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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 ‘새(The Birds)’ – 갑툭튀의 공격

birds

EBS 대박기획! 7월 세계의명화 여름특집 < 히치콕감독 HD걸작선>
2/새, 9/이창, 16/현기증, 23/39계단 30/싸이코 (Thanks to @aeravera)

초딩 여름방학을 종종 목포 외할버지 댁에서 보냈다. 목포 다운타운 한 복판에서 수퍼를 하셨던 외할버지 가게에는 작은 흑백 TV가 놓여있었다. 그 밤도 어느 날과 같이 소시적 동네 훈장 선생님이셨던 외할아버지의 데일리 한자 퀴즈를 패스하고, 상으로 받은 하드를 베어먹으며 본 영화, 바로 마봉춘님이 틀어주신 영화 ‘새(The Birds)’였다.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무더운 여름 밤, 어린 마음에도 조여오는 서스펜스에 심장이 쿵.쿵. 뛰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람들 많이 오가는 가게였는데도 왠지 고립된 기분에 아악- 소리도 못지르고 벌벌 떨었지만, 한 시도 그 조그만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정신없이 봤었다. 오늘의 나처럼.

지금 생각해 보면, 본격적인 새들의 공격이 시작되긴 전 영화의 2/3에 해당하는 저 女3: 男1 신경분열직전의 위태로운 여초 로맨스를 당시의 쬐끄만 꼬맹이가 어떻게 받아넘겼을지 의아하다. 기억나는 것은 오로지 공포스러운 새들의 공격 뿐. 대학교 때 ‘새’를 봤을 때는 냉전 직후의 The others 위협이니 뭐니 하는 ‘새’나 영화 상징을 해석하는 부분에 몰두했었다. 졸업 후 동네 비디오 방에 구색맞추기 식으로 끼워져 있는 히치콕 영화를 하나씩 빌려다 봤을 때는 < 마니>에 홀딱 빠져 있었고 모든 영화가 최고였기기 때문에 ‘새’가 특별하지 않았다. 오늘 난, 새들의 공격을 전 후로, 영화 속 네 인물이 주고받는 대담한 대사들과 거기서 교차되는 감정이 화면에 표현되는 방식에 열광한다. 갑툭튀의 공격…그 속의 인간…이걸 바라보는 히치콕의 눈.

여자

한 남자를 중심에 둔 세 여자가 있다. 이들의 감정은 아스팔트 위의 열기처럼 강렬하지만, 밤인지 낮인지 실체를 분간하기 힘들다. 그 미묘한 속내는 오직 폭로를 두려워하지 않는 상대방 여자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한 남자를 중심에 둔 이 여자들이 쏘아대는 팽팽한 성적 긴장감은 새의 공격을 받고서야 깨져 나간다.

첫 번째 여자, New face. 샌프란시스코에서부터 굽이 굽이 해변 도로를 운전해, 앵무새(love bird) 두 마리 들고 보 데가 만에 도착한 속물적인 부자집 딸래미. 고급 차에 꽉 죄는 하이힐, 모피코트를 걸치고 금발머리를 한 치의 틈도 없이 우아하게 틀어올린 다니엘스(티피 헤들렌)다. 하지만, 이 여자가 주인공인 이유는 예뻐서가 아니다. 상황을 맞닥뜨리면 두 팔 걷어부치고 당면한 상황 속으로 돌진해 해야 할 일을 다하는 대담함 때문이다. 그러니까, 블라우스 버튼을 목까지 채워 올리지만, 엘레베이터에 둘이 남겨지만 남자의 지퍼를 내리는 데 주저함이 없는 여자 – 히치콕이 사랑해 마지않는 영국식 여주인공의 전형이다.

‘새’에서의 다니엘스도 그렇다. 그녀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가볍기 짝이 없다. 새 가게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에게 뻑이 가, 다음 날 그 남자에게 장난 하나를 치기 위해서. 로마의 분수에 알몸으로 뛰어들어 신문의 가십면을 오르내리는 천방지축 신문사 사장 딸래미의 가벼운 작업질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녀는 신문사 사장 딸의 직위를 이용해 남자의 신상을 털고, 그 먼 길을 운전해 오는 것도 모자라, 대여한 보트의 자가 운전을 마다하지 않는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만, ‘유주얼 서스펙트’의 케빈 스페이시처럼 매서운 눈썰미로 캐치한 팩트를 백분 활용해 치밀하게 남자에게 다가간다. 이러한 그녀의 ‘총명한 열심’은 치기어린 작업질에 충실함을 부여하며, ‘내 남자에게 최선까지 다하는 미녀’로 남자의 로망을 업글한다. 못생긴 여자가 열심이다, 라는 숫컷의 통념을 뒤엎는는 히치콕식 반전.

다이엘스로 분한 티피 헤들렌. 장만옥, 까르멘 마우라, 그리고 헐리웃 이전의 페네로페 크루즈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 그녀는 유난히 동물과 친하다. < 새>에서는 새 < 마니>에서는 말. 위대한 영화를 줄줄이 비엔나처럼 뽑아내셨지만, 히감독님 영화 중 퍼스널 베스트는 누가 뭐래도 ‘마니’다.

