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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훗날 우리> 后来的我们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5092

주동우 때문에 이어 봤는데
이건 뭐…
이런 이야기 좋지 않아.

后来的我们 영화 OST보다
왠지 난 이게 더 주제곡같았지.

영화 보는 내내 머리 속 턴테이블을 돌며 화면과 겹쳐졌던 곡.

내 인생에 몇 개 안 본 대만 소설 < 끝에서 두 번째 여자친구>의 모티브가 튀어나왔고.

난 최고의 ex걸프렌드야. 나를 만나고 나면 그 다음 번엔 다 진실한 사랑을 만난다고.

돌이켜 헤아리기조차 힘겨운 시간 속을 헤쳐나오기 위해
해야만 했던 결정, 놓아야 했던 소중한 것들.

나중에 잘되고 나서
이런 것들과 재회해
그땐 그랬지. 그런데
What if 이랬을까 저랬을까 이러다
서로의 미래를 축복해 주면서 안녕을 고하는 거….별로다.

너무 매력적인 두 사람이었지만
너무 예쁜 사랑이었지만.
너무 아름다운 고향가는 길이었지만.
너무 그리운 집이었지만.

그래봤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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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시절의 너> 어른이 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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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92066

This used to be our playground.

첫 장면에서 바로 접속했다.
성장한 소녀가 영어 교사가 되어
칠판에 써 놓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이 문장.

소유 형용사를 바꾸었고
동사를 변형했지만
무엇을 발신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이 미묘한 바꿔치기는 퀴즈이자 힌트이기도 하다.

그래,
난 당신이
뭘 말하고 있는 건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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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세계, 각자의 방식으로 소외당하고
아무도, 아무 것도 없이
폭력의 세계 한 가운데 떨궈진 두 아이들이
서로를 돌보는 이야기.

넌 세상을 지켜, 난 너를 지킬께.
범죄를 무릎쓰고서라도 지탱해 나가는
겁대가리라고는 없는 둘 만의 폐쇄된 세계.

흔한 설정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나를 빠져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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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녀는
다만 보호받기 위해서
수동적으로 지킴을 받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목표점에 다가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소년의 지킴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필연적으로
수단을 초월하고, 마침내 목표 지점마저 뒤틀게 하는
생의 깊디 깊은 감정으로 바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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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구를 찾아
저 멀리서 희미하게 비치는
빛을 향해 온몸으로 기어가는
소녀의 모습이 가여우면서도 좋았다.

소녀에게 입시는
꿈이라고 하기에도 사치스러운,
그저 이 황폐한 삶에 드리워진
유일무이한 동앗줄이다.

잡지 않으면
천길만길 현생 지옥의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져 버리는.

건물을 뒤덮은 붉은 현수막과 책상 위에 쌓인 참고서들
다같이 모여 외치는 숨막히는 집단 구호,
입시에 붙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고
학교는 아이들에게 세뇌시키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 위해
독하게 그 작은 몸을 투신하지만,

그토록 기다렸던 결전의 입시날에
길목을 가로막은 산사태처럼
소녀는 인생을 찾아온 운명앞에 무너진다 .

하지만 그 무너짐은
하나의 알을 깨고 나와 새로운 세계로 나아 가는
데미안적인 순간이다.

‘아무도 어른이 되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네요’

생존만이 존재하던 칠흙같던 0과 1의 세계
그 너머의 선택을 하고, 아이는 어른이 된다.

이 과정을 돕는 어른이 있어 다행이었다.

소녀의 연기는 내내 집중하게 만들었지만
특히나 심문실에서의 클로스업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한 영화 안에서 정유미가 안나 카리나로 변신한 듯한 느낌?

고다르의 비브르 싸 비 Vivre Sa Vie
안나 카리나가 < 잔 다르크의 수난>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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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주동우의 얼굴은 이 장면을 떠올리게 할 만큼 파워풀했고
La mort! 죽음을 예감하는 잔 다르크와
황폐한 세상 속 생명의 가능성을 묻는 소녀의 질문이 일맥상통했다.

대신 죄를 짊어진 소년이라는 공통점에서
일본 드라마 < 백야행>도 떠올랐지만
그렇게 퇴폐적인 마무리가 아니어서 안도했고.

함께 어둠속으로 뛰어들자고 두 손 맞잡고,
어떤 설득으로도 흔들리지 않은 결기로
그 손을 놓지 않았던 소년과 소녀가

움켜쥔 깍지를 풀고
끝내 선택한 빛의 세계가 눈부셨다.

그렇게 알을 깨고 나온 주인공들은
Used to be에서 걸어나와
Is의 오늘에 이르른다.

감독이 던진 퀴즈의 정답은
This is our playground.

그들의 플레이그라운드는
계속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상상해 보았다.
잠시나마 행복했다.


This used to be my playground
여긴 내가 뛰어놀던 놀이터

This used to be my childhood dream
어린시절 꿈을 꾸던 곳

This used to be the place I ran to
내가 뛰어 놀던 곳

Whenever I was in need
내가 절실하게

Of a friend
친구가 필요했을때

Why did it have to end
왜 그렇게 끝나야만 했던가

And why do they always say
왜 항상 내게 그렇게 말했던가

Don’t look back
뒤돌아보지말고

Keep your head held high
머리를 곧게 세우고

Don’t ask them why
이유도 묻지 말라고

Because life is short
인생은 짧다고

And before you know
그 사실을 깨닫기 전에

You’re feeling old
이미 늙어버렸음을 깨닫는다고

And your heart is breaking
결국엔 상처를 받지

Don’t hold on to the past
과거에 집착하진 말고

Well that’s too much to ask
이해하려고도 하지 말라고

This used to be my playground (used to be)
여긴 내가 뛰어놀던 놀이터

This used to be my childhood dream
어린시절 내 꿈이 자라던 곳

This used to be the place I ran to
내가 뛰어 놀던 곳

Whenever I was in need
절실하게

Of a friend
친구가 필요했을때

Why did it have to end
왜 그렇게 끝나버렸던건지

And why do they always say
왜 내게 그렇게 말했던건지

No regrets
후회는 말라고

But I wish that you
그래도 난 니가

Were here with me
여기 나와 함께 있음 좋겠어

Well then there’s hope yet
아직 희망이 있지 않을까

I can see your face
니 얼굴이 생각나

In our secret place
우리만의 비밀 장소에서

You’re not just a memory
넌 내게 추억 이상이거든

Say goodbye to yesterday (the dream)
지나간 일들과는 이젠 안녕

Those are words I’ll never say (I’ll never say)
전에는 한적 없는 말들이야

This used to be my playground (used to be)
여긴 내가 뛰어놀던 놀이터

This used to be our pride and joy
우리가 자랑스러워하고 즐거워하던 곳

This used to be the place we ran to
우리가 같이 뛰어 놀던곳

That no one in the world could dare destroy
그 누구라도 파괴할수 없는 우리들만의 것

This used to be our playground (used to be)
우리가 놀던 놀이터

This used to be our childhood dream
우리 어린시절의 꿈이 자라던 곳

This used to be the place we ran to
우리가 뛰놀던 곳

I wish you were standing here with me
니가 나랑 같이 여기 서있다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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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베를린에서 – Netflix 적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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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예술 영화인 줄 알았는데, 4편의 시리즈와 메이킹까지 다 보고 나서는 이런 것이 넷플릭스적인 게 아닐까 싶었다. 무료 1개월 가입으로 겨우 대표작 몇 편을 정주행했을 뿐이지만, 플레이하는 편마다 모두 넷플릭스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강렬한 세계였다. 시장 치킨을 먹다가 처음으로 KFC를 먹었을 때, 수퍼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베스킨 라빈스를 처음 맛보았을 때의 느낌.

그리고 베를린에서

19살의 여주인공 에스티는 자신의 삶을 짓누르는 숨막히는 뉴욕의 유대교 하디시즘 공동체에서 걸어 나와 가방 하나 없이 입던 옷, 신발 그대로 미리 몰래 만들어둔 여권을 들고 비행기에 올라 베를린으로 탈출한다.

딱히 치밀한 계획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지만, 상황은 예상대로(?) 복잡하게 얽혀간다. 받아주리라 생각했던 엄마는 레즈비언 연인과 동거 중이고, 랍비의 명을 받은 남편과 조폭스런 남편의 사촌이 합세해 뒤를 쫓는다. 심지어 그녀는 임신 중이다. 순혈한 유대 핏줄의 새 생명을 품고 유대인 학살의 역사를 품은 도시를 떠돈다. 탈출이 부랑이 되고, 대학살의 장에서 새로운 삶, 새 생명의 터전을 찾는 역설.

하지만 결국 용기와 결단, 재능과 운의 대동단결 총결집으로 그녀는 베를린에서 간절히 원했던 새로운 인생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꽤 괜찮아 보이는 독일인 남친과 음악가 친구들, 카리스마 넘치는 교수님 스폰서까지 단박에 겟한 채. 행운의 여신이 짓는 미소는 그 어떤 인간의 계획보다 치밀하고 찬란하다. 아니면 죽을 힘을 다해 낸 용기란 이 정도의 행운을 불러들이는가…

구속의 사슬을 끊어낸 자유를 향한 한 여자의 여정에 감동과 자극을 받으며 하게 되었던 질문이다.

하디시즘 – 희귀종

넷플릭스는 희귀한 것들을 자극적으로 다룬다. 희귀하다는 것은 소재에 있고, 자극적이라는 것은 디테일에서 나온다. 희귀한 것을 매우 디테일하게 잡아낼 때 감각은 요동친다. 그렇게 넷플릭스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컨텐츠가 된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뉴욕 속 하디시즘 공동체같은 것을 들이밀며.

귀 옆에 대롱대롱 매달린 곱슬 머리부터 의상, 식사 예절, 종교 의식, 가족과 남녀 관계의 매너까지 이건 글로벌 시대의 위아더월드를 무색하게 만드는 철저히 폐쇄된 그들만의 세상이다. 제 3자가 보기엔 기기묘묘하지만 그들에게는 매일의 일상이고, 시대를 역류하고 문명화를 포기하면서까지도 지켜내야 할 전통이다.

이 희귀한 하디시즘 전통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철저한 고증으로 디테일로 그려냈다. 마치 다큐멘터를 보는 듯한 경험이었다. < 타이거킹> < 블라인드 데이트>을 봤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뭐 이런 인간들이 다 있나. 이런 경험을 넷플릭스에서 지속적으로 하게 된다. 몇 배로 쎈 19금 그알을 보는 듯한.

이 다큐멘터터리는 ‘난 남들과는 달라요’라고 말하는 한 여자의 침입으로 드라마가 된다. 제 3자임을 선언한 그녀는 그들의 이상함을 인지할 수 있는 존재이며, 전통이라는 미명 하에 짓밟히는 개인의 삶에 분노하는 관람자의 시선과 궤를 같이 한다.

그녀는 곧 결혼을 통해 그 남들의 본진 속에 던저져 온갖 모멸을 겪으며, 그 이상함을 수용하고 남들과 같게 살아갈지를 시험당하게 된다. 물론 주인공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대신 탈출을 선택한다. 실제 존재하는 볼거리에 대한 다큐적 흐름에서 삐져 나온 드라마의 시작이다.

행운의 여신 – 웰메이드 반전 드라마

하디시즘 커뮤니티가 다큐스럽게 그려지듯, 드라마 파트는 또 매우 전형적인 드라마스럽다. 탈출 이 후의 메인 테마인 음악 아카데미 입학까지의 과정이 그렇다. 매 순간 시의 적절한 운명적 만남과 운이 함께 한다. 4부작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치밀한 개연성을 셋팅하고 지루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서울과 베를린은 얼마나 다르기에 저렇게 처음 간 커피숍에서 운명을 바꿀 남자를 만나고 그를 통해 우정과 무작정 일박으로 교수님 눈에 띄어 며칠만에 그 지역 사람들에게도 8%밖에 가능하지 않은 장학금 시험에서 저런 반응을 얻는지(최종 합격 여부는 미정이지만)…노숙이다 뭐다 운명을 헤쳐나가는 지난한 과정같지만 산책하던 다리 아래서의 의외의 발견이 대반전을 포함해 따지고보면 엄청난 세렌디피티의 축복이 가득한 여정이다.

여기에 화룡점정인 엄마까지. 독일 시민권 서류는 몇 년 후를 내다본 엄마의 빅픽처, 신의 한 수 였다.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는 있지만, 자식의 미래를 예견하고 그때 짠하고 꺼내들 결정적 비기 하나를 던져주고 가는 엄마는 별로 없다. 계획이 있는 넷플릭스적 엄마였다.

한 소녀에게 전부였던 19년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길고 기나긴 터널을 지나는 것 아닐까. 아무리 걸어도 짧아지지 않는 터널 같은 것…이건 < 프리티 우먼>과도 같은 게 아닐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헐리우드 드림처럼 탈출에의 동경을 부추키는 무책임한 환상같은 게 아닐까.

이런 딴지조차 미리 예상한 듯 오프닝 타이틀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텍스트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 실화는 넷플릭스라는 채널에서 치밀한 기승전결과 놀라운 반전을 숨겨둔 웰메이드 드라마로 다가온다.

<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희귀한 소재의 다큐멘터리로 접근한 뉴욕편과 전형적인 넷플 여주의 고난극복기처럼 보이는 베를린편의 이중주로 다가왔다. 양쪽 모두 넷플릭스적이다.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시라 하스. 커다란 눈코입, 가늘고 밋밋한 어린이 몸매는 일반적인 미인의 기준과는 많이 달랐지만, 연기는 잊혀지지 않았다.

이렇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넷플릭스에서는 가능하다.

희귀종의 딜레마 – 무경계
하디시즘 공동체는 악인가? 하지만, 드라마는 그들을 단순히 여인들의 삶을 짓밟는 소시오패스 집단 범죄자로 그리지는 않는다. 왜 그들은 그렇게 사는가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는 설명들이 군데 군데 힌트로 주어진다.

무엇보다 그들이 그런 문화를 유지하게 된 배경에는 잔인한 대학살의 집단적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다. 생존이라는 명분으로 출발했지만 이제 그저 받아들여야 할 일상을 의지로 지탱하는 집단이다.

그들이 그들이 사랑하는 아내와 딸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억압은 무엇인가. 그것은 떨쳐내야 할 미개함인가 아니면 종족 보존의 기재인가. 에스티는 남다른 자각과 개인기를 발휘해 벗어난다. 하지만, 집단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여전히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을 선택한 여인들의 삶은 무엇일까.

어쩌면 무개념 신천지 같기도 하고, 어쩌면 스페인에 맞서 자신의 영토를 지키고 있는 올곧은 인디언 부족같기도 하다. 그들을 미개로 규정하는 것이 오히려 폭력같기도 하다. 드라마는 답을 주지 않은 채 그 두 집단 사이의 어디쯤인가를 오간다. 이런 선악에 경계를 짓지 않는 수용성을 넷플릭스에서는 자주 접하게 된다. 희귀한 소재에 대한 판단보류의 시선이다.

이런 모호한 지점들은 결국 나의 삶에 대해 같은 질문을 던진다. 무엇에 구속받고 있는가. 그것은 구속인가 생존인가. 왜 용기를 내지 못하는가.

차라리 명백한 선과 악이었으면 좋겠다. 용기는 낼 수 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에서 벗어나야 하는가이다. 에스티는 자신도 알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음악을 찾아가고 있었다. 넷플릭스 속으로 들어가 드라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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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 & Glory – 가장 사적인 당신

결국 해냈네요…감독님.

영화의 마지막 10초, 반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감정이 한 템포 뒤에 밀려왔다. 오래간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철들고 제 인생의 한 켠은 늘 감독님의 영화를 기다리고 보는 것이었어요. 속도계를 부숴버리고 폭주하는 인간들 때문이었어요. 모순되고 잔인한 인간의 본성이 빚어낸 난장판때문이었어요.

그런데 희망이라니요. 이렇게 분명하게 빛나는 희망이라니요. 그것이 이 기나긴 여정의 끝이었다니요. 이건 그 영화 속 결말들보다도 더 어처구니가 없잖아요. 감독님…그런데…

살바도르는 결국 해냈네요.

