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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푸가 – 광주를 위한 제사

극단 뛰다 < 휴먼 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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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가

휴먼 푸가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이 반복될까 궁금했다. 궁금증을 푸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입장부터 바로 배우들이 몸으로 그려내기 시작하는 기호들.

무대에서 전개되는 상황과 호응하지 않고 독립된 언어로 반복되는 이 몸짓의 기호는 미스테리 서클처럼 낯설게 다가온다. 이런 형식과 내용의 이격은 처음엔 혼란을 주지만, 반복의 횟수가 늘어날 수록 괴리는 점차 좁혀지고, 마침내 기호는 극 전체를 관통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절실하게 발신하는 형식적 매개로 작동한다. 기호가 가진 추상화의 기제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건과 영향, 몸과 영혼의 경계를 허물며.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변하지 않는 것을 이용하는 것처럼, 같은 기호 위에 얹혀지는 각자의 다른 이야기들은 같은 광주 위에서 그 광주가 비틀어 놓은 각자의 다른 삶의 구체성을 노래한다. 같음과 같지만 같지 않음을. 각자의 생의 파편이 층층히 쌓여가는 불연속면 위에서 기호들은 때로는 격하게 파동치기도 하고 때로는 얌전히 누그러지기도 한다. 마치 멜로디는 최소화하고 리듬으로만 진행되는 원시의 음악처럼. 이 몸의 노래는 아직도 이승을 떠나지 못한 광주을 이고 가며 부르는 두 시간의 만가로 들린다. 이 길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까.

배우

이 형식 안에서 배우는 표현의 적극적 주체라기 보다는 도구처럼 쓰인다. 대사는 감정을 뺀 기계적인 톤으로 발화되고, 상황의 재현이나 감정의 전달, 배우 면면의 개성은 억제되어 있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리듬이다. 대사의 높낮이와 속도, 몸으로 그리는 괘적의 베리에이션.

배우들은 일정한 형식적 아웃풋으로 엄격히 제한된 기계같다. 원작의 문장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실어나르는 대사는 육신을 잃은 망자의 한을 읊는 빙의된 영매의 소리처럼 들렸다. 대사를 말이라기 보다는 소리에 가까운 것으로 만드는 이 형식의 통제는 실제로 존재했던 그 시간의 비극성과 그 비극성을 오롯이 옮기고자 사투했던 작가의 문장을 다시 극으로 옮기는 단계에서 더 이상 가공은 하지 않겠다는 의지 혹은 그럴 수 없다는 포기로 읽힌다. 이렇게 배우들은 연기를 내려놓고 자신의 몸을 오롯이 극에 내어주었다. 제의에 바쳐진 육신으로써. 이것이 배우로서 광주에 바칠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닐까.

공간

이런 공기 속에서 나도 자연스럽게 스토리에의 몰입이나 감상적 설득보다 제의에 참여한 엄숙함으로 극을 대하게 되었다. 관객과 무대가 서로 마주보는 대신, 관객석을 좌우로 나누고 그 사이에 들어앉은 무대는 이런 동참의 아우라를 짙게 한다. 하지만, 배우들의 동선은 이 무대를 훌쩍 뛰어 넘어 극장 전체를 넘나들고, 서로 다른 위치에서 각자의 씬이 만들어진다. 배우들의 연기가 서로 합주할 때도 있지만, 동떨어진 어떤 배우의 씬은 떼어 놓고 봐도 흥미롭다. 두 셋을 묶어 볼 수도 있고, 전체의 그림을 내려다 볼 수도 있다. 관객은 시야를 줌인/줌아웃해 무대의 곳곳을 탐색하며 극의 큐레이터가 되어 지금 이 순간 어디에 집중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게다가 봐야할 것은 무대와 배우만이 아니다. 극이 진행되는 시야에 강제되는 것은 객석의 나머지 반을 채운 반대편 관객들. 그들의 반응과 시선이 진행 중인 극에 걸쳐져 나의 경험을 간섭한다. 나는 여기를 보고 있는데 저 사람은 딴 데를 보고 있네. 저 사람은 이미 울고 있군. 종종 컨닝과 동요로 이어지는 이 간섭 현상은 가상 상황으로 분리된 극에 집중하는 대신 내가 지금 여기에 참여 중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환기시킨다. 함께 있지만 각자 다른 것을 보는 경험. 너와 나는 같은 것을 보면서도 또 얼마나 다른가. 하지만 우리는 지금 함께 여기에 있다. 광주를 위한 시간에.

