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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 영화 말고 잡스

스크린샷 2013-09-07 오후 9.34.35

MS스러운 잡스 영화. 세상을 바꿀 위대한 아이템에 압도되어, 그 무엇도 버리지 못한 채, 불친절한 UX로 덕지덕지 자잘한 기능만 잔뜩 붙여놓은 제품같다. 많은 것을 생략하고, 뛰어넘고, 요약해 버렸고,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얼버무렸다. 관점이 없기 때문이겠지만, 해석하기에는 너무 큰 존재였을 것이다. 그 틈새를 잇는 음악과 영상의 오색찬란한 감정 유발은 한 마디로, not cool.

유일무이의 성찬을 제대로 씹어 삼키지 못한, 소화 불량의 잡스이거만 그래도 잡스였다. 나에겐 영화에서 뿌려지는 파편들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원래 알고 있던 잡스에와 애플 제품이 줬던 경험이 어우러져 마음은 쉴새없이 꿀렁거렸다.

맞어. 내가 좋은 영화를 원했던가? 설마. 딱히 영화를 보고 싶었나? 노. 세기의 인물에 관한 경이로운 해석을 기대했나? 아니오.

난 잡스가 보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그럴 수가 없어서, 누군가 대신 그려준 잡스의 이야기를 보러 간 것 뿐. 영화를 본 후, 잡스에 대해 생각하고, 몇 가지 정보와 디테일을 얻고, 다시 한 번 그를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이들과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127분의 런닝타임은 그 역할로 충분했다. 이 이야기가 불과 < 잡스 비긴즈> 내지는 < 잡스와 마법사의 돌> 뿐이었을 지라도.

무엇보다도 난 이 영화로 볼 수 없었다. 영화 속의 이야기와 내가 하고 있는 (비교할 수 없이 사소한) 일들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더 높은 차원의 품질에 대한 압박과 열정에 대한 요구, 디테일과 UX에 집착, 비타협, 독단적인 옹고집과 신념의 경계….등. 난 영화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난 스스로 감독이 되어, 나의 일상과 스크린 위의 화면을 쉴새 없이 교차 편집해 틀고 있었다. 미천함과 위대함이 뒤죽박죽된 그 ‘어떤’ 영화에 나는 초집중했고, 마지막에 핑그르 눈동자에 어린 물기를 극장의 불이 들어오긴 전 남몰래 훔쳐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