머나먼 마드리드의 어느 극장, 옛 연인이 무대에 올린 이야기를 지켜보던 남자가 흘린 것과 같은 색깔의 눈물이 내 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프닝 – 우리는 이제 공식적으로 늙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푸른 빛. 반데라스는 수영장 물속에 미동도 없이 사지를 늘어뜨린 채 가라앉아 있다.

부력이 의지를 대신해 그를 떠받치고 있을 뿐. 영화는 불길한 사체의 냄새로 가득하다.

육체의 화신으로 각인된 반데라스가 다짜고짜 눈에 들이미는 육신의 쇠락. 하지만 놀란 건 백발과 흰수염, 근육이 빠져 나간 쭈글한 몸 때문이 아니다. 마침내 그가 수면 위로 떠올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그 안을 가득 채운 것. 비어 있음. 한때 모든 여자의 심장을 꿰 뚫었을 라틴 종마의 찬란한 빛이 공허로 꺼져 있었다.

영화도 안 만들고 뭐하고 사냐는 지인의 안부에 그냥 산다고 말하지만, 그냥 살아있다고 말할 때 그 삶은 이미 죽음을 가리킨다. 입으로 산다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의 눈빛은 정확히 죽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피끓던 젊은 날 열광했던 아이콘의 쇠락은 정확히 그와 함께 당도한 나의 삶의 같은 지점을 겨눈다. 알모도바르의 버스에 함께 실려 온 지난 이십년의 시간 뒤 맞이한 이 순간을.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얼마만큼 죽어있는가.

우리는 한 버스를 타고 있어. 알모도바르의 버스에…감염은 시작되었고, 너도 곧 저렇게 될거야. 아니 이미…

우리는 이제 공식적으로 늙었다. 반데라스가 선언한 공지사항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 후의 이야기는 나에게 그 버스를 타고 들렀던 정류장과도 같은 세 편의 영화에 대한 기억을 소환시켰다. 시간이 더해져 함께 나이 먹은 세 이야기. 나에게 이 영화는 매우 애정했던 세 영화의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져 도착한 공동의 종착지였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너무나 밝은 빛이었다. 어이없게시리. 늙은 몸으로 뒷덜미에 내리꽂은 알모도바르의 완벽한 배신이었다.

내가 사는 피부 – 육체

영화의 시작. 살바도르의 고통(pain)의 면면은 속속들이 육체적인 것이다. 인간을 죽음으로 이르게 만드는 온갖 병증이 나열된다. 육신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만드는 환각의 순간은 자신의 전 여생을 돌아보는 기나긴 기억의 여정이 된다.

육체는 < 내가 사는 피부>의 주요 테마다. 한 인간을 완벽하게 소유하기 위한 육체의 해체와 변형. 하지만, 여기서의 육체는 겉면, 즉 피부였다. 해체의 대상과 주체가 있었고, 들끓는 욕망이 드라이브한 인위적인 해체였다. 그렇기 때문이 거기서 피부를 벗겨낼 때는, 고통스럽고 기괴한 풍경 속에서도 깊은 탐욕의 단 맛이 전해져 왔었다.

이 영화에서의 고통은 육체의 속, 장기의 변형으로 깊어졌다. 욕망이 아닌, 욕망이 거세된 몸에 들어닥친 사고. 그 누구의 욕망도 개입되지 않는 육신의 속절없는 쇠락이다.

이 몸 속의 변형은 더 이상 실사로 그릴 수 없어, CG가 등장한다. 그래픽을 사랑하시고 기가 막히게 쓰시는 알모도바르 감독님 영화 속에서 그래픽 같은 장면은 아니지만, 이렇게 기나긴 진짜 그래픽은 처음이었다. 그게 신체의 장기에 관한 것일 줄이야. 감독님이 추구해 온 존재의 해부학은 이렇게 생 몸에 카메라를 들이미는 깊이에 이른다.

늘 감독님의 집요한 육체의 현미경이 어디까지 파고들까 궁금했고, < 내가 사는 피부>를 보고 나서 여기가 그 종결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장기가 남아있었다. 한 인간을 파헤쳐 눈 앞에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마지막 레벨. 뭐, 이 다음은 세포와 바이러스를 들고 오시려나.

귀향 – 엄마

중독은 잠시나마 현재를 잊게 만들고, 육신의 고통이 잠시 자리를 내어준 사이 환각과 기억 사이의 시간은 어린 시절을 소환해낸다. 곧 소멸할 존재에게는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치유의 순간같다. 햇빛이 부서져 내리고, 노랫 소리가 들려 오고, 거기에 엄마가 있다. 알모도바르의 엄마가. 우리 인생의, 아니 최소한 알모도바르가 심어준 세계의 지분 속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빨래터의 찬란한 빛과 강인한 여인들의 노래…자연스럽게 영화는 < 귀향>을 소환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여인들. 씩씩하게 노래를 부르며 시냇물에 빨래를 하는 여인들. 역사에 담요를 깔고 자고, 초콜렛을 잘라 넣은 빵으로 끼니를 떼워도 무너지지 않았던 엄마들. 비가 새는 토굴을 아름다운 갤러리로 가꾸어 내고야 마는 너무나 익숙한 존재들이다.

잠시 엄마는 너는 좋은 아들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곧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엄마는 죽음으로조차 아들을 구한다. 영화는 기억의 환각 속 엄마를 불러 내 현재의 영화로 환생시키는 마법으로 끝난다. 그는 그렇게 구원 받았다.

나쁜 교육 – 사랑

시작은 아이맥 바탕화면에 저장되어 있던 파일 하나. 그 파일의 이름인 Addicion(중독)은 중독되었던 과거를 무대 위에 올리고 시간과 장소를 거슬러 다시 그 중독의 대상을 만나게 한다. 그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 쓴 자신의 이야기를 듣게 만들 수도 있다.

전화를 받았던 밤, 살바도르의 떨리는 목소리. 설레임만을 증폭시키는 어설픈 밀땅 코스프레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마지막 키스와 참지 못한 눈물…이 순간에도, 말을 하는 것은 반데라스의 대사가 아니라 눈빛이다.

중독자였던 연인은 중독을 벗어나 정상적인 삶의 괘도를 찾았고, 중독된 그를 감당하지 못해 떠난 내가 오히려 중독자 신세가 되어버렸다. 완벽하게 뒤바뀐 처지가 그를 실감하게 했을까?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갈까?
그러고 싶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아…살바도르는 이 순간 이미 해냈다. 감독님의 대놓고 던진 힌트를 내가 못 알아차린 것일 뿐. 가장 큰 중독, 사랑. 그 중독의 대상을 끊을 수 있는 그는 더 이상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마약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육체를 회복하려한다.

이 순간 난 이미 나쁜 교육의 결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지막 대사. 사랑하는 엔리께…난 해냈어. 그 비극성을. 그래야 알모도바르지. 진정한 불행이란 이렇게 가장 희망적인 순간에 아무 것도 아닌 것만 같은 사래들림같은 것이 덮쳐오는 거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순간에 뚱보신부가 들어와 목을 비틀어버리는 것처럼.

하지만 아니었다. 나쁜 교육에서의 그 비극이 뒤집혔다. 정말 해냈네요. 감독님. 그 사람을 문 앞에서 보내고, 약을 끊고, 현대 의학으로 육체의 겁박에 이겨냈어요. 그리고 페네로페 크루즈가 그 순간을 완성시켰다.

구원은 사랑으로부터…
사랑하는 그 사람들으로부터.

아 이 뻔하디 뻔한 결론을…
알모도바르에게서……………….

오스카

기생충 신드롬에 소름돋으면서도, 외국어 영화상 후보의 한 칸을 차지했다 조용히 지나간 < 페인 앤 글로리>가 내내 가슴이 남았있었다. 한 시대 앞서 오스카란 로컬에 그 누구보다 가장 사적인 것으로 인터내셔널의 아스팔트를 깔았던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부탁했었다. 다시 뜨거워져 달라고 그렇게 어처구니 없고 광기어린 알모도바르로 돌아가 달라고. 그게 아니었다. 삶의 날 것을 있는 그대로…식어버린 육체는 식어버린 그대로 스크린 위에 바치는 것이 알모도바르였다.

오스카의 최대 유행어를 조금 응용해 본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다. 알모도바르, 당신 삶을 산 채로 도려내 스크린 위에 바친 사람. 뜨겁디 뜨겁던 아름다운 젊은 육체 뿐만 아니라 거의 사체가 되어버린, 그래서 이젠 김도 더 이상 나지 않는 노인 냄새 진동하는 육체조차 날 것 그대로 영화의 제단에 올려놓은 사람.이 보다 더한 사의 경지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감독님에 대한 나의 애정의 오해를 바로잡는다. 그저 대책없이 날뛰어서가 아니었다고. 그의 체온이 아니라 가공하지 않음을 사랑한 거라고.

각자의 온도로 뜨거웠던 세 영화가 이렇게 하나로 만났다. 누구도 데이게 하지 못할 미적지근한 온도로…그 사람에게조차 하룻밤을 허락하지 않고 문 앞에서 그냥 돌려보낼 정도로. 하지만, 격하게 부둥켜 침대 위를 뒹구는 것보다 더 깊어진 마음으로. 그리고, 영화는 계속된다. 초상화 뒤에 쓰여진 편지가 도착하듯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알모보바르의 영화가 나에게 도착했다.

내 인생의 오스카를 당신에게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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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푸가 – 광주를 위한 제사

극단 뛰다 < 휴먼 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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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가

휴먼 푸가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이 반복될까 궁금했다. 궁금증을 푸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입장부터 바로 배우들이 몸으로 그려내기 시작하는 기호들.

무대에서 전개되는 상황과 호응하지 않고 독립된 언어로 반복되는 이 몸짓의 기호는 미스테리 서클처럼 낯설게 다가온다. 이런 형식과 내용의 이격은 처음엔 혼란을 주지만, 반복의 횟수가 늘어날 수록 괴리는 점차 좁혀지고, 마침내 기호는 극 전체를 관통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절실하게 발신하는 형식적 매개로 작동한다. 기호가 가진 추상화의 기제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건과 영향, 몸과 영혼의 경계를 허물며.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변하지 않는 것을 이용하는 것처럼, 같은 기호 위에 얹혀지는 각자의 다른 이야기들은 같은 광주 위에서 그 광주가 비틀어 놓은 각자의 다른 삶의 구체성을 노래한다. 같음과 같지만 같지 않음을. 각자의 생의 파편이 층층히 쌓여가는 불연속면 위에서 기호들은 때로는 격하게 파동치기도 하고 때로는 얌전히 누그러지기도 한다. 마치 멜로디는 최소화하고 리듬으로만 진행되는 원시의 음악처럼. 이 몸의 노래는 아직도 이승을 떠나지 못한 광주을 이고 가며 부르는 두 시간의 만가로 들린다. 이 길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까.

배우

이 형식 안에서 배우는 표현의 적극적 주체라기 보다는 도구처럼 쓰인다. 대사는 감정을 뺀 기계적인 톤으로 발화되고, 상황의 재현이나 감정의 전달, 배우 면면의 개성은 억제되어 있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리듬이다. 대사의 높낮이와 속도, 몸으로 그리는 괘적의 베리에이션.

배우들은 일정한 형식적 아웃풋으로 엄격히 제한된 기계같다. 원작의 문장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실어나르는 대사는 육신을 잃은 망자의 한을 읊는 빙의된 영매의 소리처럼 들렸다. 대사를 말이라기 보다는 소리에 가까운 것으로 만드는 이 형식의 통제는 실제로 존재했던 그 시간의 비극성과 그 비극성을 오롯이 옮기고자 사투했던 작가의 문장을 다시 극으로 옮기는 단계에서 더 이상 가공은 하지 않겠다는 의지 혹은 그럴 수 없다는 포기로 읽힌다. 이렇게 배우들은 연기를 내려놓고 자신의 몸을 오롯이 극에 내어주었다. 제의에 바쳐진 육신으로써. 이것이 배우로서 광주에 바칠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닐까.

공간

이런 공기 속에서 나도 자연스럽게 스토리에의 몰입이나 감상적 설득보다 제의에 참여한 엄숙함으로 극을 대하게 되었다. 관객과 무대가 서로 마주보는 대신, 관객석을 좌우로 나누고 그 사이에 들어앉은 무대는 이런 동참의 아우라를 짙게 한다. 하지만, 배우들의 동선은 이 무대를 훌쩍 뛰어 넘어 극장 전체를 넘나들고, 서로 다른 위치에서 각자의 씬이 만들어진다. 배우들의 연기가 서로 합주할 때도 있지만, 동떨어진 어떤 배우의 씬은 떼어 놓고 봐도 흥미롭다. 두 셋을 묶어 볼 수도 있고, 전체의 그림을 내려다 볼 수도 있다. 관객은 시야를 줌인/줌아웃해 무대의 곳곳을 탐색하며 극의 큐레이터가 되어 지금 이 순간 어디에 집중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게다가 봐야할 것은 무대와 배우만이 아니다. 극이 진행되는 시야에 강제되는 것은 객석의 나머지 반을 채운 반대편 관객들. 그들의 반응과 시선이 진행 중인 극에 걸쳐져 나의 경험을 간섭한다. 나는 여기를 보고 있는데 저 사람은 딴 데를 보고 있네. 저 사람은 이미 울고 있군. 종종 컨닝과 동요로 이어지는 이 간섭 현상은 가상 상황으로 분리된 극에 집중하는 대신 내가 지금 여기에 참여 중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환기시킨다. 함께 있지만 각자 다른 것을 보는 경험. 너와 나는 같은 것을 보면서도 또 얼마나 다른가. 하지만 우리는 지금 함께 여기에 있다. 광주를 위한 시간에.

전체 무대의 맨 뒷편엔 병풍같은 벽이 놓여 있다. 산 자의 막다른 골목. 죽은 자는 넘지 못하는 경계. 죽은 자와 산 자의 공간을 나누는 무대의 시그니처. 그 앞에서 제의가 진행되고, 관객들은 옆에 둘러서서 함께 이를 지켜본다. 배우들은 그 병풍에 몸을 던져 그림을 새긴다. 산 자와 죽은 자,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자를 가른 폭력의 순간을. 그 병풍의 뒤에는 분명 광주의 관이 놓여있을 것이다.

오브제
이 제의에는 다양한 오브제가 등장한다. 화장의 결과물같은 밀가루가 산 자 위에 뿌려지고, 산 자를 둘러싼 유리병들은 위태롭게 쓰러지고, 기록될 수 없는 기록을 담으려던 카세트테이프들은 무너지고, 폐기된 증언의 책들은 펼쳐졌다 지워진다. 마침내 빨래줄에는 소리없는 비명의 상복들이 펄럭인다. 통렬한 비극의 증언이지만, 한편으로는 눈이 번쩍 뜨이는 흥미진진한 소재의 활용이다. 씬에서 오브제들이 등장할 때마다 흥미로운 퀴즈가 던져진 느낌이었다. 탐정이 추리를 하듯 그 용도를 상상했다. 그리고 그 오브제들의 역할이 드러나기 시작할 때, 나의 뻔한 추리를 넘어선 창의적인 변신에 감탄했다.

이 책을 다룬 어느 팟캐스트에서 작가의 인터뷰를 들었을 때, 난 이 책을 읽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현장의 참혹함에 언어의 한계를 느꼈고, 내내 벌받는 느낌으로 썼다는 작가의 언어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 휴먼 푸가>를 통해 비로소 < 소년이 간다>를 그리고 그 너머의 광주를 에둘러 만났다. 극이라는 것이 가진 본질적인 유희성 덕분에. 오브제는 이 유희성을 극대화했고, 이 극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감정, ‘재미’를 선사했다. 죄책감이 들 정도로 달콤한. 가장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주제조차 즐거이(?!) 만날 수 있게 만드는 뛰다 스타일의 완성형. 완전히 외면했을 지도 모르는 어떤 것을 직면하고 수용할 수 있게 만드는 유희의 힘.

