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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for May, 2014

10 years

배운다는 말을 잘 믿지 않는다.

많이 존경했고 좋아했던 누군가의 퇴사 인사말에
“많이 배웠습니다”라고 쓰려다가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결국 나는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옆에서 보기만 왔을 뿐,
전혀 그 사람처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말을 거둔 적이 있다.

사람들은 배운다는 말과
누군가 그렇게 하는 것을 오래 보고 있었다는 것을
너무 쉽게 혼동한다.

그래서 그저 오래동안 지켜보기만 해 놓고는,
“배웠습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알고, 분석하는 것과
실제로 그 순간에 그렇게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

하지만, 10년.
10년이라면 어떨까.

짧지만은 않은 시간.
일을 했고, 여러 사람들과 만났고,
쪽도 팔고 성과도 내며 많은 경험을 쌓았지만

무엇을 이루었나, 출발점부터 얼마나 멀리 달려 왔나 돌아보면
그저 모든 것이 덧없는 공회전같을 때도 있었고
큰 바위 얼굴 같았던 이들이 오고 또 가는 것을 지켜보며
때로는 멈춰버린 정거장이 된 듯한 기분도 들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리하여 이 10년의 시간을 보낸 내가
이 10년의 시간을 보내기 전의 나와 얼마나 달라졌나이다.

10년간 정말로 애썼던 것은
나의 좋은 점들을 잃지 않으면서도
여기의 좋은 점들을 배우는 것.

애초에 서로 다른 세계를 태생으로 한
극과 극의 형질을 하나로 녹여내는,
불가능에 가까운…혹은 그것이 이루어진다 해도
대체 무엇에 소용이 있는가를 되묻게 되는 숙제였다.

그 과정에서, 조직의 큰 존재감 앞에
나의 좋은 점들이 싸그리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고
그리하여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는 순간도 있었으며
그에 비해 배운 것은 하나도 없다는 극적인 깨달음(!)에 도달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놓지 않았다.
계속해서 배워야 한다는 것. (지금의 나만을 고집하지 않고 변화해야 한다는 것)
그래도 나여야 한다는 것. (나의 고유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

양쪽에서 너무나도 팽팽이 끌어당기는 이 두 가지 끈을 잡고,
어느 한 쪽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10년을 왔다.

그래서 지금 결국 어떤 사람이 되었나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다.
잃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고
턱없이 많이 쏟고, 아주 조금을 간신히 얻는 비생산적인 과정.

그러니, 이건 배웠다기 보다는
시간의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흡수되었다라고 하는 편이 맞지 않을까.

오랜 시간 강제로 붙어있어야만 했던 두 이질의 접면에서 발생된 변색.
그 색이 아름다운가. 그 색이 성장인가. 혹은 배움인가.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10년. 나의 色은 지금 이것이다.

여전히 난, 서울에서 태어나 부평초처럼 흘러흘러
지구의 반대편
아르헨티나 어느 촌구석에 둥지를 틀게 된 이방인.

고향도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숟가락질부터 피로연까지 모든 게 낯설기만한
Englishman in New York의 일상이다.

하지만, 어디든 어떻게든
꽤 재미있게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것.
이것이 유일하게 tangible한 성취랄까.
10년의 세월을 들여서 얻은…

끝으로, 지난 10년간 내내 여기서 받았던 질문.
넌 누구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이 질문은 현재 진행형으로 남겨놓고 싶다.
계속해서 나아가고 싶으니까. 단 1cm, 1mm라도…

2004.5.31~2014.5.31

수고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또 수고해 주세요 ^^

“(…)알 수 없는 우주 속 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없이 노력하는 것뿐이야. 그 결과를 가지고 조급히 따지기에는 이 세계는 너무도 오묘해. 무엇을 해야 하나? 그건 자네들이 생각하게.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야. 자네들 할 탓이야. 나로 말하면…… 달리 살았더면 하는 생각은 없어. 만족해…… 재미있었어.”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야. 재미있었어. 학은 손톱을 깨물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컹.
컹.
컹.
황선생은 손을 내밀어 학의 손목을 꼭 잡아 주었다.

