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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for March, 2012

그녀가 필요하다.

그녀가 필요하다. 그녀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아무 정보도 없이 서울 김서방 찾듯 카메라 하나 둘러 메고, 이리 저리 그녀가 있을 만한 곳을 다녀보았다. 그녀를 찾지 못했다. 대신, 곳곳에서 꽃을 만났다. 봄이 오지 못한 이 땅에, 봄이 오면 가장 먼저 필 보라빛 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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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집회에서 그녀를 만났다. FTA가 억지 표결되었던 날에도, 그녀는 현장에 있었다. 최루탄이 아니라 물대포가 아니라 진짜 대포를 쏴서라도 막아야 했던 끔찍한 표결이었지만, 의회 표결의 무거움 앞에 희망의 색은 바래져 있었다.

바보같이 분당서 여의도까지, 때론 광화문까지 매일매일 출근부를 찍으며 집회란 것이 그 미친 인간들을 멈추게 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을 수 없었지만, 믿기로 했다. 믿는 것 외엔 아무런 방법이 없어서. 하지만, 말이 되든 안되든 의회 표결의 무게를 모를 만큼 순진하지도 않은 나이였다.

믿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의회에서 표결을 했다는데, 그걸 엎다니. 이젠 끝났다. 그래도, 나는 잘 살아야지. 살아 남아야지. 하지만, 어김없이 발걸음은 광화문을 향했다. 그저 관성이었겠지.

하지만, 그 날. 마이크를 잡은 이정희 “여러분, 우리들이 이렇게 함께 하면 바꿀 수 있다는 거 아시죠?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저 사람들 밤잠 못 자게, 간담 서늘하게 해야 한다는 거 아시죠? 그래서 싸인 못 하게 할 수 있다는 거 믿으시죠?”

믿지 못했다. 하지만, 이정희가 나에게 묻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네~~~~” 네… 믿지 못하는데, 믿게 만드는 당신을 믿습니다.

집회에서 수시로 봤던 이정희 의원을 정작 관악구에서는 한 번도 못 만났다…관악구는 관악구를 발전시킬 그 어떤 분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4년 희망을 박탈당한 대한민국엔 이정희가 필요하다. 그 어느 때보다, 그 누구보다 이정희가 필요하다.

Midnight in Paris

midnight
Midnight in Paris

작명과 포스터의 센스가 끝장이다. 파리만 해도 좋은 거기에 미드나잇. 파리만 해도 좋은데 거기에 고흐. 꿀처럼 녹진하게 흘러내리는 음악과 영롱한 색채의 향연. 12시 종이 치면 되면 달려오는 고색창연한 클래식 카. 그 마차를 타고 가면 펼쳐지는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의 파리. 거기에 아카데미 무슨 상까지.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우디 알렌이! 그런데, 큰 감흥이 없다. 달달하고 따뜻한 우디 알렌. 빠진 건 앞뒤로 끈질기게 물고 물리는 관계의 아이러니, 콜레스테롤 치솟는 주인공들의 곤두선 신경과 기어코 피식 피식 웃음이 나게 만드는 어두운 통찰의 반전 같은 것. 그래도, 어쨌든 파리는 아름답다. 밤의 파리는 더욱 더.

우디 알렌 옹은 도시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데 점점 도가 트고 계시다. 비키 크리스티나에서의 바르셀로나와 오베이도, 환상의 그대와 스쿠프에서의 런던. 그리고 마침내 파리. 첫 장면의 파리 콜라주는 영화의 맛을 한껏 돋워주는 일품 오르되브르다. 파리에 대해 기대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으되, 여지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파리. 관광지 그림엽서나 파워 블로거의 DSLR 사진 같은 것으로는 재현되지 않았던 도시의 ‘심상’. 지붕들 너머로 살짝 고개내민 에펠탑, 비오는 파리의 횡단보도 같은 것 말이다.

그 도시에 오래 살아서, 구석 구석 깊게 알고. 그래서 그 공간의 진짜 맛을 아는 사람이 보여주는 한 도시의 숨겨진 정수. 비행기포비아였다는 영감님이 런던이나 바르셀로나에 얼마나 오래 머무르셨기에 이런 걸 포착해 내셨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비결은 뉴욕이 아닐까. 한 도시에 대해 오랫동안 축적되어 완성된 이해의 기제가 다른 새로운 도시에도 아주 빠르게 이식되어. 어느 도시든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숨어있는지 아주 쉽게 파악이 되는 거 아닐까. 바스끼아가 어느 도시에서 가든 곧바로 약을 구할 방법을 알아냈다는 것처럼.

넘치는 달달함에 ‘에브리원세즈 알라뷰’를, 환상으로의 탈출에 ‘앨리스’를 떠올렸지만 그다지 진행되는 연결 고리는 없다. 어쩌면 할리우드가, 아카데미가 좋아했을 법한 우디 알렌이다. 이 영화로 우디 알렌 사상 최고 흥행 수익을 내셨다지.

핫 케이크처럼 팔리는 그림 엽서 속 파리가 파리의 진가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 엽서 사진의 매력에 끌려 파리에 오게 되고, 어쩌면 그러다가 오래 파리에 머물러 진짜 파리를 음미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난 파리는 한 번도 못 가 봤어. 하지만, 그 도시의 속살을 사랑하는 오랜 거주자처럼 또 하루, 나의 오랜 우디 알렌을 거닐었고, 오늘은 별 말 걸지 않아도 그저 보기만 해도 좋은 석양같은 빛깔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끽했다.

엣지하지 않아도 좋아요. 애니홀 부부일기스럽지 않아도 돼. 그냥 영화를 계속 만들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브라보 + 굽신굽신. 그러고 보면, 한 장면 한 장면을 좀 더 소중히 음미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너무 소중한 나의 스물 일곱번째 우디 알렌.

ps. 이 모든 무덤덤함이 그저 내 연애 세포의 말살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이 영화를 주진우랑 극장에서 보고, 3월 종로의 밤거리를 걷는다면 어땠을까. 당근 하늘에서 고흐의 별들이 마구마구 쏟아져 내리다 못해 길바닥에 흘러 넘쳤겠지.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