뛰다
뛰다의 연극을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어떤 경지에 올랐음을 느낀다. 뛰다는 항상 유희와 난장이었고, 소리와 몸의 서사였다. 나에게는 투머치 하다고 느껴졌던 구간을 지나 어느덧 정점에 이른 것 같다. 최소한의 것을 남겨 제련한 세련된 화술. 두말할 나위 없는 푸가였다. 푸가는 이 연극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뛰다의 제목으로도 어울릴 듯 하다. 이 뛰다 스타일이 또 어떤 이야기를 만나 어떤 결과물을 만들지 궁금하다. 가끔이라도 연극을 봐야겠다. 아니 뛰다를. 뛰다의 푸가를.

그 전에 우선 광주. 내년에 40주기가 되는 광주. 아직 광주 하나도 보내지 못했는데, 죄없는 자에게 내려꽂히는 폭력과 뜬눈으로 보내는 밤들은 계속해서 쌓여가기만 한다. 알츠하이머 환자는 골프장에서 호쾌한 굿샷을 날리고, 홍콩에서는 광주의 데자뷔가 진행되고 있다. 내년에 이 작품이 다시 무대에 오른다고 한다. 그때 우리는 무엇의 장례식을 치루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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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SoSerious It’s not so JO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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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웃기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꿈과 세상의 혐오를 부르는 정신 질환을 동시에 가진 광대 전문 알바 호아킨 피닉스는 매번 놀림 당하고 시달리고 맞아 터지고 총까지 떠넘김 당해 억울하게 직업까지 뺏긴 후, 지하철에서 자신을 놀리고 구타하는 월가의 재수없는 부유층 세 명을 살해한다. 살인의 동력으로 그는 삶의 새로운 전기를 맞고, 꿈에 그리던 주류의 무대에 다가가게 되는 기회도 잡는다. 하지만 맞닥뜨린 과거는 엄마의 환각이며 달콤한 현재는 자신의 환각임을 깨달은 후, 그동안 성심성의껏 돌봐왔던 엄마와 자신을 조롱한 동료를 죽이고, 평생 동경해 왔던 대상을 생중계 방송 도중 처단한다.

한편, 그의 이 모든 행각은 사회 현상으로 전이되어 평범(?) 사회 부적응 또라이는 예의없는 부정한 세상에 맞서는 광기어린 히어로로 등극하고, 환각 속의 수퍼파월은 현실이 된다. 앞으로 벌어질 긴 이야기의 시작…

영화는 이해받지 못한 정신질환이 광기로 전이되는 과정, 그 광기가 사회현상과 만나 영웅의 탄생으로 폭발하는 또 다른 축으로 나뉜다. 그 첫 번째 분기점이 자기 방어로 촉발된 살인인데, 고담 시티의 억울한 중생들은 이게 우발이든 뭐든 상관없다. 그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 사고는 임계치를 넘은 고담시티 중생들의 억하심정과 조응하며 전대미문 정신질환 안티 히어로의 탄생을 이룩하는데, 이건 마치 헐리웃 로맨스의 여주 남주가 어쩌다 눈맞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영혼의 교감을 이루는 수준의 절묘한 세렌디피티다.

폭도들과 또라이, 특혜를 받은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 세상을 바꾸려는 자와 정신없이 떠밀려 가는 자…더 이상 떠밀릴 곳도 없는 자. 웃기고 싶지만 웃는 병에 걸려 웃길 수 없는 자…너무 많이 본 듯한 이 설정에서 뭘 느껴야 할 지 모르겠다. 650억을 들였다는 이 영화가 도시의 쓰레기들의 반란을 그리는 아이러니? 슬픔과 광기의 경계를 허문 명배우의 연기에 대한 찬사?

쓰레기도 치우지 않으면 사회적 위협이 된다는 메시지를 강변하는 웰메이드 블록버스터라니. 장르의 오락도 예술의 메시지도 아닌 애매함에 어디에 방점을 두고 봐야 할 지 좀 헤맸다. 재미든 철학이든 분위기든은 별로 상관없다. 무엇으로든 날 이겨주길 바라며 보는 게 영화 아닌가.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아 플랫했던 이야기. 연기의 놀라움과 연기의 깊이만 남았던 결말. 취약한 개연성의 위험한 이야기가 천재적인 연기를 만나 찬사도 비난도 찝찝한 기형이 되어버렸다. 너무 많은 것을 해 버린 남자. 호아킨 피닉스.

근데 어쩌면 서울 탓인지도 모르겠다.멀쩡한 인간이 정신병자가 되어도 1도 이상하지 않는 이 난장판의 요지경 현실이 스크린 속 고담시티를 이겨버린 것일지도. 경찰 버스 지붕에 올라가 운집한 몇 백만 명 앞에서 문재인 간첩을 외치던 서초의 그 분이 인생 연기를 했다는 호아킨 피닉스보다 더 조커스러웠는지도…

#WhySoSerious 이 영화에 묻고 싶은 말. 웃기고 싶다고 하지 말고 정말 웃겨 줄 수는 없었던 거니….슬랩스틱에 터져나오는 원초적 폭소를 등골 서늘한 불쾌감으로 바꾸는 전위적인 모먼트가 조커가 아니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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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 스레드 – 설계자의 하드보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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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서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사랑하는 여자는 그 어떤 순간에도 결코 지지 않고 최악의 방법까지 동원해 남자를 무너뜨리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이 완성된다. 남자는 살아있는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자신의 전면을 내어주고, 여자는 한 인간이 내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아낌없이 퍼부어 그를 구원한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참 희한한 사랑 이야기.

권력은 결과를 만드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이때 결과는 발생하는 사건 사고를 수동적으로 따라가 닿게 되는 낯선 종착지가 아니다. 사전에 명확히 상정된 목표이자, 반드시 거기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정하고 단계적으로 과정을 발생시킨, 강제된 기획의 결과물이다. 영화 속 보석 털이범들은 난공불락의 건물에 침투해서, 요리조리 함정들을 피해 철통방어의 전시실을 침입해 유리 보관함을 깨고 여왕의 눈물을 손에 넣는 것과 같다.

그녀가 이러한 험난한 과정을 거쳐 손에 넣고자 하는 것은 온전한 한 인간이다. 죽은 엄마와의 관계에서 생긴 근원적 트라우마를 옷깃마다 새기는 저주 받은 남자의 파편으로는 결코 그녀의 사랑을 완성할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에게 승복하고 부분이나마 수용하지만, 완전한 사랑을 원하는 그녀는 부분이 아닌 전체를 얻기 위해 설계를 한다. 사람은 고쳐쓰는 거 아니라는데, 그녀는 완전히 파괴하고 재조립함으로써 자신의 사랑의 대상을 고쳐 낸다. 사회적 지위로 보면 상대도 안 될 웨이트리스 출신이면서도.

의도와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해묵은 질문이 떠오를 때, 과정의 올바름을 따져물을 때 영화는 불쾌감을 자아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의 방법을 기꺼이 순응하는 남자의 희열에 도취된 표정으로 이런 딴지를 무력하게 한다. 나아가 궁리하게 한다. 나의 독버섯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민간인처럼 나 역시 주어지는 대로 상황을 따라가는 귀납형의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원하는 결과를 만들며 사는 사람들이 내놓는 방법적 크리에이티브에 경외가 있다. 참 희한한 방법들을 내놓는다. 독버섯과 같은…

때로 어거지같고 유치해 보이고 부당하고 불공정해 보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working한다.
관련된 사람들을 억울하고 분하게 만들면서까지도 무릎을 꿇리고 만다.

하지만 그 크리에이티브는 원하는 결과를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에서 발생한 것이다. 선명한 욕망이 그것을 이룰 밖에 없는 어떤, 기발하다 못해 해괴한 극단의 방법까지도 궁리해내게 만드는 것이겠지. 그러므로 그 방법의 창의성은 머리보다는 원하는 정도의 강렬함이 좌우하는 것이다. 그 결과를 원하지 않는 상대방까지도 무릎꿇게 만드는 에네르기. 견고하게 구축된 고집스러운 최고급 패션 하우스를 무너뜨릴 만큼.

시인은 가질 수 없는 꿈을 슬프게 노래하고,
종교인들은 꿈을 이루게 해달라며 기도하고,
슬픈 연인은 사랑하는 상대에게 갈구하고 눈물을 흘리며 매달린다.

하지만 생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꿈을 발생시킬 세계를 설계한다. 윤리를 뛰어 넘는 이 명징한 하드보일드에 매료되었다. N사의 매력포인트이기도 하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만.

무엇을 원하는가. 얼마나 강렬히 원하는가. 그리하여 꼭 가지고 마는가?
나에게 없는 것은 독버섯이 아니라 쓰러뜨리고 싶은 그대이다. 가슴 속이 텅 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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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디 아일 (In the Aisles) – 통로에서의 삶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63712

내일이 와도 그 다음 날이 와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것을 실감할 때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질문과 생활인으로서의 대안은 영화를 본 뒤의 내 몫인 거다. 그건 세상에 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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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벌판 한 가운데 세워진 대형 마트는 독일 통일과 함께 인간을 삶을 수직 수평으로 교차된 규격 안에 가둔 자본 권력의 공간이다. 침침한 형광등 조명 아래에서도 바하와 요한 슈트라우스가 흘러 퍼지고 감정과 연대가 뿌리내린다. 하지만, 온갖 상품들이 빽빽이 들어찬 비좁은 통로와 그 안을 채운 희박한 산소, 어디로도 흐르지 못하는 오늘, 어디에도 닿지 않을 내일 속에서 삶은 곧 끊어질 필라멘트의 전구 마냥 위태롭게 깜박거린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로.

가끔은 지게차의 선반이라도 들어올려 뚫어보려 하지만, 해산물 코너 ‘바다’속의 물고기처럼 튀쳐 올라 봤자, 15분의 휴식을 취해 봤자, 철망 앞에서 벌판을 바라보며 담배 한 대를 태워 봤자 결국 돌아오게 되는 곳은 이 숨막히는 격자의 공간.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은 오직 생명을 잃고 생물에서 상품으로 바뀔 때 뿐. 브루노는 자신이 적시한 바로 이 방법으로 통로를 떠난다. 옷소매깃에 사이로 온 몸에 그려진 과거를 감춘 크리스티앙은 브루노의 지게차를 바톤터치 받고 통로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이렇게 감옥에서 나와 평범한 삶을 살아보려 했던 그는 또 다른 감옥 안에 갇힌다. In the aisles.

한 남자는 떠나고 또 한 남자는 시작하는 짧은 그 사이의 이야기. 누군가에 의해 새로 시작되어도 바뀌지 않을 삶에 관한 이야기. 오래된 직딩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 영화다. 닭장의 또 하루를 반복하기 위해 자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 깊은 잠을 자는 사람들 말이다. 이것이 독일 영화다 싶은 적막강산의 아우라를 견디기 힘들었지만 마지막에 눈물이 나왔다. 트럭을 몰고 벌판을 달리던 때가 그립다고 했다. 꿈을 가지고 사람들의 삶을 바꿀 무언가를 이루어 보기 위해 달렸던 시간들. 독일 통일이 되어서 무엇이 좋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승계된 고용 안정 속에서 영혼없이 in the aisles을 뺑뺑이 돌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라이센스씩이나 따야 올라탈 수 있는 그 대단하신 지게차를 몰고 다닌다 해도 말이다.

지게차의 선반이 내려지는 소리에서 듣는 가짜 바다 사운드를 설마 희망이라고, 닭장의 삶에 내린 한 줄기 빛이라고, 추운 어깨를 보듬는 따스함이라고 우길 순 없다. 이 따위 왜곡 너머에 영화를 가득 채운 진짜 고독이 내린다. 좁디 좁은 통로 틈새에서 지게차가 선반을 내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닿을 수 없는 바다를 꿈꾸는 불능의 고독. 그건 마트를 둘러싸고 펼쳐진 어스름한 벌판의 풍경처럼 황량하면서도 아름다웠고, 내가 잘 아는 어느 순간같았다.

ps. OST 짱. OST 타이밍 더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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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취 movies – 네 편의 뫼르소 프리퀄

2015 2Q를 함께 한 영화들.
강을 건너지 못한 채 부조리의 현실 앞에서 질문하고, 좌절하고, 방황하는 네 편의 이방인 프리퀄

Serious man

1월 1일 르윈의 저주에 그토록 몸부림쳤음에도 2/4분기 첫 번째로 본 영화가 < 시리어스맨>이었던 걸 보니 나도 참 애지간한 코헨쓰의 노예다. 시리어스맨의 다크포스 앞에서는 르윈마저 달달했으니…하지만, 그럴 줄 알면서도 열어봐야 했던 코헨쓰의 판도라 상자.

영화 보는 내내 까뮈를 떠올렸다. “인생의 모든 걸 심플하게 받아들여라.” 유명 자기 계발서의 한 페이지에서 오려낸 것만 같은 아포리즘은 실은 부조리한 인생을 거짓없이 성실하게 관찰한 결과로 갖추게 되는 잔인한 객관성이다. 신에게서 답을 갈구하는 래리에게서 이방인이 되기 이전의 뫼르소가 보였다. 뫼르소도 한 때는 어떤 일의 의미를 찾고 싶어했을 지도 모르지.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스크린을 가운데 두고 접힌 데칼코마니처럼 다시 래리에게 겹쳐진 나를 보았고, 나는 코헨의 영화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분명히 뭔가를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매달리듯 코헨을 튼 나와 랍비를 찾아가는 래리가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랍비의 장광설처럼 코헨도 나를 낯설디 낯선 1960년 후반,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결국엔 토네이도 앞에 내던진다. 그리고 바로 여기로 랍비의 조언을 찾아다니던 래리와 코헨의 이야기를 따라가던 내가 거울 앞에 선 듯 서로 만난다.

몰아치는 검은 토네이도 앞에서 참수대의 칼날처럼 내려꽂히는 블랙 스크린. 비로소 프롤로그의 경구가 명징해진다. 슈레딩거의 고양이는 죽었으니, 뫼르소가 되라는 얘기였구나. 하지만 가장 큰 비극은 인식 이후에도 뫼르소따윈 될 수 없는 채, 눈 앞에 몰려오는 토네이도를 바라보는 삶이로구나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Detachment

어떤 사람은 이 영화를 보지 않고 제목만으로도 뭔가 뜨끔하지 않았을까. 은밀히 품고 있던 키워드 하나가 까발려진 것 같은? 영화를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뭘 말하고 싶은지, 주인공이 어떤 마음인지, 왜 저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별 설명 없이도, 몇 장면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놀랐다. 그닥 드라마적이지 않은 제목이며, 그딴 식으로 살고 있는 주인공하며…

하지만 부조리 머신이 되어버린 뫼르소와는 다르게(부조리에 대응하는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태도인) 주인공 헨리는 여전히 갈등하고 절망하는 인간계의 고뇌를 담고 있다. 희망은 버렸으되, 절망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한 발아 상태의 뫼르소. 그에게 드리워진 죄의식의 아우라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인간적인 감정의 굴레의 그림자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레지스탕스처럼 행복이 만발한 이 세상이 드리운 그늘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생존하고 있다. 그들은 외출할 때는 동시대인의 외투를 입지만, 안전한 곳에 혼자 있을 때는 이런 영화를 보며 현란한 화면 뒤에 전송된 코드를 해석해 낼 것이다.

Shame

삶의 공허함을 전면에 드러내고 허무의 돌직구를 영화는 솔직히 유치해 보인다. 그 탈출구가 섹스라는 것도, 그 클라이맥스가 하필이면 화장실에서 손목을 그어댄 여주의 피범벅이라는 것까지도 차고 넘치는 클리쉐다. 이 순간 < 모텔 선인장>을 비롯 무수한 영화들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든 끝까지 밀어부치는 것에는 힘이 있나보다. 알면서도 당하는 뭐 그런. 한 두 컷 맛만 보여주며 밀땅하고 약올리고 상상하게 만드게 아니라 아주 대놓고 덜렁거리며 왔다리 갔다리….블러 처리된 영상이었음에도, 당혹스러웠다. 색스러움이라곤 냄새도 안나서 더욱 그랬다. 이 화면 앞에서는 난 대체 뭘 느껴야 하는 걸까.