최인훈 < 회색인(1963)>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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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 화천여행

쓰나미 업무도, 알람머신 스마트폰도, 심장을 찢어 놓는 매일의 뉴스도, 세상에 대한 오갈 곳 없는 분노도 모두 끊었던 1박 2일의 블랙아웃. 스위치를 껐다 켜는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단절을 통해서만 회복할 수 있는 것을 얻었던 시간. 화천은 그러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몇 겹을 벗겨내고 원래의 질을 드러낸 듯한 공기와 물. 한 점의 이물질도 섞이지 않은 어둠. 그리고 하늘에서 내리던 별들. 담요로 몸을 두르고,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을 향해 깊은 숨을 토해냈다. 가슴 속에서 흘러나온 것들이 춤 비스무레한 것을 추며 어둠 속으로 아득히 날라 갔다. 꽤나 들이 부었던 알콜의 기운도.

아침에 눈을 뜨고, 펜션 창을 여니 이런 풍경
깜깜한 밤에 구불구불 산길 타고 올라와서 전혀 몰랐다. 이런 첩첩 산중이었다뉘;;

물론 그래봤자다. 얼마나 가겠나. 1박 2일 체험 타인의 삶의 현장에서 구한 힐링이란 것이. 하지만, 이렇게 긴급 대피하듯 도망쳐 나와 찍은 쉼표 하나가 간절했던 타이밍. 함께 했던 벗과, 환대해 준 벗에게 감사~ 근데, 이런 짧은 동행조차 십 수년 만에 가까스로 한 번이라니. 친구 맞어???-_-;

화천은 혜란이가 몸담고 있는 연극집단 뛰다(Tuida.com)가 5년전 터를 잡은 곳. 화천군이 10년간 무료로 내 준 폐교는 사무실과 연습실이 되었고, 거기에 극장과 제작실, 게스트하우스와 거주 공간, 텃밭 등 점점 살이 붙었다.

학교 운동장에서는 강원도의 선명한 햇살 아래 하얀 이불 빨래가 널려 있었고, 화천에서 태어난 뛰다 멤버들의 2세들이 꺄르르거리며 뛰어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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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같이 둘러앉아 먹는 소박한 점심


본관 – 뛰다의 대표작 < 하륵 이야기>


뛰다의 주요 레퍼토리로 장식한 본관 입구


사무실 옆 작업실. place of making things.


잘 정리된 작업 재료와 도구들~ 와우


뛰다의 가장 최근 작품 < 바후차라마타> 성소수자를 다룬 작품. 인도극단과의 합작품이라고. 못봐서 아쉽~


연습실 칠판 – 이런 상황들을 가지고 연습을 하나보다~~


고품격 황토 연습실~ 연습실의 황토벽은 멤버들이 직접 발랐다고.


희랍스타일 야외 극장도 제법 폼을 갖췄다.


운동장에 심은 계수나무. 크도 두터운 나무로 자랄 때까지 뛰다의 역사와 함께 하길~


처음 만난 혜란이 동생. 학교때부터 구제불능 문제아, 트러블 메이커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젠 누나의 조언으로 무대제작의 길을 뛰어들어 아주 잘 해나가고 있단다. 오호 놀~라~워~라. 작업의 포스는 이미 장인~~


운동장 한 켠에서는 좋은 볕에 이불 말리고


뛰다 화천 1세대 나모양. 어떻게 커나갈지 기대되는.


연출가 부부 요섭~ 주야씨 댁에서 담소 나누시는 두 대학동기 여사님들.
둘 다 있다. 심지어 하나는 상당한 차이의 연하다. 짱나!!! ㅋㅋㅋ
이렇게 사택?? 제공도 되는 훌륭한 뛰다~


텃밭도 만들었다. 작게 시작했지만, 어쨌든 직접 길러 먹어볼 요량이란다.
예술을 하려면 결국엔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공동체라는 틀 안에서 실천하고 있는 그들!
근데 나모가 심어서 삐뚤삐뚤 자라고 있다는 건 귀여운 함정~


뛰다 제작실. 무대장치들? 같은 거 직접 만드는 모양이다. 능력자들!
이 옆엔 제법 잘 지은 극장도 있었다. 원래 한옥 학교?같은 것이었다는데 극장으로 개조했다고.
참 열심히도 많은 것들을 이뤄가고 있다.


