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인맨하탄을 빌리러 갔다가, 없어서 가져왔다.
다들 재미없다고 보지 말라고 해서 안 봤는데, 이런 영화를 놓쳤다면…식은땀이 좍-
영화는, 꼭 뚜껑을 열어 제친 판도라의 상자같다.
대책없는 혼돈과 우울과 절망들이 튀어 나와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다. 혼란은 더해가고, 이야기는 복잡해지고, 주인공의 갈등은 금새 폭발해서 모든 걸 산산조각 내놓을 것 같다. 이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다. 해결책도 비전도 없다. 그런데 그 끝에 너무도 사랑스러운 희망이 딱 한 줄의 독백 속에 잠깐 등장해, 비탄에 젖은 마음 위로 내려앉는다. 정글의 혼탁한 늪을 뚫고 피어난 하얀 난초처럼.
이 영화는 커튼 뒤의 인생을 보여 준다. 천재로 인정받는 헐리웃 극작가가, 잘 나가는 잡지 뉴요커의 저널리스트가, 건들거리며 여자나 후리고 다니는 건달이, 이렇게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내가 간신히 감추어 놓고 사는 커텐 뒤의 삶. 난 몇 가지 인생의 그 후줄근한 풍경을 새로운 형식의 영화 한 편으로 완성시킨 용기와 재능에 감동했다.
시작부터 좋았다. 단지 대사 몇 줄일 뿐인데, 마음을 홀라당 벌거벗기고 씁쓸하게 웃게 만들어 주는 거. 뜬금없이 종의 기원에 근거해 헐리웃의 생성을 보여주는 것도 영화적 허위나 가식은 버리고 너의 내면과 영화의 내면이 일대일로 만나 진검 승부를 벌여 보자는 제안같아 유쾌했다. 존 라로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아, 바로 이거였군. 그는 이 영화에서, 그리고 최근 본 영화들을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배우들의 연기는 모두 절정이다. 영화를 보면서 딱히 니콜라스 케이지의 1인 2역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학과 자기 분열에 시달리는 찰리와 대충대충 구렁이 담넘기 식으로 살면서 여자 후리기에나 능한 도날드를 마치 두 사람이 연기하는 것 같았다. 굳이 입은 옷을 보지 않고도 누가 하는 대사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그만큼 완벽했다.
메릴 스트립은…그녀의 연기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이나 정글에서 존 라로쉬를 바라보던 시선, 약에 취해 전화하는 장면을 보면서 연기자가 얼마만큼 화면을 압도할 수 있는 지 간만에 실감. 몇번씩 돌려봐도 멋지다. 때로는 지적이고, 때로는 사랑스럽고, 때로는 넋나간 여자 같고, 심지어 관능미까지…’디 아워스’ 때보다 훨씬 좋다. 특히나 ‘욕망과 혼란스러움을 억누르며 애써 태연자약해 하는 그 표정’이 너무도 좋다.
그리고 존 라로쉬! 세상에…이런 연기자가 대체 어디 숨어 있었던 거야. 알고보니 ‘아메리칸 뷰티’의 이웃집 사이코 아빠란다. 너무 지나친 열정은 사람을 죽게 만들지만, 존과 같은 사내는 열정의 비참한 운명마저 이겨내는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 어려운 걸 표현해 낸 연기자가 바로 크리스 쿠퍼다. 앞니 다 빠지고 때에 꼬질꼬질 절어 나쁜 운명에 휘둘린 채 살아가지만, 열정때문에 위대한 사람.
열정이란 단순한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열정의 대상을 한없이 바라보고, 소유하고, 그것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키우고, 팔고, 철저하게 마스터하고, 수없이 많이 가지는 것이란다. 맞아. 열정이란 그런 거다. 그런 게 아니면 열정이라고 하지 않는 거야. 어때, 찔리지?
그런 면에서 또 다시 수잔에게 마음이 기운다. “나에게는 그런 열정이 없다. 내가 가진 열정은 그런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해 보고 싶다는 것 뿐” 어땠을까? 자신에게 명백히 결핍된, 그러나 가장 갈망하는 ‘그것’을 가진 사람을 지켜본다는 거. 그가 운전하는 옆 좌석에 앉아 그가 “Done with Fish!”라고 말하는 걸 듣는다는 거. 자신이 한번도 가져본 적 없는 열정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그에 대해 쓴다는 거.
무한한 열정으로 사는 남자. 열정이 없는 삶을 살면서, 그 남자를 바라보며 그에 대한 글을 쓰는 여자. 다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며 분열되어가는 또 한 남자.
바라봄은 균열을 만들고, 그에 대한 해석과 적응이 다시 새로운 삶을 만든다. 그 과정이 바로 어댑테이션이다. ‘각색’과 ‘적응’이라는 중의적 의미의 ‘adapt’는 이렇게 파괴와 창조의 두 가지 힘으로 기능한다. 바로 그 속에 열정과 두려움, 불안, 자기 파괴, 도취, 슬픔, 도피, 이중성, 운명의 장난 등 우리가 남들에겐 숨기는 인생의 비밀스런 것들이 모두 들어 있다.
==> 동사서독에 나오는 취생몽사 한 잔 쫙-

바로 그 장면의 시작. 존 라로쉬가 수잔에게 난초의 아름다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