직면. 그런 걸 들이밀면서 니 삶의 속껍질을 한 번 까봐라 그러는데, 오케이 갈 데까지 한 번 가 보세요 이런 심정이 된다. 당연히 절망도 깊어지고 단절은 명확해지고 그에 따라 각종 수위도 높아진다. 그럴 줄 몰랐던 전개는 하나도 없는데다, 또 하필이면 빗속에서의 눈물 피날레는 좀 심했다 싶기도 하다.

하기야 저런 실감 앞에서조차 인간의 선택지란 것은 참으로 별 게 없긴 하지… 나도 어쩌면 저렇게 통속적으로 빗속에서 울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감정 불능자를 다룬 영화가 오히려 심하게 감정적으로만 몰아부치는 듯한 역설. 관계 불능자를 다룬 영화 속에서 가장 강조된 것이 바로 관계였다. 쩝. 요러한 구리구리함 대비 햇빛이 너무 뜨겁다는 이유는 지금 봐도 너무 모던하군.

감독보다는 마이클 파스빈더를 watchlist에 올린다. 심지어 까뮈 분위기 도 좀 나지 않음? 파스빈더가 연기하는 잡스가 기대된다. 파스빈더라면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천재 또라이 잡스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그려내줄 것 같다. 커쳐는 솔직히 좀 …그랬잖음?

Mad Max – Fury Road

쓰기 시작할 땐 뫼르소에 끼워맞춰 볼려고 했는데, 지금 쓰다보니 맥스에서 뫼르소까지는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든다; 둘 다 희망이 섞이지 않은 뜨거운 햇빛 아래서 살인을 한다는 공통점이 있구랴. 하지만 맥스는 살아남기 위해서, 뫼르소는 정오의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그 차이는 어떻게 극복이 안되네. 맥스는 너무나 에너제틱해. 하트 뿅뿅 하디..

그런데, 희망이 없는데서 왜 살아남으려는걸까? 영화의 클로징 자막은 까뮈의 마지막 작품 < 최초의 인간>에서 따온거래는데, 기억이 깜깜해.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도. 그렇담 맥스는 정력맨 버전의 뫼르손가?

“Where must we go? He who wander this wasteland, in search of our better selves.”

액션엔 취미 없지만, 올해 최고의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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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르윈 : 깊은 빡침의 칸타타

제길슨. 올해 새해 첫 날 보고 써 놨다가 코헨의 위대함에 대해서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듯하여 draft로 묶혀 뒀는데…
2015년의 1분기를 다 보낸 이 시점에 이 글을 다시 꺼내 보니 정리고 뭐고 어이없으면서 그냥 눈물이 앞을 가리네.

새해 첫 날 본 영화의 중요성이여….
그리고 르윈과 같은 여정이니 노를 저으라느니 말라느니 영화 감상이랍시고 쿨한듯 나불나불대는 것과 실제로 그러한 현실을 맞닦뜨리는 것의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여.
ㅠㅠㅠㅠㅠㅠㅠㅠ

올해 1분기는 새해 첫 날 본 영화 제목 그대로 인사이드 초아였다.
아무리 코헨쓰가 위대한들, 난 인제 그만 아웃사이드초아 할랜다!!
그런 의미로 정리안됀 채 괴발새발 그냥 올림. 이걸로 끝나라고! Draft에 놓여있으면 르윈의 저주가 영영 계속될 것만 같아서…그리고 내년 1월 1일에는 완전 해피해피 러브러브 샘솟는 영화 볼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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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
기타 하나와 고양이 한 마리, 뉴욕의 겨울…안타깝게도 이 카피는 영화의 포인트를 전혀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
하기야 누가 이 영화의 포인트를 한 줄의 카피로 요약해낼 것인가.

2015.1.1 < 인사이드 르윈>을 선택했다. 밤마다 지인의 카우치를 전전하며 루저로 살아가는 뉴욕의 포크송 가수 르윈은 쉴틈없이 쏟아지는 엿들을 온몸으로 맞으며 뮤지션으로서 전기를 찾아보고자 시카고로 떠난다. 무박 삼일의 험난한 여정의 결과는 출발했던 바로 그 자리로 되돌아와 삶에서 유일하게 붙들어왔던 음악을 내팽개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엿들의 폭격은 계속되어 그런 결단조차 제대로 실행할 수 없다. 와우! 이것이 2015 새해 첫 날을 여는 영화…

영화를 보고 나서 바흐의 선율을 떠올렸다. 지루하리만치 반복을 거듭하며 층층히 쌓아올려지는 정연한 음계들, 드라마틱한 기승전결 없는 단순하고 소박한 음들의 모여 그 총합으로 마침내 닿게되는 신성의 경지. 불필요한 장식은 없다. 과도한 감정도…하지만 결국 우리는 어떤 깊은 곳에 닿게 된다.

< 인사이드 르윈>도 그렇다. 나무를 쪼아대는 딱따구리의 부리짓처럼 반복되는 모멸스런 빡침의 상황들. 뭐 그리 대단히 웅장한 스케일이나 끝에 뒷통수를 후쳐치는 반전같은 건 없다. 그렇다면 영화가 무척이나 짜치고 지루해야 할 것 같은데, 결과는 정반대다.

무심하게 등장했다 쓴웃음을 짓게 만들고 빠르게 퇴장하는 에피소드들. 하지만 그 에피소드들은 순간으로 휘발되지 않고,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튀어나와 의미심장한 후기를 찍는다. 한 개의 깜짝쇼 빅반전 대신 매 순간 극히 마이크로한 층위에서 인물들의 대사와 선택이 보는 이의 벳팅을 비껴나간다. 그리고 그렇게 끝까지 비껴나가다 끝나버리는 카타르시스 없는 희한한 영화 체험을 하게 된다. 하나의 큰 놀람 대신, 순간순간 미세한 쇼크들이 쌓여가다. 그 쇼크들이 깔때기처럼 수렴되는 곳은 빡침 짤방같은 표정 뒤에서 실상 그다지 드러나는 것은 르윈의 내면이다. 그리고 이 순간들은 어느 순간 ‘하루 푹 자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피로’가 한 인간의 인생을 쓰나미처럼 덮쳐온다. 날 것의 인생이다. 영화화될 수 없는 순간을 스크린으로 찍어 올린 ‘예술’의 경지이시다. 멋드러진 포크송은 그 위에 얹은 화룡점정의 데코레이션. 끝내주는 대체불가 코헨브라더쓰이다.

‘왜 코헨의 영화에서는 모든 씬들에 뭔가 있어 보일까? 별 거 아닌 것 조차도. 그 무엇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런 의문이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 그 답을 보았다. 그 사소한 순간들이 실제로 중요한 뭔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실제 인생에서도 중요한 것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 이러한 매 순간들이라고 코헨브라더쓰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르윈이 고양이를 버리고 나온 순간, 르윈이 자신의 아이가 있는 도시의 표지판을 지나친 순간. 어린 시절의 노래를 바칠 때 아버지가 똥을 싼 순간. 인간을 파괴하고 인생의 방향을 틀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순간들이다.

< 파고>가 떠올랐다. 잔인한 연쇄 살인 사건을 둘러싼 범죄를 다루지만, 결국 이 영화는 남편이 우표를 붙이는 마지의 집으로 돌아온다. 거기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파고를 그렇게까지 좋아했을지 모르겠다. 입신 경지의 코헨 브라더쓰가 아직도 여전히 이 사소한 삶의 순간을 붙들고 있어서 너무너무x100 좋았다. 이 그 사소한 순간들을 경지에 다다른 최고의 솜씨로 살려내 주어 좋았다. 그래서 이건 1960년대 뉴욕의 실패한 포크송 아티스트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내 얘기였다. 잘해 보려고 해도 시시때때로 브레이크가 걸리고, 살기 위해 소중한 것을 버리고, 그걸 버려도 계속 살아지며 빡침과 동행하는 내 인생의 이야기다.

고양이를 버리고, 도망가는 씬. 영화 초반에 골파인 교수의 비서가 적시하듯 cat is 르윈이며, 고양이를 버림으로써 자신을 배신한 것이다. 뒷자석에 남겨둔 롤랜드 터너는 부축없이는 움직이도 못하는 지경이다. 이들을 버리고 혼자만 탈출해 또 다시 히치하이킹을 감행하는 르윈의 검은 실루엣과 그런 그를 무심히 지나쳐가는 차들의 모습. 아무 대사도 설명도 없었지만, 화면은 무겁디 무거운 비극감이 짓누른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차를 얻어탄 르윈이 멀쩡히 시카고에 도착한다. 하지만 도착하자 마자 재수없게 쌓인 눈에 발이 빠지 양말까지 모두 젖어버린다. 이렇듯 무거운 비극과 어이없는 코메디를 아무 것도 아닌 양 밀가루 반죽처럼 하나로 뒤섞어 버리는 솜씨. 매 순간이 이것이 무엇인지 도당체 정의할 수 없게 만드는 스핑크스의 퀴즈와도 같은 독특한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비극과 코메디, 성과 속이 나란히 어우러지며 뛰어노는 이 영화가 나에게는 알알이 박힌 보석들처럼 눈부시게 느껴진다. 모든 순간들이 웃기지만, 그 웃긴 순간들이 매 순간 심오한 상징으로 다가온다. 사소하고 잡스런 씬들에 응축된 고밀도의 상징성들은 날 것의 이야기에 잡힐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수수께끼같은 원형의 아우라를 덧씌운다. 코헨님들은 영화 하나 속에서 수 없이 많은 반전들을 썼다. 이렇게 코헨느님들은 모든 순간을 새로이 창조하셨다.

연속되는 빡침 속에서 가끔씩 욱한 르윈은 미약한 반격을 하기도 하지만, 그 반격은 번번히 아무 영향력도 없이 사그라든다. 골파인 교수의 집에서는 쫓겨나오고, 롤랜드 터너는 흑마술 괴담을 쏟아내며 지팡이질을 계속한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바주인이 진과 잤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르윈은 참지 못하고 무대의 여인를 모욕한다. 자기가 받은 모욕을 돌려주기라도 하겠다는듯이. 하지만, 얼핏 성공적으로 보이는 이 짜친 화풀이조차 건물 뒤에서 대차게 얻어맞는 것으로 자신에게 돌아온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을 때린 여인의 남편에게 르윈이 던진 말은 의미심장하다. Au revoir. 안녕이라고 번역이 이 불어 인사말은 잘 가란 말이 아니라, 다시 보자는 뜻이다. 남자는 르윈을 때리고 나서 넌 이 시궁창에 남아라. 우린 떠날테니라고 독설을 퍼붓한다. 하지만, 르윈은 빡침은 계속될거고, 누구나 이 빡침의 시궁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율리시스의 여정과도 같은 고단한 여정을 통해 마침내 깨달았고, 그 깨달음을 저 한 마디의 인사말에 담아냈다. 그리고 이 말은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다.

나의 2015도 르윈의 여정과 다르지 않을거다. 무언가를 갈구하며 길고 짧은 여정들을 하겠고, 별별 일들에 빡이 치겠지. 민폐도 끼치고, 신념을 배신하는 짓도 하며, 영혼이 파괴되는 듯한 기분도 느끼겠지. 하지만 그 조차 지나갈거야. 가끔은 If I had wings같은 멋진 선율이 내려, 내 마음을 쉬게 하리니. 자, 출발하자. 노를 저어라 초아시스여….

↑↑↑↑↑↑↑↑↑↑ 바로 이 마지막 부분…ㅠㅠㅠ 난 이때 몰랐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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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했다 1994 – The End of the End

결국은 나레기 커플이었다. 이로써, 여주는 남주와 연결된다는 드라마 절대불변의 원칙은 또 한 번 입증됐다. 전세비 첫사랑 디스카운트에 치킨셔틀까지 담당한 칠봉이는 응사가 낳은 최대의 호구로 떠오랐다. 칠봉파들의 분노는 서버가 터트릴 기세로 달아올랐고… 그걸 또 꾿이 각종 검색어로 찾아보며 낄낄거렸다. 이런 시대에 잠깐이나마 그런 주제로 분노하고, 그 분노를 약올리며 빙그레 웃음지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쓰레기냐, 칠봉이냐. 끝까지 궁금했었다. 그렇게 무려 20회, 10주, 두달 반 동안이나 사람 맘을 들었다 놨다 하더니, 연장전 시작하자마자 미친 듯이 골문으로 질주해서 30m 중거리 슛으로 골든골을 터트리듯, 작가님들은 21회가 시작되자마자 화끈하게 결론을 펼쳐제껴버리셨다. 그리고, 남은 시간동안 승자보다는 패자를 충분히 보듬고, 위로하고, 배려하고 짝까지 지어주었다. 좋으신 작가님들이시다.

결론은, 너무도 당연한 사랑의 힘이었다. 서로를 사랑했고, 아직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남았다. 21회가 끝난 이 순간, 나에게 이 드라마의 정점은 최종회가 아닌 20회 마지막 칠봉이의 독백이다. 외면당한 것도, 차인 것도 아닌 떠나기를 스스로 결심한 사람의 마음은 이루어진 연인의 사랑 고백보다 더 묵직하게 가슴을 울린다.

‘끝날 때까진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하지만 끝이 없는 게임이라면 스스로 끝을 결정해야 한다. 1만 시간의 가슴앓이에도 안 되는 일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 가슴을 내려놓아야한다. 끝을 시작해야 한다’

It ain’t over till it’s over. 요기 베라가 했다는 이 말은 응사 중간에도 한 번 나오지만, 페북이나 트위터의 각종 인용에서도 많이 보인다. 그래도 될만한, 참 멋진말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한 개의 명언으로는 부족한 순간이 많다. 그런 순간의 빈 괄호를 위 대사가 채워주고 있다.

하지만, 놓은 이유가 끝이 없어서겠냐. 끝이 없는 게임이 세상 천지에 어댔대. 계산기는 다 두드려졌고, 어짜피 끝은 난 게임인것을. 나정이는 쓰오빠없으면 웃지도 몬해야.

그래도, 그 계산이 다 끝났어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기에 ‘끝이 없는 게임’이다. 다 알고도 멈추지 않는 내 마음의 질주에 브레이크를 잡겠다는 결심. 시속 200km로 달리는 쌩쌩한 페라리를 폐차해야된다고. 그 멀쩡하고 멋진 것을. 어디로도 가지 않고 그저 뱅글뱅글 돌고 있는 미친 질주의 서킷에 들어와 있는 너를 풀어주기 위해서. 그리고 나도.

그런 순간에 서 본적이 있다면, 이 ‘끝의 시작’은 큰 위로가 되었으리라. 끝은 점이 아니다. 끝은 생각보다 길어서, 시작도 있고 중간도 있다. 하지만, 또 끝도 있다. 끝의 끝까지가는 길은 길고 아프고 힘들지만, 세상의 여느 다른 것처럼 결국은 끝도 끝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그 끝의 끝에는 또 다른 시작의 시작이 있다.

무기력하게 끝을 당하지 않고, 스스로 끝을 시작하여 천신만고끝에 끝의 끝에 도착해 새로운 시작의 시작에 서게 된 칠봉이를 보며, 그것이 나의 2013년의 끝에도 아주 잘 어울리는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시작한 끝이 이제서야 끝을 맺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제대로 대접받으며. 드라마 덕이다.

그래서 내 마음도 그들의 1994에 한껏 응답했다.

“끝에 끝을 내고, 새로운 길을 달려나가자.”

