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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 과잉 희망의 해독제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벼랑의 끝에 선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 탈출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가끔 어떤 사람들은 글을 통해 그 순간의 실상을 중계한다. 펜을 드는 건, 탈출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자각할 무렵이다. 그 순간 감았던 눈이 뜨이듯, 새롭게 인식되는 세계에 대해 그들은 쓴다.

놀라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절망보다는 희망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희망이라는 몰핀에 기꺼이 영혼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만이 그런 순간에조차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요지의 글만이 출판이라는 사회적 시스템을 통해 선별 및 전파되어 모든 인간이 처할 궁극의 패배에 대하여 잠시나마 납득하게 하는 순기능을 하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난 6월 26일, 노라 애프론 여사가 사망했다. 그녀의 이름에 바로 붙어 따로오는 두 개의 단어가 있다. ‘로맨틱’ ‘코메디’ 심지어 그녀가 낸 에세이집 I feel bad about my neck은 ‘내 인생은 로맨틱 코메디’라는 뜬금없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다. 로맨틱 코메디의 클래식 샐리 해리부터 시애틀의 잠못이루는 밤, 유브갓메일 그리고 최근의 줄리앤줄리아까지. 적정한 유머로 지펴진 알콩달콩 로맨스가 바로 노라 애프론이기에. 그녀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었지만, 뭔가 도시적 센스가 넘치는 활달하지만 다소 깐깐한 매력적인 뉴욕의 여성으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노라 애프론을 각인하고 있었다. 즉, 샐리라는 퍼소나의 실제 인물로서 말이다.

하지만, 부고를 듣고 주문한 그녀의 마지막 에세이집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를 읽고, 난 그녀에게서 두 개의 단어를 모두 떼어내야 했다. 웃기지도, 로맨틱하지도 않다. 원제인 I remeber nothing이 제시하는 황량한 공허에 비하면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따위는 달달하게 가미된 출판사의 판매 전략일 뿐이다. 당연히 철 드는 시절의 이야기도, 그 즈음에 가지게 되는 판타지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수 십년간 기자로 일했고, 뉴욕 타임즈 편집장까지 지낸 여자가 탈출 불가의 벼랑을 직면한 순간의 ‘자각’이 그려질 뿐이다. 한 점의 타협도 위로도 없이, 저널리즘적 팩트주의에 입각해. 그녀가 맞이한 벼랑은 ‘늙음’, 딱 한 걸음 더 내딛으면 죽음인 수준의 노화. I feel bad about my neck에서도 노화는 수사없이 그려진다. 한 마디로, 나이들어서 좋은 점은 하나도 없다는 거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 어떤 위안도 주지 않는다. 괴롭다고 말하지만, 책임지라는 식은 아니다. 죄없는 아이와 부녀자들이 폭격에 죽어나가는 전장의 비극을 리포트하는 CNN 기자처럼, 그녀는 자신과 주변에 닥친 나이듦의 비극을 리포트한다. 과잉도, 미화도 없이.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안도했다. 도대체 긍정해 주지 않는 전개가 힘들 때도 있었지만, 아브라카다브라의 양탄자로 덮어버린 과잉 긍정보다는 돌리던 폭탄을 터트려 주는 편이 덜 불길하다. 어짜피 폭탄은 터진다. 그리고 폭탄은 폭탄이다. 사람을 다치게 한다. 그 괴로움과 절망에 대해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 적막함이 오히려 불길할지도. 폭탄의 장점을 나열하는 것도 별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폭탄의 파괴력을 인식한 후에, 놀래고 충격받는 그 스테이를 보낸 후에, 혹은 보내면서라도, 조금 침착하게 다른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책을 썼을 때가, 이미 70세…

이 책에 담긴 그녀의 마지막 에세이의 제목은 이렇다 < 그립지 않을 목록> 그리고 < 그리워할 목록>. 글이 아니라 목록이다. 마지막 순간에 남기고 싶은 것은 문장이 아니라, 그저 몹시 그리워할 것들의 짧은 목록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목록엔 어떤 것들이 올라 있을까.

“저 위에서는 다음 주에 발행할 < 뉴스위크>를 마감하느라 정신이 없겠지. 하지만 아무도 신경 안 써.” 참으로 놀라운 개안(開眼)의 순간이었다. p.45 < 저널리즘에 대한 러브 스토리>

영화업계에 몸담지 않은 사람들 언제나, 관계자들은 이 영화가 잘 안 될 거라는 걸 미리 알지 않느냐고 궁금해한다. 그들은 묻곤 한다. “몰랐단 말이야?”, “어떻게 그런 걸 모를 수가 있어?” 내 경험상, 진짜 모른다. 시나리오를 쓰느라 온갖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진짜 모른다. 배우들도 너무 좋고, 스태프들도 사랑스럽다. 이삼백 명의 사람들이 황야에서 나만 보고 따라온다. 나의 요청으로 그들은 인생 중 6개월이나 1년 정도를 이 영화에 바친다. p. 149 < 실패작>

한편으로 실패의 장점을 설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실패를 통한 성공에 대해, 실패의 힘에 대해 책을 쓴다. 그들은 실패가 성장의 경험이었고, 실패로부터 뭔가 배울 수 있다고 한다. 그 말이 맞길 바란다. 내가 보기엔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앞으로도 언제든 또 다른 실패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p. 152 < 실패작>

사람들은 언제나 시간이 약이며 고통을 잊게 될 거라고 말한다. 이런 말은 출산할 때 듣는 상투어이기도 하다. 엄마는 아이 낳을 때의 고통을 잊어버린다고들 한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그 고통을 기억한다. 진짜 잊어버리는 건 사랑이다. p.172 < 이혼>

요점을 말하자면, 아주 오랫동안 내가 이혼했다는 전력이 나에 대한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거다. 그리고 이제는 아니다. 현재 나에 대해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늙었다는 사실이다. p.173 < 이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