명배우 재영씨의 오후 과업은 제초작업. 예생일치라면, 이 또한 예술의 일부이려니~~
이렇게 모든 걸 직접 자기 손으로 만들고 지켜 나간다는 거. 참 멋지구리~

그런데, 오래 간만에 만난 이들은 점점 더 생활인이라기보다는 구도자로 깊어진 느낌?

뛰다를 한 바퀴 둘러본 다음엔 혜란이의 안내로
화천으로 귀촌한 조각가 이정인, 생태화가 이재은 작가(보리 출판사에서 일러스트 작업을 하셨던) 부부가 운영하는 갤러리와 작업실에 놀러갔다~


이정인님 기본적으로 가구 작업을 하시는데. 책상이며 의자의 퀄리티가 ㅎㄷㄷㄷㄷㄷ
가구에 아무 관심없는 최여사가조차 돈 벌어서 하나 업어가고 싶다는 발언을 할 정도.
눈으로 보는 것도 좋지만, 만졌을 때의 기분좋은 느낌이란! 읗ㅎㅎㅎㅎ


예기치 못한 힐링은 너무나 공들여 잘 만들어진 물건의 결에서도 왔다.


하지만, 그냥 유능한 기술자 목수에 그치지 않으시고
나무를 활용해 예술의 경지에 이르셨다. 화천의 나무에 화천을 담아내고 계셨다.


나뒹구는 죽은 나무들에 색과 뜻을 입혀 화천을 흐르는 물고기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심 ^^


자투리 나무들을 모아 ~ 작품명은 ‘잡어’ 가운데 등에선 빛이 퍼져나온다.
그래서 굳이 ‘잡어구이’라 불러보았다. 술땡기라고~


나무의 결을 그대로 살려 여기에 화천의 주요 랜드마크를 그려넣어,
죽은 나무에 화천을 담으셨다. 곧, 뛰다도 넣어주신단다~~


불치병 진단을 받으셨다는 데 화천에 내려와 완치되었다는 이정인 작가님.
옆에 Gallery 1 표식 나무도 화천에서 폐쇄된 다리의 것을 그대로 가져왔다고 한다.


작가의 작업실. 페인팅 류가 많은 것으로 보아 주로 그림을 담당하는 이재은 작가님의 작업실일듯


남편이 주요 소재가 되는 작업이라~ 남편이 이런 데도 쓸모가 있구나.


목수의 작업실 탐방 ~ 비밀 공간을 흔쾌히 열어주셨다!
뭔가를 만드는 사람의 공간은 늘 살아있는 에너지로 가득하다. 비어있을 때 조차도.


나와서 한 컷


작업실 바로 앞 화천 율대 정류장 – 지나는 사람도 버스도 거의 없는 외진 이 곳에, 작가는 이렇게 공을 들여놨다.


이웃집 문패도 작가님 선물이라고~ 안에서는 옥분 여사님과 그 친구분이 담소중였다.


혜란이가 거주중인 신아 아파트. 아파트에서 중세 수도원의 스멜이~~


그리고 동네 한바퀴


화천 애기들


해질 무렵 화천천

많은 얘기와 웃음 속에 보냈던 시간. 친구의 환대와 뭔가를 만들고 바꾸며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의 좋은 기운을 듬뿍 받았다! 호르몬의 이상이 야기한 나의 불치병도 잠시나마 호전되었다.

물론, 난 다시 숨가쁜 도시의 정글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 내가 선택한 혹은 나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성장을 멈추지 않고 세계와의 관계를 개선해 나갈 수 있을까를 묻는 나의 실험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별도 뜨지 않는 하늘 아래서 도시의 더러운 공기를 휘감고, 너와 나에게 무심한 이 이방인적 관계 속에서, 너가 없는 이 세상에서도 그래도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즐겁지 않아도 살고 즐겁더라도 여기서 멈추지 않는 사람으로 살 수 있는가를 묻고 또 물을 것이다.

이번 여행으로 느낀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 다른 삶을 일구는 사람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나를 설득한 것은, 어디냐의 장소가 아니라 꿈꾸고 나아가는 사람들이 지닌 방향과 태도. 그러니, 화천의 그들도, 도시의 나들도 ~ 누구든 어디서든 화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