아직도 마음에는 끝을 내기 싫어 달렸던 길이 보인다. 끝이 있는데, 달리고 있을 때는 끝이 없는 것 같았던 길이다. 응사 1994를 보며 그 길을 다시 달렸다. 오로지 내 것인 것만 같았던 음악들이 까발려지듯 반복되며 시껍하게 만들었고, 잊으려했던 순간들이 접신 무당이 죽은 남편의 말투를 따라하듯 생생하게 묘사됐다. 드라마를 볼 때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가 웃고 울고 사랑했다. 어쩐지 응사를 보며, 과거와 한판 찐한 푸닥거리를 한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비로소 끝이 난 것 같다.

다행히 드라마는 모두 첫사랑과 이루어진다. 드라마는 여주남주의 법칙은 지켜냈지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첫사랑 불변의 법칙은 와장창 깨뜨려버렸다. 매우 비현실적인 드라마에서 나는 어떻게 그렇게 생생한 과거를 봤을까.

그 이유는 영화 < 건축학 개론> 포스터에 적혀져 있다.

art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썅년이었고 호구였다. 썅년이어서 미안했다. 호구였어도 괜찮다. 너와 나만은, 나정이 욕하지 말고, 칠봉이 짠해하지 말자. 다시 오지 않을 그 시간이 청춘이었다면, 그 속에 내가 있고 너가 있었다면, 그것으로 okay.

끝의 끝을 지나고 나면, 그래서 공식적으로 그 시간이 ‘추억의 상자’에 담긴 후라면 그게 뭐였든, 그건 이제 남은 생을 반짝거리게 해줄 보석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아닐테니. 이 이상한 세상에서 그런 거 한 줌은 어디 마음 한 구석에 숨기고 있어야 버티지 않겠니.

그러니, 이젠 상자에 담는다.
뚜껑도 덮어둘께. 가끔 열어보며 미소지을 수 있도록.

같이 웃고, 울고, 사랑했던
너와 나의 시간들.

끝의 끝.
The End of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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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재스민> – 알렌식 짝짓기의 새로운 경지

Blue Jasmine

블루 재스민 (2013, Blue Jasmine)

블랑쳇(Blanchett)이 블랑쉬(Blanche)를 연기한다. 95년판 영화에서 스탠리 코왈스키 역할을 맡았던 알렉 볼드윈은, 사기꾼이자 바람둥이인 재스민의 전남편으로 분한다. 뉴 올리언즈가 아닌 뉴욕에, 열차가 아닌 비행기로 도착하지만 블루 재스민은 시작부터 끝까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고스란히 현대로 옮긴다.

참 오랫만의 알렌옹 뉴욕 귀환작이라, 뉴욕의 정취를 배경으로 뒤얽히고 꼬여가는 인간관계의 도시남녀 스토리를 기대했는데, 정작 알렌옹은 뉴욕이라는 공간만 차용해 셰익스피어도 그리스도 아닌 1940년대 미국의 대표 비극으로 휙 되돌아가셨다.

왜 하필이면 Streetcar 였을까. 신경쇠약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가까스로 버텨내다 결국엔 나락으로 추락해 버리고 마는 비극의 결말은 우디 알렌스럽지 않다고 느껴졌다. 나에겐, 갈기갈기 분열되는 정신을 황당한 외연으로나마 가까스로 추스려 모으고, 그런 자신을 제 3자처럼 바라보며 쓰디쓴 웃음을 지으면서도 삶을 지속하는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들이 우디 알렌이었기 때문이다.

그 옛날 ‘범죄와 비행’이나 최근의 ‘매치포인트’ 에서도 좋았던 것은 결국 살아남는 그들의 블랙한 결말이었거든. 하기야, 사회의 제도적 응징은 빠져나갈 수 있어도, 소리없이 스며들어 정신을 찢어발기는 악마에게는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경찰에게서는 피해갈 수 있지만, 신경 분열의 연옥(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은 피할 수 없다. 이 외에 재스민에게 어떤 통로를 열어줄 수 있었을까.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 알렌 옹의 본격 비극이라는 점에서, < 카산드라 드림>이 겹쳐지지 않을 수 없다. < 카산드라 드림>은 제목에서부터 명백하게 희랍 비극을 차용했고, 그냥 살인도 아닌 친족 살해까지, 알렌 옹 영화 역사 사상 최대 잔혹치를 찍었다. 영화는 한 발 한 발 예언된 듯한 나락을 향해 가는 추락과 분열의 과정이다. 재스민 역시 직접 칼을 들어 누군가를 살해하지 않지만 복수심에 가득찬 그녀의 결정은 남편을 자살로 몰아간다. 재스민의 파멸 역시 그 지점부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넘어서는 것으로 보인다.

< 카산드라 드림>은 원치 않는 죄를 짓기까지의 자기 분열의 과정이라면, < 블루 재스민>은 우발적 충동이 야기한 죄 이후에 벌어지는 파멸의 과정을 현재형으로 둔다. 둘 다 ‘죄와 벌’이고, 결과는 영혼의 파멸이지만 < 카산드라 드림>은 죄를 짓기 전에 받는 벌을, < 블루 재스민>은 죄를 지은 후에 받아야 하는 벌을 그린다. 어느 쪽이 더 가혹한가. 우디 알렌이 그린 두 과정을 비교해 보면, 어느 쪽을 선택할 수 없이 그냥 막하막하다. 그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 ‘욕망’을 쫓은 댓가라기엔 너무 가혹하지만, 그래서 비극인 것이다.

내년 오스카 여주상의 강력 후보라는 케이트 블랑쳇. 과연 엄청난 연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우디 알렌 영화를 통틀어 이만큼 독보적으로 영화 전체에서 강력한 존재감으로 못처럼 나 홀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캐릭터는 본 적이 없어 좀 낯설었다. 알렌 옹 영화에서 연기의 백미는 늘 앙상블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것은 한편, 스탠리의 부재를 실감하게 한다. 스탠리의 역할의 ‘칠리’는 여동생 진저의 남친으로 머물뿐, 재스민으로 대항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Streetcar의 핵심이 블랑쉬-스탠리 사이의 강력한 성적 긴장감이며, 클라이막스 역시 최고조에 이른 긴장감의 해소(?) = 블랑쉬의 결정적 파멸의 순간 이라고 본다면, 이 관계가 빠진 재해석은 아무리 새로운 반전을 숨겨놓았다 해도 허전할 뿐이다. 재스민의 에너지를 맞받아칠 카운터파트너가 없는 것이다.

재미있었던 것은, 결국 자신의 남편을 파국으로 몰아넣는 결정적 이유가 정치적 올바름, 경제적 이유, 자신에게 가한 사기 범죄 등등의 거창한 것이 아닌 바람핀 남편에 대한 ‘질투’였다는 것이다. 남편과 가족, 그리고 자기 자신을 파멸로 치닫게 하는 비극의 시작이라기엔 너무 사소한. 여자란, 인간이란 결국 그런 사소한 감정에 거대한 운명을 휘둘리는 존재라는 것.

어쨌든 알렌옹은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그리스 비극, 셰익스피어, 미국 근대 비극을 모두 자신의 오리지널한 감각으로 훑어가고 있다. 그것도 영화라는 대중 엔터테인먼트의 미덕 안에서. 정말로 흥미로운 여정이다.

노화는 필연적 쇠퇴로 이어진다. 그런데, 그 한계를 알렌옹은, 새로운 공간, 새로운 배우와 젊은 피 그리고 고전 등과 자신의 오리지낼리티를 교배하는 방식으로 극복해 나가고 있다. 자신이 쌓은 기존의 것에 새로운 것을 겹쳐 새로운 색깔들을 막 뽑아내신다. 쇠퇴를 막는 수준이 아니라, 매번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시며. 80세를 향해가는 노감독이 말이다. 자기 복제의 함정을 짝짓기로 넘어서는 이러한 창작 방식이 나에겐 너무나 흥미롭다. 삶에 있어서도 적극 벤치마킹해야할 방식이 아닌가.

긴 수명과 끊이지 않는 짝짓기 + 생산 때문에 알렌 옹은 넘사벽의 대가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알렌옹. 이 여정은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부디 장수하시고, 계속 만들어 주시기만을…결론 : 알렌옹은 진정한 짝짓기의 대가이시다^^;;

ps. 하지만, 누군가 말한 이 영화가 알렌옹 최대 걸작이라는 평가에는 반대한다. 무수한 original works를 만들어낸 알렌 옹의 베스트로 어찌 고전 작품의 재해석을 꼽는단 말인가ㅠ

pps. 그 동안 본 알렌옹 영화 Rome with Love, Cassandra’s Dream, Whatever Works, Anything Else, Melinda and Melinda, Hollywood Ending, Sweet and Lowdown ㅠㅠ 다 넘넘 재밌당. 이 중에 몇 편은 두 세번씩. 언제 리뷰 다 쓰지 ㅠㅠㅠ 써 놔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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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 영화 말고 잡스

스크린샷 2013-09-07 오후 9.34.35

MS스러운 잡스 영화. 세상을 바꿀 위대한 아이템에 압도되어, 그 무엇도 버리지 못한 채, 불친절한 UX로 덕지덕지 자잘한 기능만 잔뜩 붙여놓은 제품같다. 많은 것을 생략하고, 뛰어넘고, 요약해 버렸고,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얼버무렸다. 관점이 없기 때문이겠지만, 해석하기에는 너무 큰 존재였을 것이다. 그 틈새를 잇는 음악과 영상의 오색찬란한 감정 유발은 한 마디로, not cool.

유일무이의 성찬을 제대로 씹어 삼키지 못한, 소화 불량의 잡스이거만 그래도 잡스였다. 나에겐 영화에서 뿌려지는 파편들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원래 알고 있던 잡스에와 애플 제품이 줬던 경험이 어우러져 마음은 쉴새없이 꿀렁거렸다.

맞어. 내가 좋은 영화를 원했던가? 설마. 딱히 영화를 보고 싶었나? 노. 세기의 인물에 관한 경이로운 해석을 기대했나? 아니오.

난 잡스가 보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그럴 수가 없어서, 누군가 대신 그려준 잡스의 이야기를 보러 간 것 뿐. 영화를 본 후, 잡스에 대해 생각하고, 몇 가지 정보와 디테일을 얻고, 다시 한 번 그를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이들과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127분의 런닝타임은 그 역할로 충분했다. 이 이야기가 불과 < 잡스 비긴즈> 내지는 < 잡스와 마법사의 돌> 뿐이었을 지라도.

무엇보다도 난 이 영화로 볼 수 없었다. 영화 속의 이야기와 내가 하고 있는 (비교할 수 없이 사소한) 일들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더 높은 차원의 품질에 대한 압박과 열정에 대한 요구, 디테일과 UX에 집착, 비타협, 독단적인 옹고집과 신념의 경계….등. 난 영화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난 스스로 감독이 되어, 나의 일상과 스크린 위의 화면을 쉴새 없이 교차 편집해 틀고 있었다. 미천함과 위대함이 뒤죽박죽된 그 ‘어떤’ 영화에 나는 초집중했고, 마지막에 핑그르 눈동자에 어린 물기를 극장의 불이 들어오긴 전 남몰래 훔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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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랑, 마지막 사랑

# 첫 사랑 < 건축학 개론>

친구들의 머리 위로 동동 말풍선이 떠다녔다.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자기의 과거를 보고 있었다. 스크린은 각자의 과거를 비추기 위해 세워둔 거울이었다.

나에게 이 영화의 런닝 타임은 6시간을 넘어간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들과 서로의 생활을 공유한다. 어려운 사정도 있지만, 그럭저럭 잘 살아내고 있다. 하지만, 뭔가 구체적 언어나 사건사고로 풀어 내기 어려운 아쉬움의 알갱이들이 강바닥의 모래알처럼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 때 누군가의 급작스러운 제안. “우리 < 건축학 개론> 보자~” 이미 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각자의 남편과 아이들에게 양해을 구하고, 무리한 심야 영화 관람을 강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화가 끝나고서, 너무 늦었다며 싱슝생슝 택시를 잡으러 가다 결국은 에라 모르겠다, 포장마차로 발걸음을 돌려 굳이 소주잔을 기울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아한 영화 감상평으로 시작했으나,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 옛날 각자의 캠퍼스 러브 스토리에 대한 침튀기는 열혈 수다로 끝을 맺은 술자리. < 건축학 개론>이라는 영화는 여기까지를 포함했다. 이 부분이 더해지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는 영화였다.

친구가 묻는다. “너는 누구야?” 으음. 대답은 2002년과 2012년 사이의 어딘가를 서성였다.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지? 그때 그때가 다 첫사랑 아니야? 기준에 따라 다르지? 무엇을 ‘처음’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등등. 하지만, 답하지 못했다. 나한텐 말이야, 첫사랑이 아니라, 첫사랑을 알아보지 못한 이야기가 < 건축학 개론>이야.

사랑이 어려웠고, 지독히 방황했고, 누구와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 그때 우리는 함께 했었고, 서로의 미숙함와 우스꽝스러움에 대한 목격자였다. 많이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밤, 영화에 아니 추억에 심취한 친구들은 잊었던 추억의 잔해들을 기워 기억의 집을 짓는다. 이 집은 매일 자고 생활하고 아이들이 웃으며 뛰노는 마이 스위트 홈은 아니지만, 가끔씩 들러 쉴 수 있는 마음의 별채같은 것. 여기 내리쬐는 햇살과 선선한 바람은 그 옛날 우리가 함께 했던 시절로부터 긴 시간을 거쳐 온다.

다음 날 한 친구의 문자.
“간밤에 집에 와서 자는 데 과거연애상대들이 총출동해 나와서…아주 피곤했다.”

ㅋㅋㅋ 건축학 개론…

# 마지막 사랑 < 은교>

자극적인 소재가 자극적인 깊이를 갖추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 영화의 에너지는 소재에 휘발되어 심연의 단단한 바닥을 뚫어내지 못한다.

알면서도 굳이 극장에서 와이드 스크린으로 보기를 고집했던 이유는, 글쎄. 늙어감에 대한 나 자신의 새삼스러운 자각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나이에 무엇이 가능한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영화의 대답을 들어보고 싶었다. 아니, 하나의 가설이라도, 힌트라도 구하고 싶었다. 내가 점점 다가가고 있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 낯선 세계에 대해 가지는 원초적인 질문이다.

무리였다. 이음새의 연결고리가 빠진 에피소드들은 헐겁고 노쇠한 기차처럼 덜컹덜컹 힘겹게 이야기를 이어가고, 박해일의 노인 연기는 몰입을 막아섰다. 80대 노작가의 정서적 회춘에 므흣한 미소를 보내기에도, 그 파국에 비극감을 느끼기에도 어색하다.

가장 화가 난 것은 은교를 묘사하는 방식이었다. 몸이 다 드러나는 교복, 대충 걸치고 창문 닦기, 반바지 입고 침대에서 뒹굴링. 순진한 듯 아무 의도도 없다는 듯 그래서 자극하는 행동들. 너무 빤해서 화가 났고, 그러기엔 은교가 너무 총명해서 화났다. 대작과와 교감할 수 있는 예민한 은교와 포르노 주인공처럼 무심한듯 질펀한 은교 사이에서 갈팡질팡…

소문난 야한 씬들. 야하지 않았다. 야한 건 행위가 아니라 욕망의 컨텍스트…도중에 길을 놓친 관객에겐 생뚱맞게 펼쳐지는 살색씬일 뿐. 그 타임에 왜 갑자기 지하실로 내려가야 되는 거니, 은교야. ㅠ

김고은이라는 배우의 미래가 궁금하긴 하다. 역대로 로리타 역을 맡은 배우는 망하고 만다는 징크스가 있다. 애드리안 라인 감독님의 로리타는 팔다리 길고 징글맞은 아이여서 배우로서 별 기대가 되지 않았고, 제레미 아이언스가 아까울 지경이었지만, 큐브릭 감독님의 로리타였던 뾰족턱 금발머리 수 라이언은 매력덩어리였다. 수려한 꽃중년 제레미 아이언스와는 달리, 제임스 메이슨은 진짜 동네 아저씨스러워서 그 애욕이 더욱 기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쨌든 로리타 배역을 맡은 두 배우는 모두 배우로서 실패했고, 로리타는 아니지만 또 하나의 로리타스러운 상황인 < 연인(L'amant)>의 여주였던 제인 마치도 비슷한 길을 갔다. 김고은이 그 징크스를 깰까.