전체 무대의 맨 뒷편엔 병풍같은 벽이 놓여 있다. 산 자의 막다른 골목. 죽은 자는 넘지 못하는 경계. 죽은 자와 산 자의 공간을 나누는 무대의 시그니처. 그 앞에서 제의가 진행되고, 관객들은 옆에 둘러서서 함께 이를 지켜본다. 배우들은 그 병풍에 몸을 던져 그림을 새긴다. 산 자와 죽은 자,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자를 가른 폭력의 순간을. 그 병풍의 뒤에는 분명 광주의 관이 놓여있을 것이다.

오브제
이 제의에는 다양한 오브제가 등장한다. 화장의 결과물같은 밀가루가 산 자 위에 뿌려지고, 산 자를 둘러싼 유리병들은 위태롭게 쓰러지고, 기록될 수 없는 기록을 담으려던 카세트테이프들은 무너지고, 폐기된 증언의 책들은 펼쳐졌다 지워진다. 마침내 빨래줄에는 소리없는 비명의 상복들이 펄럭인다. 통렬한 비극의 증언이지만, 한편으로는 눈이 번쩍 뜨이는 흥미진진한 소재의 활용이다. 씬에서 오브제들이 등장할 때마다 흥미로운 퀴즈가 던져진 느낌이었다. 탐정이 추리를 하듯 그 용도를 상상했다. 그리고 그 오브제들의 역할이 드러나기 시작할 때, 나의 뻔한 추리를 넘어선 창의적인 변신에 감탄했다.

이 책을 다룬 어느 팟캐스트에서 작가의 인터뷰를 들었을 때, 난 이 책을 읽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현장의 참혹함에 언어의 한계를 느꼈고, 내내 벌받는 느낌으로 썼다는 작가의 언어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 휴먼 푸가>를 통해 비로소 < 소년이 간다>를 그리고 그 너머의 광주를 에둘러 만났다. 극이라는 것이 가진 본질적인 유희성 덕분에. 오브제는 이 유희성을 극대화했고, 이 극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감정, ‘재미’를 선사했다. 죄책감이 들 정도로 달콤한. 가장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주제조차 즐거이(?!) 만날 수 있게 만드는 뛰다 스타일의 완성형. 완전히 외면했을 지도 모르는 어떤 것을 직면하고 수용할 수 있게 만드는 유희의 힘.

뛰다
뛰다의 연극을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어떤 경지에 올랐음을 느낀다. 뛰다는 항상 유희와 난장이었고, 소리와 몸의 서사였다. 나에게는 투머치 하다고 느껴졌던 구간을 지나 어느덧 정점에 이른 것 같다. 최소한의 것을 남겨 제련한 세련된 화술. 두말할 나위 없는 푸가였다. 푸가는 이 연극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뛰다의 제목으로도 어울릴 듯 하다. 이 뛰다 스타일이 또 어떤 이야기를 만나 어떤 결과물을 만들지 궁금하다. 가끔이라도 연극을 봐야겠다. 아니 뛰다를. 뛰다의 푸가를.

그 전에 우선 광주. 내년에 40주기가 되는 광주. 아직 광주 하나도 보내지 못했는데, 죄없는 자에게 내려꽂히는 폭력과 뜬눈으로 보내는 밤들은 계속해서 쌓여가기만 한다. 알츠하이머 환자는 골프장에서 호쾌한 굿샷을 날리고, 홍콩에서는 광주의 데자뷔가 진행되고 있다. 내년에 이 작품이 다시 무대에 오른다고 한다. 그때 우리는 무엇의 장례식을 치루어야 하는가.

CategoriesDiary

丹双歌

丹双之交 晩秋佳景
世稱閑心 自稱詩心

단풍과 쌍화차가 서로 벗하여 어우러지니
만추의 절경을 이루는구나.

세상은 이를 한가한 마음이라 하나
나는 스스로 시인의 마음이라 하네.

(생애 첫 한시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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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내쇼날 유니베르시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