 다시 돌려본다. repeat 버튼 꾹꾹-
===============================================
규칙 10-2. 스트로크 플레이 순서
a. 한 홀에서 가장 적은 스코어를 낸 경기자가 다음 티잉 그라운드에서 오너가 된다. 2번째로 적은 스코어를 낸 경기자가 그 다음에 플레이하며 이하 같은 순서대로 플레이한다.
===============================================
→ 지키는 듯 하다가 중간에 아무렇게나 친다. 오너임에도 그늘집에서 공수한 김밥 먹다가 “니가 먼저 쳐” “내가 먼처 칠께” 아름다운 양보들…죄다 벌타감이다.
===============================================
b. 홀의 플레이 도중
경기자들이 그 홀을 시작한 후에는 홀에서 가장 멀리 있는 볼을 먼저 플레이한다. 2개 이상의 볼이 홀에서 같은 거리에 있거나 홀로부터 거리를 결정할 수 없는 경우 먼저 플레이할 볼을 제비뽑기로 정하도록 한다.
===============================================
→ “제가 먼저 칠께요” 이런 말이라도 해 주면 다행이다. 걍 My way로 내 흐름따라 막 친다. 치는 쪽에서 앞에 누가 얼쩡거리면 “볼~~보세요 (원래는 fore~~라고 해야 한단다)”이게 전부다.
===============================================
15-3. 오구 (Wrong Ball)
b. 스트로크 플레이
경기자가 오구를 1회 이상 스트로크한 경우 그 경기자는 2벌타를 받는다. 경기자는 올바른 볼을 플레이하거나 규칙에 의한 처리를 하여 그 잘못을 시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기자가 다음 티 잉 그라운드에서 스트로크하기 전에 그의 잘못을 시정하지 않거나 그 라운드의 마지막 홀에서는 퍼팅 그린을 떠나기 전 에 그의 잘못을 시정할 의사를 선언하지 않으면 경기자는 경기 실격이 된다.
===============================================
→ 파 5, 잘 맞은 볼을 세컨샷에서 우측 언덕을 보냈다 다시 벙커행. 근데 벙커에서 유틸로 친 볼이 지대로 온이 되어 4온 2펏 보기로 막았다. 앗싸, 그린에 가 보니 내 볼이 아니네. 에라이…저 언덕에서 바뀌었나봐. 걍 언니가 그거 치세요. 응~~ 걍 실격이었구나.
이런 거야 좀 드문 예였고, 티잉 그라운드에서 슬그머니 배꼽이 나온걸 알면서도 다시 티꼽기 귀찮아서(또한 민폐인지라) 걍 티샷 고고씽 한다던가, 파 3에서 해저드 보내놓고 과감히 멀리건~~을 외쳐 원온 투펏으로 파를 지키고 환호성을 올렸다던가, 채 두 개 들고 가서 암 생각없이 옆에 놓고 쳤다던가, 해저드에 퐁당한 볼을 대충 그린 근처에 놓고 쳤다든가, “좋은 데 놓고 치세요~” 카트 도로에 놓인 볼을 한~~참 안쪽 거의 페어웨이 가까이 붙여 쳤다던가, 내 채가 맘에 안 들어 친구 채를 빌려 쳤다던가 그냥…한 홀 한 홀이 죄다 벌타고 실격감이다. 대충 받은 수 많은 OK들은 제쳐두고라도 말이다.
이러고서도 9자를 봤다고? 에이, 농담이겠죠 ^^;;;
100돌이라, 110순이라 그래요. 라고 항변한다면 그야말로 난 골프를 치는 게 아니라 걍 골프는 모르지만 연습이라도 해볼까 해서 필드에 나왔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꼴이 아닐까. 그렇다고 PDF로 270장에 달하는 골프 룰을 달달 외우고 다닐 수도 없겠다만 말이다. 어쩌면 골프를 치는 사람은 크게 100개 안쪽을 치는 사람과 바깥 쪽을 치는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그 말도 썩 틀린 거 같지 않다. 기본 룰을 갖추고 100개 안쪽을 친다는 것. 연습이 아닌 골프 라이프는 거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드라이버, 롱게임, 숏게임, 퍼팅 모두 겨우 과락을 면하지 않아야 가능한 100파. 캐디 언니가 적어주는 100파 말고 말이다.
올해 안에 그런 100파를 할 수 있을 지는, 그럴 수 있기를 항상 바라지만.
다들 쉽게 “제대로 셌어?”라고 묻고, “응, 또박또박은 셌지”라고 답하지만, 정말 그런가 하고 그 상황을 오리지널로 돌려보면…글쎄. 정말 그럴까. 정말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니? 그 270 장에 하나도 안 위배될 수 있냐고. 그런 게 머리 아파 “골프는 즐기는 것” 심플하게 정리하고 가기도 하지만. 내 의지로 시작한 것도 아니나, 어쨌든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진지할 수 있는 기본 정도라도 갖추고 가고 싶은 게 솔직한 지금 내 바램이자 숙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PDF 270장을 숙지해야 하는데. 아이폰 휴먼 인터페이스 가이드라인도 고작 152장이었거늘…흑흑. 사는 거 힘들다.
.
.
.
.
백돌이의 룰과 프로의 룰은 서로 다른가? 우리는 같은 ‘골프’를 치고 있는 데 말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게, 골프이긴 한걸까
.
.
.
.
하지만, 요즘 느끼고 있는 것은
준엄한 270장의 룰로 첩첩산중인 경기보다 훨씬 더 힘든 것은
아예 룰이 없는 경기라는 것.
.
.
.
.
그럼에도, 엄격하게 정의된 룰의 바운더리에 천착해
룰 따위 무시되는, 이 세상의 무수한 진짜 경기를 스스로 포기하게 될까봐
룰 없는 경기에서 뛸 수 있는 야생성을 아예 잃을까봐 한편으로 걱정한다는 것.
.
.
.
.
우승을 하고도 빙긋이 웃고 말 뿐,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던 수연 어린이는 경기 위원장으로부터 2벌타 확정 통지를 받고도 별다른 반론을 펼치지 않았다. 그냥 덤덤한 표정으로 스코어 카드의 숫자를 지우개로 지우고 파를 더블로 고쳐썼다. 하지만, 스코어 카드 수정을 완료하자 그때서야 아무 소리도 없이 수연 어린이 눈에서는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저 덤덤한 표정 속에 어떤 불안을 숨기고 있었는가…그래서 우승할 수 있었구나.
기실 자기 잘못도 아닌 것을. 백을 매준 골프 대디, 제대로 캐디백 놓는 자리조차 숙지하지 못했던 미숙한 아마추어 캐디 아빠 탓이지만. 그래도, 책임은 선수가 진다. 그런게 골프고 인생이다.
이정민, 한효주, 장한나, 장수연….KLPGA 여자 선수들은 대개 다 이쁘다. 하지만, 이 상비군계 10대 어린이들은 정말이지 무섭도록 이쁘다. 이들이 있는 한, 앞으로 십 몇년 이상 KLPGA 재미없어질 걱정은 안해도 되겠다. 내 중년의 즐거움을 책임질 무섭고 이쁜 10대들아,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