아쉬운 마음에, 나보코브의 < 로리타>를 펼쳐 들었는데, 험버트의 이 말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왜 갑자기 슬퍼졌을까…잘 알게 되면 미워할 수 없다. 나보코브는 너무 집요하게 묘사해서, 너무 잘 알게 만들었고, 그래서 절대로 험버트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어떤 상상초월 금기의 선을 넘더라도, 마음의 한 갈피가 닿게 되는 것이다. 그런 예리한 구체성을 < 은교>에게서는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그러한 구체성 속에서만 인간은 또 이야기는 선와 악, 정상과 비정상의 클리쉐를 뛰어넘는 것 아닐까. 80대 노인이 10대 소녀에 품는 기묘한 욕정까지도.

희한하고도 즐거운 동거생활을 나와 함께 해오는 동안, 가장 비참한 형태의 가정생활이라 할지라도 소위 근친상간 – 결국, 집 없는 아이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이었지만 – 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하는 사실을 나의 로리타가 점점 명확하게 깨닫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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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렇게 두 편의 영화. 한 영화는 과거로 돌아가게 하고, 한 영화는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힘 빠진 청춘과 회춘한 노인네. 둘 다 참 딱할 정도로 서투르다는 공통점이 있다. 첫 사랑이든 마지막 사랑이든, 그렇게 서투르다가 엇갈려 가는 게 인생인가보다. 너도 그랬고, 나도 그랬지. 간만의 블로그에 결론이 왜 이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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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night in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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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night in Paris

작명과 포스터의 센스가 끝장이다. 파리만 해도 좋은 거기에 미드나잇. 파리만 해도 좋은데 거기에 고흐. 꿀처럼 녹진하게 흘러내리는 음악과 영롱한 색채의 향연. 12시 종이 치면 되면 달려오는 고색창연한 클래식 카. 그 마차를 타고 가면 펼쳐지는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의 파리. 거기에 아카데미 무슨 상까지.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우디 알렌이! 그런데, 큰 감흥이 없다. 달달하고 따뜻한 우디 알렌. 빠진 건 앞뒤로 끈질기게 물고 물리는 관계의 아이러니, 콜레스테롤 치솟는 주인공들의 곤두선 신경과 기어코 피식 피식 웃음이 나게 만드는 어두운 통찰의 반전 같은 것. 그래도, 어쨌든 파리는 아름답다. 밤의 파리는 더욱 더.

우디 알렌 옹은 도시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데 점점 도가 트고 계시다. 비키 크리스티나에서의 바르셀로나와 오베이도, 환상의 그대와 스쿠프에서의 런던. 그리고 마침내 파리. 첫 장면의 파리 콜라주는 영화의 맛을 한껏 돋워주는 일품 오르되브르다. 파리에 대해 기대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으되, 여지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파리. 관광지 그림엽서나 파워 블로거의 DSLR 사진 같은 것으로는 재현되지 않았던 도시의 ‘심상’. 지붕들 너머로 살짝 고개내민 에펠탑, 비오는 파리의 횡단보도 같은 것 말이다.

그 도시에 오래 살아서, 구석 구석 깊게 알고. 그래서 그 공간의 진짜 맛을 아는 사람이 보여주는 한 도시의 숨겨진 정수. 비행기포비아였다는 영감님이 런던이나 바르셀로나에 얼마나 오래 머무르셨기에 이런 걸 포착해 내셨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비결은 뉴욕이 아닐까. 한 도시에 대해 오랫동안 축적되어 완성된 이해의 기제가 다른 새로운 도시에도 아주 빠르게 이식되어. 어느 도시든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숨어있는지 아주 쉽게 파악이 되는 거 아닐까. 바스끼아가 어느 도시에서 가든 곧바로 약을 구할 방법을 알아냈다는 것처럼.

넘치는 달달함에 ‘에브리원세즈 알라뷰’를, 환상으로의 탈출에 ‘앨리스’를 떠올렸지만 그다지 진행되는 연결 고리는 없다. 어쩌면 할리우드가, 아카데미가 좋아했을 법한 우디 알렌이다. 이 영화로 우디 알렌 사상 최고 흥행 수익을 내셨다지.

핫 케이크처럼 팔리는 그림 엽서 속 파리가 파리의 진가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 엽서 사진의 매력에 끌려 파리에 오게 되고, 어쩌면 그러다가 오래 파리에 머물러 진짜 파리를 음미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난 파리는 한 번도 못 가 봤어. 하지만, 그 도시의 속살을 사랑하는 오랜 거주자처럼 또 하루, 나의 오랜 우디 알렌을 거닐었고, 오늘은 별 말 걸지 않아도 그저 보기만 해도 좋은 석양같은 빛깔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끽했다.

엣지하지 않아도 좋아요. 애니홀 부부일기스럽지 않아도 돼. 그냥 영화를 계속 만들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브라보 + 굽신굽신. 그러고 보면, 한 장면 한 장면을 좀 더 소중히 음미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너무 소중한 나의 스물 일곱번째 우디 알렌.

ps. 이 모든 무덤덤함이 그저 내 연애 세포의 말살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이 영화를 주진우랑 극장에서 보고, 3월 종로의 밤거리를 걷는다면 어땠을까. 당근 하늘에서 고흐의 별들이 마구마구 쏟아져 내리다 못해 길바닥에 흘러 넘쳤겠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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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가 사는 피부> : 탐닉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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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는 피부 (La Piel que Habito)> by Pedro Almodovar (2011)

“지금 네가 느끼는 감정이 결국 너를 집어삼킬 거야” –

너무 많은 감정을 지닌 남자가 있다. 그는 인공피부 이식의 대가인 세계적 과학자다. 하지만, 그는 과학자가 되기엔 너무 많은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에게는 배다른 동생과 눈이 맞아 도망가다 자동차 폭발로 끔찍한 전신 화상을 입고 식물인간이 된 아내가 있다. 그는 그런 아내를 위해 밤낮으로 잠도 안 자고 뱀파이어처럼 연구에 몰두해 가까스로 그녀를 회생시킨다. 자신의 딸을 강간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강간범도 있다. 복수의 차원에서 그를 납치해 성전환을 시키고 전부인과 똑같은 외모로 만들어 6년간이나 감금해 둔다. 하지만, 결국 그는 딸의 강간범이자 자신의 전 아내와 똑같은 외모를 한 그녀(혹은 그)와 사랑에 빠져 버린다.

하지만, 기껏 살려놓은 아내는 스스로 몸을 던져 자살하고, 새로 만든 여자는 마음의 문을 연 순간 자신에게 총구를 겨눈다. 그리고, 그녀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쏜 총 한 발을 맞고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도 그의 친모와 함께. 이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영화는 받아들이기 힘든 강렬한 감정들이 빚어내는 상상초월 반전투성이다. ‘비명과 경기가 없는 공포영화가 될 것. 과거 나의 어떤 영화보다 가장 심한 영화가 될 것’ 개봉 전 감독의 선언은 무색하지 않다. 남자는 여자가 되고, 복수는 사랑을 변신하고, 지배의 피지배의 관계는 역전 당한다. 여자를 강간한 남자는 그 스스로 여자가 되어 강간을 당하며, 자기가 강간한 여자가 당한 것과 똑같이 남자가 마구잡이로 들이대는 너무 큰 성기에 고통을 느끼며 소리를 질러댄다. 과학자는 자신이 창조한 존재에게 역으로 유혹당하고, 엄마는 아들에게 재갈 물린 채 그가 형수 뻘의 여자를 강간하다 형에게 살해 당하는 것을 CCTV로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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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나이 들수록 섹시해져만 가는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과학자라는 설정부터가 심히 괴상하다. 흰 가운을 입고, 일군의 실험 기구들에 둘러싸여 스포이드를 들고 정체불명의 물질을 주입한다든가, 국제 학회에서 진지한 발표를 하는 반데라스라니. 이 세상 사람들에게 랭킹을 매겨 차례로 과학실에 입장시킨다면, 아마도 맨 마지막으로 등장할 것 같은 남자가 반데라스 아닌가. 게다가 최고급으로 정평이 난 알모도바르의 미장센에 비해, 과학씬은 좀 우스꽝스럽다. 인공 피부 시술 같은 엄청난 작업에서 얼기설기 찢어진 거즈를 대고, 면봉으로 붙여나가는 어설픔이라니. 인공 피부 생성 방법에 관한 학술 발표는 비전문가인 내가 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과학’은 자연 탐구의 학문적 영역은 아닌 것 같으니까. 여기서 과학은 복수의 대상을 학대하고, 대상에 대한 지배의 수위를 심화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과학자 반데라스는 직업과 외양만 조금 바뀌었을 뿐 20여 년 전 ‘욕망의 낮과 밤(Atame!)’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즉, 여자를 가두고 묶고 지배하고 아낌없이 사랑하는 역할이다.

달라진 것은 지배의 수준이 육체를 겉에서 결박하고 구속하는 차원을 넘어서, 직접 육체에 메스를 대고 조직을 절단해 재창조하는 수준으로 심화되었다는 점. 알모도바르는 육체를 좀 더 집요하게 탐닉하기 위해 과학을 동원한 것뿐이다. 그리고 여전히 탐닉의 대상은 접근 불가능한 존재로서 한 치의 틈도 없이 탐닉자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과학자에게 과학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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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모도바르의 인간들은 모두 욕망에 미쳐있고, 상대방을 소유하지 못해 날선 신경쇠약직전에서 안달복달한다. < 욕망의 낮과 밤>에서 1차원적으로 다소 서툴게, 하지만 그 어떤 작품에서보다 직접적으로 구현한 열정의 지배/피지배 관계가 방법적으로 심화된 것을 본 것은 < 그녀에게> 였다. 움직이는 대상을 살포해 묶어 놓는 수준이 아니라, 애초에 식물 인간을 만들어 정해진 지배 관계에서 원천적으로 탈출 불가하게 만든다. 그래 놓고는, 대상에게 쏟아 붓는 그 지극한 애정이라니. 하지만, < 내가 사는 피부>에서는 꼼짝할 수 없는 대상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것도 모자라. 아예 대상의 육체를 새로 만들고 가공하고 조작한다.

그것이 사랑이냐 스토킹이냐,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라는 논의에서 알모도바르는 일찌감치 벗어나 있다. 상식이나 윤리 따위의 선을 훌쩍 뛰어 넘어 욕망의 극한을 탐구해 온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이런 극한의 감정 없이는 아예 성립할 수가 없다. 심지어 알모도바르는 사랑의 완성으로 육체의 대상화라는 지극히 비윤리적인 방식을 제시한다. 반데라스가 복수를 위해 여자의 육체를 찢고 가공하고 새로 이어 붙이는 과정은 동시에 극렬한 복수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원초적 욕구로 바뀌어가는 불가해한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육체는 양도 가능한 오브젝트로 물질화한다. 누더기처럼 조각조각 찢어진 피부. 이제, 알모도바르는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하고 있다.

이런 강렬한 감정은 문명의 최첨단을 상징하는 과학자가 드러내는 것이기에 더욱 아이러니하다. 그는 처음 강간범에게 “너는 그 밤을 잊었겠지만,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한다.”라고 복수를 선언한다. 하지만, 6년 후 그는 모든 맹세를 새까맣게 잊고 그녀(혹은 그)와 광기 어린 사랑을 나눈다. 그는 확실히 감정이 많다. 과학을 하기에는. 그의 엄마의 말처럼 ‘사랑에 미쳐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는 아무 보상없는 파국을 맞는다.

‘점점 성숙해져 가는 알모도바르’란 이런 이상하고 기괴한 이야기를 현란한 컬러 콤비네이션의 최고급 미장센과 음악, 그림들로 치장해 전달하는 기술의 발달을 뜻하는 것일까. 광기는 깊어지는데, 화면과 음악은 점점 더 고급스러워져 간다. 우아한 왕실 귀부인의 포장을 뒤집어쓴 정신이상자. 우아하게 미쳐있는 영혼. 알모도바르는 역한 날 것의 살코기를 최고급 명품 가방에 넣어서 던져준다. 하지만, 캘리백의 지퍼를 열면 와르르 쏟아지는 것은 방금 도살한 돼지의 찢어진 살점들이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아직도 허연 김이 펄펄 피어 오르는.

그 날것의 살코기가 좋아, 알모도바르를 보아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것을 포장하는 방법이 진화해 가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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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알모도바르 영화에서처럼 < 내가 사는 피부>를 지배하는 정서는 빠시온(Pasion)이다. 다만, 이제 그의 욕망은 그저 대상의 육체를 표피에서 만지고 탐닉하는 것에서 한 걸음 내디뎌, 직접 육체를 만들고 가공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고,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과학’을 꺼내 드는 무리수까지 두면서. 이 다음엔 대체 어떤 방법이 동원될 것 인가. 무엇이 남아있단 말인가. 물음표는 열려 있다. 여전히 알모도바르는 나에게 기다림과 미지의 대상이다. 누군가 인간이 닿지 못한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 가는 과학의 발달을 보며 감동하듯, 난 알모도바르를 보며 탐닉의 진화에 감동한다.

그것은 영원히 다가가지 못할 타인. 그 타인에 어떻게든 근접해 보려는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미치지 않고서는, 혹은 미쳐버린다 해도 이룰 수 없는 불가능에의 지극히 성실한 commitment이기 때문이다.

* 엄마
“집에 오기 위해 두 명을 죽여야 했어요. 저 빈센테에요.”
이 엉망진창 이야기 속에서도 오직 엄마 만이 파국에 치닫는 아들의 위험을 예언하고, 경고하고, 죽음의 순간까지 아들과 함께 한다. 성별이 바뀌고 두 명을 죽인 오디세이 같은 여정의 끝에서 여자(남자) 찾아가는 곳도 결국 엄마다. 이런 것이 알모도바르스러움. 간만에 만난 마리사 파레데스! 반가웠다. 스페인 아줌마 배우들은 어쩜 저렇게 한없이 엄마이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여자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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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체 부감씬
알모도바르의 시그니처 씬이라고 해야 할까. 특정 인물의 시점을 넘어, 전지적으로 뭐 하나 가리지 않고 육체의 적나라함을 보여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카메라. 유달리 알모도바르씨가 애정하는 숏들. 이번에 쫌 남발하셨네요. 부끄럽구요… =.=

* 멋진 씬들
많은데…반데라스와 마리사 파레데스의 죽음씬. 대칭 부감숏. 어느 명화첩에서 튀어나온 듯.
두 남자의 관음씬. 화면에 줌인된 여자를 바라보는 반데라스. 그리고, 동생의 혀플레이(?)
여자가 누워있는 수술대 부감숏…”숨을 거칠게 쉬지마.” 기타 거의 모든 장면들…
여주인공 엘레나 아나야. 육체가 후덜덜…여자 눈으로 봐도 비현실적.

* 아쉬움
그런데 왜 < 라이브 프레쉬>같은 격한 떨림이나 < 내 비밀의 꽃> < 신경쇠약직전의 여자>같은 몰입이 느껴지지 않을까. 아쉬운 것은 인간의 감정선에 대한 묘사이다. 멋진 화면에 들인 공에 비해, 감정이나 행동의 묘사가 많이 없다. 점점 사람 대신 화면 위주로 가는 것 같다. 대신 눈을 떼기 힘든 멋진 씬들이 펼쳐지지만, 아쉽게도 카메라는 인물의 감정에서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고급스럽게 추상화되고 있다 ㅠ 그래서, 반데라스나 기타 주연들의 내면을 주로 상상과 추측에 의해 따라가야 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끄집어내어 보여주는 건 유치한 건가. 쩝.

그의 카메라가 조금 더 인간의 감정에 향하기를 기대해 본다. 난 그럴 때 너무 좋은데. 역방향이라 어렵겠지… ㅠㅠ 씨. 사람은 진화하기 보다 근원으로 돌아가기가 더 힘든 듯.

* 알모도바르를 보는 이상적인 자세
환상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멋진 화면과 색채를 펼쳐 보이는 이 영화를 다운로드 받아 노트북으로 봤다. No way! 말도 안 돼. 하지만, 새까만 어둠 속에서 속옷만 입은 채 가슴에 올려놓고 화면을 껴안다시피 한 채로 좌우로 구르며 때로는 화면 속 그들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코 앞에 놓인 빛나는 액정 속에서 알모도바르를 따라가는 것. 육체와 화면을 최대한 밀착하고, 보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욕망을 한껏 발산하는 조금은 에로틱한 이 방식이 어쩌면 알모도바르를 보는 꽤 적합한 자세일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가위눌림
< 내가 사는 피부>를 보고 자다 가위에 눌렸다. 정신은 차렸는데, 거대한 것이 내 온몸을 짓눌러 꼼짝할 수도,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사랑,사랑’하고 외치며 가위에서 풀려났다. 동생에게 말했더니 “알모도바르답네.” 시크하게 한마디 툭.

* 알모도바르에 대한 이전 감상문들

예고편 (2011.5)

알모도바르의 첫 번째 영화 < 페피, 루시, 봄> : Raw is Origin (2007.1)

귀향 (Volver) : 죽음과 함께 사는 여자들 (2007.1)

나쁜 교육 : La Mala Educación (2004.9)

알모도바르 ‘그녀에게’ ..가슴 저린 사랑 이야기?? (2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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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

exit

누군가 이 영화를 ‘뱅크시 영화’로 찾기에, ‘아니예요. 뱅크시가 나오긴 하지만, 뱅크시 영화는 아니라구요. 뱅크시보다 더한 놈이 나오긴 하죠. 반전이 아주 오묘해요’라는 요지로 답변했다. 물론, 감독 크레딧에 뱅크시가 올라가지만…

한 마디로, as-is 내 올해의 영화다. 너무 재미있게 봤다. ‘Funny As Hell’ 뉴요커의 평가가 무색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전개도 결론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막판 반전 쎄게 한 방- 아,,,이거였구나.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가 있는 거였구나. 알쏭달쏭한 제목을 확 꽂아준다.

백남준 선생이 봤다면 아주 좋아했을 것 같은 영화다. 다큐멘터리가 증거나 자료를 이야기화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84년 백남준이 고국에 와서 선언한 “예술은 사기다”에 대한 빼도박도 못할 그리고 빼어난 증거를 제시하고 있으니까. 예술이 사기가 되는 실제 과정을 매우 희귀하고도 흥미로운 사례를 통해 정밀 포착하여. 백선생의 또 다른 선언. “나에게 예술이란 돈이 벌리는 것” 그런 것이다. 조금 특이한 무늬의 500달러짜리 아디다스 운동화를 4,000달러에 튀겨 파는 것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예술적 수완’이 바로 ‘예술’ 그 자체다. 심지어 회사에서도 흔히 쓰이는 Value-add 능력이다. 티몬의 ‘사업적 판단’이 업계에서 오래 사업하신 분들에게 남긴 상대적 박탈감의 실체이기도 하다.


선배 사무실에 걸려있던 데미안 허스트 Opium 가격을 듣고, 깜짝 놀랬었다. 그저 색깔 물방울 몇 개 찍어놓은 것일 뿐인데…저 가격을 이해할 수 없는 나는 저 그림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예술이란 이해의 깊이에 가격표를 매겨놓은 것일까. 저 그림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 준 사물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의 단면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나아가, 모든 ‘가격표’의 세계에 대해서도. 그리고, 소위 ‘진성’주의자들이 가격표를 높게 붙여 팔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에 대해 가지는 불편함과 부러움의 양가감정을 멋드러지게 표현해냄으로써, 역으로 ‘진짜 예술’이란 것에 대해서조차 대놓고 편들지 않는 오묘한 입장을 견지한다.

난, 명백한 가짜 예술의 폭로같은 촌스러운 주장보다는 이런 ‘경계선의 스탠스’가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띠에리. 오덕의 끝을 달리는 캐릭터들은 늘 흥미롭다. 그들은 자신의 집착과 열정으로 범인의 상식을 뛰어넘음으로써, 선과 악의 경계까지도 허물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띠에리의 변신을 끝까지 애정을 가지고 지켜볼 수 밖에 없다. 그는 ‘진짜’의 편이므로…거의 영화의 결말에 다다르기 전까지.

그는 희대의 오덕질로 ‘진성’ 뱃지를 획득했지만, 예술을 통해 ‘사이비’ 뱃지를 새로 달았다. 더할 수 없이 진성이자 동시에 막장 사이비인 띠에리라는 오묘한 캐릭터는 영화의 화룡점정이다.

끝으로 직업병일까? ‘촬영주의’라는 기상천외한 컨셉트의 산물인 방 가득 제멋대로 쌓여있는 비디오 테이프들을 볼 때, 왠지 마음이 무거워지며 ‘구글’…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여기서 구글은 정리 안됀 빅데이터를 눈뜨고 못 볼 뿐만 아니라, 금광묻힌 신천지를 발견한 듯 마음 한 구석에 환호성을 울리며 온갖 기술력을 동원해 미친 데이터를 더욱 광적으로 정리하고야 마는 이들을 대표한다. 이미지 매칭, 보이스 딕테이션, 얼굴 인식, 사물인식, OCR 총동원해 메타 데이터를 뽑고 유의미하게 정리해 내는 과정을 아주 잠깐 상상했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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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사랑/ 진실의 힘

그을린 사랑

Opening Sequence from Incendies from Dirk Roth on Vimeo.

시나리오를 처음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라디오헤드의 노래들을 염두에 뒀다. 오프닝 시퀀스에 사용할 우울하면서도 몽환적인 음악을 찾던 중 곧바로 ‘You and Whose Army?’가 떠올랐다. 다른 곡은 아예 생각도 안 했다. 비슷한 분위기의 고전음악을 사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라디오헤드의 이 곡에는 다른 어떤 음악에서도 찾기 힘든 낯설고 소외된 풍경의 느낌이 있다. 내게 멜랑콜리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내 인성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 멜랑콜리는 물론 즉각적으로 위안을 필요로 한다. < 그을린 사랑>의 주된 정서적 목표는 위안이다. 씨네 21 – 감독 드니 빌뇌브 서면 인터뷰 중

절대로 스포일러에 당하지 말야할 영화라는 경고를 듣고 서둘러 봤다. 증오가 먹구름처럼 몰려들고, 소나기처럼 총알이 쏟아지는 풍경 속을 한 여자가 뚫고 지나간다. 그녀는 ‘더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싸그리 긁다못해 바닥을 칸칸히 무너뜨려가는 가혹한 생의 채찍질은 그 생각이 상상력의 한계였다는 사실을 각성시킨다. 하지만, 그런 모진 시간조차 노래부르며 견뎌낸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 삶을 놓아버리게 한 건 가혹한 고문이나 15년간의 독방 수감이 아니라 우연처럼 혹은 숙명처럼 맞닥뜨린 ‘진실’이었다. 그 모든 것을 시작하게 만든 사랑에 관한 진실.

소문난 ‘충격과 전율’의 반전보다 더 놀라웠던 건, 오히려 ‘용서’였다. 죽음을 앞두고 쓴 세 통의 편지. 편지의 주제는 그저 ‘사랑’이다. 이로써, 분노의 끈을 끊었단다. 함께 하는 것 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어. 기나긴 고통의 여정 끝에 다다른 결론은 뫼비우스의 띄처럼 다시 사랑으로 되돌아간다. 동트긴 전 새벽, 아무도 몰래 계단을 뛰어내려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던 삶을 버리고 영원반복의 연옥같은 ‘생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게 한 맨 처음 눈부신 사랑의 약속으로. 영화는 점점 하강하며 바닥을 쳤다 다시 처음으로 상승해 돌아가는 원의 궤적으로, ‘사랑’이라는 결론이자 시작점에 닿는다.

나에겐 오히려 이게 반전같다. 가혹한 고통의 끝에서 사랑으로 점프하는 가장 극적이고 성스러운 반전. 누구도 증오하지 않고, 더 이상 분노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나로선 머리나 분석으로는 알겠지만, 마음이나 육체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태. 헥, 저기서 어떻게 저렇게. 영화에 대한 딴지가 아니라, 그저 그러한 상태가 무엇인지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서 그런다. 애가 없어서 그런 건지ㅠ

Rien n’est plus beau que d’être ensemble.
함께 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단다.

너무나 기괴한 결론이지 않은가. 그녀가 그토록 찾아헤맸던 아들과 함께 했던 *순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고통은 보이지 않는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으로 그려지고, 잔인한 순간은 최소한의 표현으로 추상화된다. 처참한 고통의 순간조차 우아하기 짝이 없어 감독의 취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영화는 스너프 필름식의 고통의 관음 대신, 한 여자가 사지를 부딪혀 밀고 가는 고통스러운 생의 도저한 흐름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필연적 부산물일 증오와 분노는 관객들의 상상의 몫으로 남겨진다. 그래서, 더 먹먹하다. 방문 뒤에서 소리만 들려오는 상상 속의 애로함이 더 빠르게 심장을 뛰게 하는 것과 똑같은 메카니즘으로.

고통받는 여자들. 몇 년 전 읽었던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떠올랐다. 그리고 예전에, 15년 전 쯤에 몹시 좋아했던 < 비포더레인>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레바논과 마케도니아. 풍광과 벌어지는 일들이 꼭 닮아있다. 끔찍한 현실이지만, 아이러니하게 스크린 가득한 시적인 표현들도 그렇다.

남는 질문이 있었다.

‘하지만, 왜 그녀는 자식들에게 그토록 가혹한 사실을 찾아나서게 했을까?’
‘왜, 그 사실을 사랑하는 그에게 알려야만 했을까.’

분노의 끈을 끊기 위함이라는 나왈의 부연 설명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그러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뜯어본 한 통의 우편물을 통해서 찾았다.

진실의 힘

오늘, < 진실의 힘> 재단에서 보내온 마이데이 맘풀이 자료집을 받았다. < 진실의 힘>은 군사독재정권시절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고문당하신 분들을 위한 법인이다. 재판을 통해 무죄를 밝히기도 하고, 국가의 손해배상을 묻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행정 절차만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분들이 함께 모여 자신의 고문 경험을 나누며, 마음을 치유하는 집단 상담을 가지신다. 오늘 받아본 자료집은 그 집단 상담을 녹취한 기록이다. 고작 180 페이지. 무게는 가볍지만 내용은 천근만근이다. 한 세월에 짓이겨진 영혼들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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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옷을 안 벗을려구 뻗댔더니 막 두들겨 패고 홀딱 벗기는 거여. 빨리 안 벗으면 두드려팽께. 사정없이 죽어라 팽께, 옷을 빨리빨리 벗는데 내복 소매가 안 빠져. 손이 부서(부어) 갖고, 어거지로 뺀께, 난 죽지. 안빠진께 그 놈이 칼 갖다가 모가지를 한쪽을 찢어갖고 내복을 벗었어요. 무르팍 꼬부려서 허벅지 밑에 파이프 넣고, 손 양짝 발 앞으로 묶고, 파이프를 번쩍 들어버리니….빨개벗겨져서 통닭구이식으로. 그렇게 맞아서 탱탱 부은 몸을 거꾸로…물 한 바가지씩 갖다가 쭉쭉 찌그리면 말이여. 방망이로 몇 대 맞고 말지. 하아~ 물에다 물 한 바가지씩 찌그리면 막 벼락 불이 번쩍 하는 것 같어.” – 임봉택

“(그러다) 찐득찐득한 수건을 얼굴에 뒤집어 씌우더라구. 거꾸로 있는데, 좀 있으니까, 물을 갖다 콧구녁에다가 붓는 것이여. 계속 붓고 있으니까 콧구녁에 물이 안 들어갈려고, 숨이 한도가 있지. 그래가지고 그 놈을 숨을 마실려니까, 수건이 딱 달라붙어. 공기가 안 들어올 뿐 아니라 같이 물이 들어오더라구. 금방 죽게 생기니까 “야 안 내놔. 너죽어.” 그러고 있는 순간에는 진짜 ‘내가 그 책을 얼마나 좀 받어봤으면, 이북 책을 내가 받어봤으면 얼매나 좋을까!’ 이런 생각 뿐이지.” – 임봉택

“소문이 개야도에 봉택이는 반공법으로 징역을 산다드라, 간첩이 돼갖고 징역을 산다드라, 소문이 떠돌았대. 그때부터 밥도 안 드시고 기죽어 계시고 그랬대. 술이나 드시고 밥도 안 드시고 하시다가 어느날 갑자기 목 매 자살을 하셨대. 우리 막내가 자다 일어나 보니까 그러고 계시더래…이렇게 앉았다가도 아버지 말만 나오면 아, 맘이 울컥하고 저녁에 자다가도 아버지하면 아무도 모르게 눈물이 콱콱 흘립니다. 하아, 오죽했으면 자결하셨겠습니까.” – 임봉택

“남들은 통닭구이라고 하는데 저는 꽁꽁 묶여 매달린 돼지새끼, 도살 직전의 돼지새끼를 더 연상해요…그 치욕스러운 거,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벗을 수 없는 치욕. 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하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치고” – 이준호

“목이 타서 물 좀 달라고 했는데 교도관이 “참아, 내일 먹어” 그래요. 보안법은 뭐 하나 꺾어져도 아무렇지 않단 얘기죠. 그때 고무신짝으로 그(변기의) 물을 먹으면서, 아, 참, 변기도 더럽잖아요. 그 물을 먹으면서. 아, 그 물을 먹으면서 내가….아! 그러니까 내가 세상을 살아가겠어요?” – 이준호

“괴로움이 때려서 아픈 것 이외에도 잠 안 재운다던지, 뭐 그냥 손톱 밑을 찌른다던지 그건 참 보통 고통이 아니예요…그 고통은 좋게 말해서 고통인데, 그 괴로움이라는 것은 겪어보지 않으면 이해를 못하실 겁니다.(침묵)” – 김성규

“무죄를 받았을 때, 무죄를 두 번 받았는데 어리벙벙, 변호사님이 무죄됐다고 해서 듣고 그랬는데 그 때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다가, 다시 어깨 무거운 건 마찬가지예요. 왜 그런지 그게 안 없어지네요. 괴로웠던 그게 안 없어진다 이 말이예요.” – 김성규

“허리가 구부러져가고 육 십이 지나고 젊음이 없어져가고 옛날 사람들이 말하듯 일장춘몽이라고, 지금 나한테 판결물 당신 무죄야, 그 판결문 몇 자 그리고 진실위원회 몇 장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어요. 이십 몇 년을 싸우고 이를 악물고 싸운 결과물이 종이 몇 장에 끝나는 거더라구. 그럼 내 인생은 어디로 갔는가? 내 젊음은 어디로 갔는가? 나도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권리가 나도 있을 껀데, 기쁘고 웃고 즐겁고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거 한 번 느껴보지도 못하고…” – 박춘환

“허~말을 못하고, 계속 술만 먹었지요. 아직까지 안 풀링당께, 안 풀린당께, 내가 그 놈을 죽여야 풀리는디 정말로…그 사진이라도 있으면 막 그냥 불이라도 지르고 응어리가 풀렸으면 좋겠어요.” – 박춘한

현실은 상상을 압도한다. 영화 속 나왈의 인생이 믿기지 않지만, 자료집에는 나왈 못지 않은 사연들이 180페이지에 가득했다. 내용의 의도적 가감이나 표현적 포장도 없다. 그저 본인들이 겪어온 일들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뿐이다. 통닭구이처럼 매달려 매질과 물질을 당하고, 목이 말라 변기 물을 떠먹고, 살기 위해 고향 친구를 허위로 고발한다. 고발하는 쪽이나 고발당하는 쪽이나 지옥이다. 그들이 우연히 같은 눈병에 걸려, 같은 감옥에 수용된다. 용서가 되겠나. 하지만, 용서한다. 그냥 영화다…

억울함만큼 사람을 돌게하는 감정이 또 있을까. 동료의 사소한 오해나 진심을 곡해하는 이웃의 한 마디에도 울컥하고 잠 못 들며 머리가 빙빙 도는 게 인간인데, 열심히 살던 와중에 아무 이유없이 끌려가 허위 자백을 요구받으며 잔인한 고문을 받고, 그것도 모라자 오랜 생활 수감에 나와보니 가족은 망가지고 이웃은 외면하고 간첩으로 낙인찍혀 관찰 속에서 평생을 살아간다라… 억울한 게…억울하다는 게, 그 억하심정이란 게…대체 어떤걸까. 얼마만큼인걸까.

4년 전부터 급속도로 괴로워졌지만, 그래도 이만큼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윗 세대에 빚진 마음이 있었다. 그 빚을 조금이나마 이 분들을 통해 돌려드릴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깃발들고 앞장선 투사들도 아니셨다. 하지만, 이 분들의 문제는 지금 이 사회의 공동 책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을 누리는 우리들이 오늘을 만든 과거에 대해 져야하는 책임.

진실의 힘 재단 홈페이지> 후원하기

자료집의 제목은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들어줘서 감사합니다.”이다. 말하고 듣는다는 것, 그렇게 어려운 일이고 또 중요한 일인가보다. 가족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한 채 혼자 품고 왔던 과거의 기억을 말하고 난 뒤, 큰 짐을 내려놓은 듯한 한결 홀가분해진 톤을 텍스트에서도 느낄 수 있다. “같은 고생을 한 사람끼리 풀어놓는 것이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진실의 힘이란, 진실을 마주하는 힘. 진실을 말하는 힘. 진실을 들어주는 힘이 아닐까. < 그을린 사랑>의 나왈도 결국 진실의 힘을 믿었던 것 아닐까. 진실은 위태롭게 버텼던 그녀의 등을 떠밀어 사지로 밀어넣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진실을 버틸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랬다 하더라도 아이들만은 진실의 힘으로 살아주기를 바랬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란 없으므로.

이틀 간격으로 두고 나에게 온 한 편의 영화와 한 편의 책이 전혀 다르게 같은 말을 던지는 것 같았다. 난, 일단 가만히 있어본다. 열심히 던져진 말들을 프로세싱하면서. 여전히 홀이 너무 많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수 있을까. 고통의 진행형 속에서 고통을 제공한 대상을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고통스러운 것일까. 용서의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일까. 어렵다. 머리로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일이다. 뭔가가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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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끝, 싸이코 (Pscycho)

토요일 밤 10:40분. 차들이 줄줄이 늘어선 여의도를 위태로이 칼질하는 사브 한 대. 그녀를 11시 정각까지 집으로 돌려보니, TV 앞에 앉히기 위한 질주였다. 물론, 서울 최후의 병목으로 꼽히는 신림 4거리의 교통 상황은 그녀의 정시 귀환을 허락치 않았다. 하지만, 하늘이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버리지 않으셨던 것일까. 집에 도착한 그녀가 황급히 리모콘을 켜고, EBS를 틀었을 때 < 싸이코>는 그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된 첫 번째 여관방 시퀀스를 전개시키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모범적인 여자와 이혼 수당의 부담 때문에 그 여자를 허락하지 않는 남자가 한낮의 정사 후 나누는 괴로운 대화를. 오후 2시 45분. 그녀는 그 시간대에만 연인과 침실에 들 수 있다.

당시 TV 한 편 제작비에 불과했다는 80만 달러(약 9억) 들여 만든 영화 < 싸이코>는 현재 IMDB에서 Top 25를 기록 중이다. 히감독님 영화 중에서는 21위를 기록하는 < 이창>에 이어 2위. 검증된 영화이고, 영화 역사 사상 가장 많은 분석된 영화 중 하나가 아닐까 예상해본다. 그런데, 난 분석이나 열광은 커녕 보다가 꾸벅꾸벅 졸다가 심지어 그 유명한 샤워씬이 끝나고 나자 쿨쿨 잠에 들어버렸다. 이 영화 꼭 봐야 한다는 징징댄 것도, 그 압박에 못 이긴 사브의 질주도 모두 무색하게시리 말이다. 물론, 몹씨도 몰아부친 24시간이기도 했지만…

다시 깨어난 것은 사립탐정 아보가스트가 살해되는 씬에서였다. 고조에 달한 버나드 허먼의 싸이코표 BGM이 잠든 나를 깨웠다. 이후 반쯤 정신이 나가서 영화를 끝까지 보긴 봤다. 이상한 영화다. 이토록 웃음기 없는 히감독님 영화라니. 여자 주인공은 나오자마다 1/3도 못되서 갑작스레 퇴장하고, 뒤는 질질 늘어지며 기나긴 설명을 늘어놓는다. 노먼 베이츠가 잡히고 난 후, 정신분석학자의 설명은 아예 영화가 말하는 영화 속 캐릭터 분석이다. 이런 마무리는 < 이창>의 느닷없는 엔딩씬과 대척점을 이룬다.

하도 졸면서 정신없이 봐서 감흥이 없다. 뭐 사는 게 이런 거지. 기대했던 게 별볼 일 없을 수도. 그게 대상 탓이 아니라 내 컨디션 탓일 수, 충분히 있는 거지. 그리고, 난 역시 장난치고 뺀질거리는 터무니없는 캐릭터들이 좋다. 나중에 망가지고 변질되고 비극에 빠진다 할지라도. 인형같은 마리온에도, 박제같은 노먼 베이츠에도 닿지 못해 그냥 그렇게 < 싸이코>가 흘러갔다. 어쩌면, 하이 앵글이 빈번히 등장하는 이 영화는 이입의 대상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게임의 대상일지도 모르겠다. 이럴까? 저렇겠지? 관객과 감독이 벌이는 한 판의 두뇌 게임. 결국 관객이 지는 것으로 각본이 짜여져 있는. “나는 관객들을 통제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마치 오르간을 연주하듯이 관객들을 연출했다고 말입니다.”(‘히치콕과의 대화’ 중) 요런 스탠스로 봐야 하는 영화에 내가 크게 관심이 없는 중이기도 하다.

어쨌든 7월도, 7월의 EBS 히감독님 특집도 이렇게 끝이 났다. 무더운 여름밤과 어울리는 히감독님 영화를 내내 공포스런 장마비와 함께 해야 했지만, 오랫만에 ‘영화보는 즐거움’…좋아하는 영화에 열광하는 순수한 관객으로서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특집을 다 보고, 남는 질문은 하나다. ‘지금 히감독님이 계셨다면, 어떤 영화를 만드셨을까?’ 어쩌면 우리는 지금과 전혀 다른 걸작 트랜스포머나 해리포터를 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히감독님은 상업 감독이었고, 흥행시켰고, 당대를 등지지 않으셨으니까. 천재성을 가지고, 상업적으로 생존했으며, 영화 밖에 몰랐다. 이 희귀한 미덕의 조합이 내 눈앞에서 펼쳐질 때, 난 그저 흐뭇할 뿐. 비록 내 방안 작은 TV 모니터를 통해서 일지라도.

< 싸이코>를 안 봤더라도 누구나 한 번 쯤을 봤을 샤워씬. 빠듯한 촬영 일정이었지만, 이 45초를 찍기 위해 1주일이 걸렸고, 카메라 위치를 70번 넘게 바꾸었다고 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놀라거나 공포를 느낄 수도, 혹은 그냥 정신없이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잊을 수는 없다.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 그것을 통해 당신과 내가 교감한다는 것. 8월, 깊어질 당신과 나의 여름을 위해 건배- 샤워 커튼 뒤에서 서서히 다가올 검은 그림자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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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이 히감독님 ㅎㅎㅎ ♥ ♡ ♥ ♡ ♥ ♡ ♥ ♡….라부라부 ,..싸/랑/해/요! 히감독님 우유빛깔 희감독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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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히감독님

어제 밤이 히(치콕) 감독님이 꿈에 나오셨다. 팩토리 27층에서 영화 워크샵 같은 걸 하고 있는데, 직접 오셔서 8mm로 시범을 보여주셨다. 캠을 들고, 창밖을 촬영하시는데 낮게 천천히 찍다가 갑자기 캠을 하늘로 들어올리시며 건물 아래쪽으로 렌즈 방향을 트셨다. 카메라에 연결된 화면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던 나는, 화면에서 느껴지는 갑작스런 높이감에 현기증을 느끼며 뒤로 물러서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야. 역시 히감독님은 화면으로 모든 걸 보여주시는구나. 꿈속에서도 히감독님의 촬영에 연신 감탄을 했다. 어제 본 <39계단>이 너무 재미있었던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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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 세계의 명화> 7월 히치콕 특집. 나에게는 하늘에서 보석들이 막 떨어지는 것 같은 시간이다. 토요일 밤마다 죽이 딱 맞는 누군가와의 데이트가 잡혀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스크린에서 보고 싶은 것들을 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데, 그게 내 취향의 문제인지 세상의 문제인지 영화의 문제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특히나 여름이면 더더욱 극장에서 볼 영화가 없어지면서 왠지 모를 소외감도 깊어지는데, 이런 때 히감독님의 영화는 큰 위안이 된다. You’re not alone~ I’m here with you~

선배 생일 챙겨주느라 < 이창>은 반절 밖에 못 봤다. 사실, 피핑 톰질하는 앞부분이 재밌는데. 그래도, 코넬 울리히의 원작 를 읽는 계기가 되었다. 코넬 울리히, 일명 윌리엄 아리리쉬는 내가 제일 좋아했던 추리작가 Best 3에 꼽는다. 두 대가의 만남이라니. 원작도 멋있었다^^ 순수한 ‘관찰’을 통해 자기 자신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진실에 한 발 한 발 다가서는 과정이 설득력있게 그려진다. 대가들은 군더더기가 없고, 명료하다는 생각이 확고해진다. 그냥 이해가 다 되고 뭉게뭉게한 부분이 없다. 사술을 부려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법이 없이 늘 정공이다. 그러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열광하게 만든다.

문장과 영상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원작에서 히감독님이 더한 캐릭터들의 맛을 확인하게 되어 기뻤다. 능글맞은 제임스 스튜어트와 공주님 그레이스 캘리. 하지만, 사건이 진전되면서 그레이스 캘리는 누구보다도 더 깊게 사건 속으로 빠져들고,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위험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재치넘치게~임기응변. 반전 금발미녀랄까. 이런 캐릭터들을 더해 원작의 의도를 명확히 표현하면서도, 자신의 세계를 명확하게 만들어내신 솜씨가 대단하다. 여력이 뻗쳤다면, 코넬 울리히의 문장과 히감독님의 영상 캡쳐를 교차 편집해서 올려보고 싶으나…여력이 안 뻗친다. 누가 해 주면 좋겠다만 ㅠ

< 현기증>에서는 킴 노박의 아름다움이 새삼스러웠다. 이상한 여자다. 두 가슴을 봉곳이 세우고, 개미 허리를 있는대로 조여맨 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걷는 금발 미녀. 우아하면서도 천박하고, 지적이면서도 육감적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피카소 그림 속 여자같은 신비감을 준다. 영화의 이중 캐릭터에도 딱이지만, 제목에도 딱 맞는 참으로 적절한 캐스팅이지 싶다. 여자인 내가 보기에도 현기증이 나는데, 남자들이 보면 어떨까? 그냥 스토리와 관계없이 현기증, 그 자체다.

< 현기증>은 어두운 영화다. 한 여자에게 천착하지 못하고, 지 좋다는 여자에게 농담따먹기 밖에 안되는 느물느물한 퇴직 형사 제임스 스튜어트. 트라우마에 발목잡혀 누구에게도 진심을 주지않았던 잔머리 뺀질남이 한 여자에게 있는대로 진지해져 미쳐가고 결국 정신 병원에 갇히기까지의 과정은 서스펜스 이상의 서늘함을 던진다. 하지만, 이 조차 끝이 아니다. 전반부에 가득한 농기는 점점 물이 빠지고, 영화는 점점 이상한 심연으로 관객들을 데려간다. < 현기증>은 히치콕의 어두움이 가장 여과없이 날을 세운 영화 같다. 하지만, 희망 한 가닥 남기지 않는 비극에서조차 히감독님은 오바하는 법이 없으시니…..그저 납죽. 개인적으로 제임스 스튜어트 짝사랑하는 여자 캐릭터. 이런 게 히감독님만의 묘미일거다.

그리고 어제의 <39계단>. 예~전에 봤는데, 스토리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서 다행이었다. 순간순간이 촌철살인이고, 모든 기대를 한치의 주저도 없이 뒤엎어 버리는 반전의 연속이다. 35년도 작품이니 36세 때 감독하신 거지만, 아직 히감독님의 진짜 전성시대가 오기 전인 ‘영국 시대’ 끝물의 작품이다. 흑백의 철지난 영상이지만, 그때 이미 히감독님이 히치콕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면이나 촬영이 좀 촌스럽다 뿐이지, 캐릭터는 왠만한 요즘 영화/드라마보다 훨씬 더 모던하다. 보다가 너무 많이 웃고, 놀래고… 왠만한 기대는 칼처럼 잘라버리는데, 아…진짜 재미가 뭔지 아는 감독님이시다. 그리고 이 현란한 캐릭터들의 향연. *살아있는* 인간들. 핵심작렬의 대사들. 한 순간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악마적 디테일들. 유머감각까지도. 사실 히감독님 영화는 분석보다도 명장면을 꼽으며 낄낄거려야 제 맛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거의 모든 장면이 명장면이라서, 정리를 할 수가 없다. 그래도 빼놓을 수 없는 것. 직업 의식! 직업 의식…ㅎㅎ 영화 전체를 풍미하다가 결국 반전의 포인트로 승화되는 캐릭터들의 직업 의식이 너무 웃기고 재미있다.

거장의 초기 작품처럼 재미있는 게 없다. 다소 어설프기도 하고 허술할 수도 있지만, 그를 그답게 만들어 주는 것, 그래서 내가 그에게 열광하는 모든 것들은 이미 초기 작품에 다 들어가 있다. 형태의 촌스러움이나 다소 거친 표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앞으로 펼쳐나갈 ‘세계’의 증명이다. 오히려, 그런 세계는 초기 작품이 더 생생하게 나타난다.

나는 이상한 영화를 만들다가 경험을 쌓고 성장해서 갑자기 멋진 영화를 만든 감독을 본 적이 별로 없다. (반대의 경우는 종종 있지만) 물론 내가 영화를 많이 보는 건 아닌지라, 그냥 철저한 나만의 편식성 통계치일 뿐이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의 영화는 처음부터 다 ‘그들’의 영화였다. 코헨은 < 블러드 심플>부터 딱 그냥 씨네필 영화쟁이였고, 우디 알렌은 < 돈을 갖고 튀어라>같은 데서부터 자학피학 인간 코메디였고, 알모도바르는 < 페피, 루시, 봄>에서부터 미친 열정이었다. 막 시작된 ‘한 세계’가 숙성되고, 세련되어지고, 깊어져 또 다른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본다는 것은 행운이다. 하지만, 거장이 된 후에 접해서 거꾸로 그의 초기 작품을 다시 거슬러 보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인 것 같다. 내가 열광하게 될 세계의 ‘어린 싹’을 발견하는 즐거움.

<39계단>에서도 내가 거장이 된 후 히감독님 영화에서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다 느낄 수 있었다. 어떨 땐, 그냥 나란 사람을 분석해서 나 재미있으라고 만든 영화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히감독님의 영화가 가장 아름다운가? 가장 화려한가? 가장 감동적인가? 그런 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히감독님은 가장 영화같은 영화를 만드셨던 감독님이었던 것 같다. 문학도 연극도 아닌, 영화라는 방식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씬들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영화든 문학이든 언론이든 뭐가 됐든 한 분야의 가장 깊은 정수를 다다른 이들이 멋있어 보인다^^

어쨌든 기대 많이 했던 특집이었는데, 어느덧 7월도 다 가고 ….이제 히감독님 특집도 한 주 남았다. < 싸이코> ㅋㅋ 문제적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