두 번째 여자, Ex. 언뜻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다니엘스의 의도를 한 눈에 꿰뚫어 보고 있는 여자가 바로 옛날 애인다. 그녀가 뉴 페이스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이전 모습이기 때문이다. 뉴페이스가 아무리 포장을 해도, ex에게는 환하게 읽힌다. 남자와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고도 오직 그 남자를 친구로라도 옆에 두기 위해 황량한 이방에 정착해 평생을 사는 여자. 감히 뉴 페이스가 이런 여자를 속일 수 있을까. 심지어 그녀는 남자가 사랑하는 동생을 구하고 대신 죽어 버린다. 누가 이 여자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정말 이길 수 없는 여자는 세 번째 여자다. Mother. 기댔던 남편을 잃은 그녀는 대신할 아들에게 집착한다. 돌아선 아들의 등에 넌 정말 니가 원하는 게 뭔지 몰라, 라고 독백하는 그녀는 영화에서 동물적 모성을 가진 ‘마더’라기보다는 보호받고픈 집착을 감춘 ‘여자’로 그려진다. 아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에게 다른 여자의 틈을 빼앗는 그녀가 여타 동종의 마더와 차별화 되는 건 다음과 같은 Ex의 촌철살인 분석 때문이다. 엄마는 이기적인가? “그녀는 그를 원하는 게 아니예요. 다만, 버림받고 싶지 않을 뿐.” 아들의 선택인가? “아니, 그녀가 그를 놓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고 생각해요.”

이런 Ex의 분석은 자연스럽게 ‘싸이코’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난 오늘 그녀에게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를 본다. 기대야 하는 여자. 남자없이 자립할 수 없는 존재. 그래서 결국 돌아버린 채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금발 미녀. ‘새’의 마더는 스탠리와 맺어진 50년 후의 블랑쉬같다. 기대는 대상이 근육질의 애인에서 아들로 바뀐 것 뿐. 마더로 분한 제시카 탠디의 얼굴은 놀랍도록 티피 헤들렌과 닮았다. 그래서 마더를 더욱 불안하게 한다. 나과 비슷하지만 나 보다 우열한 존재에게 느끼는 본능적 불안감.

영화는 새들의 공격에 다니엘스의 얼굴이 점점 질려가고, 결국 공포 이외의 모든 표정을 잃는 과정을 보여준다. 블랑쉬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가고, 다니엘스는 불길한 탈출길에 오른다. 하지만, 영혼이 빠져나가 버린 듯한 두 여자의 마지막 표정은 비슷하다. 당돌하고 자신감 넘쳤던 두 미녀가 닥친 상황과 싸우다 맞는 비슷한 결말.

재미있는 건, ‘새’에서 마더에 분한 제시카 탠디가 연극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 역으로 47년 토니상을 탔다는 사실이다. (보고 싶다!) 금발 미녀의 얼굴로 당의을 씌우고 그 아래 동동 감싸놓은 히치콕의 비틀린 여성관이 읽힌다. 이 맛이 히치콕이다. :-)

남자

세 여자의 너무 많은 사랑을 받는 남자는 능글맞게 여자의 마음을 뺏을 줄은 알지만, 정작 선택을 할 줄 모른다. 엄마를 떠나지 못하는 건 그의 선택인가? 영화에서는 ex가 지적했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조차 불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 불분명한 사각 관계는 생존을 위협하는 새들의 공격 앞에서야, 비로소 명쾌해진다. 영화의 끝에서 남자는 선택을 하고, 남자의 선택은 여자들의 감정에 교통정리를 하고 평화를 가져온다. 비록 그 평화가 맞서 싸울 방법이 없는 적들에게 둘러쌓인 일시적인 것일지라도. 평화가 오기까지, 한 여자는 죽었고, 또 한 여자는 영혼을 잃었고, 또 한 여자는 버림받았다. 진정 이 남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겐지.

남자는 클리쉐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게 그려지기에,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여자들의 연대다. 영화의 중반을 지나 남자의 출연 빈도가 급격히 뜸해지면서 부각되는. Ex와 뉴 페이스는 학교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손을 잡고, 같은 집을 지키려는 마더와 뉴 페이스는 어쩐지 화해 모드다. 한 남자를 바라보는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으면서도, 영화에서 부각되는 건 질투라는 감정보다는 함께 힘을 합쳐 외부의 적에 맞서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 계열로는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실재 사례를 매일 목격 중이라. 김진숙과 김여진.

구경꾼들

누구 하나 허투루 그려지지 않는다. 조연이든 주연이든 엑스트라든 상관없다. 몇 초, 몇 분을 나와도 나온 이유를 명확히 보여주고 들어가는 인간들로 인해 영화는 빽빽하고 모든 장면이 흥미만점이다. 고작 몇 분 등장하는 소소한 인물들에게조차 존재의 의미를 부여한 악마적 디테일이 영화를 살아있게 만든다. 왜 이런 영화의 미덕이 요즘 영화들에서는 점점 사라져가는 것일까…영화의 캐릭터들도 점점 부익부 빈익빈.

‘왜 새들이 공격하는가?’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지만,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 질문이다. 사람들은 새라는 존재를 분석하고, 나름의 이유를 따지고, 사태에 대한 개똥철학을 펼치지만 아무도 답하지 못한다. 시조새 이후 1억 4천만년 동안 잠잠히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공격을 퍼붓는 존재의 의도를 무슨 수로 파악한단 말인가. 원인이 없기에 원인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대처할 수 없을 때, 인간의 논리는 무력해진다. 게다가 물리적 싸움도 안된다. 아니, 새랑 어떻게 싸워-_-;; 길가에 비둘기 한 마리랑 싸운다는 것도 이상한데, 수 천억 마리나 된다는 새들이랑 어떻게 싸워.

결국 불똥은 엉뚱하게 다니엘스에 대한 마녀사냥으로 튄다. 치밀한 논리와 철학을 펼치던 인간들이 비이성적 본능으로 대동단결하는 와중에도, 새는 아무 힌트없이 나타나서 공격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유없이 나타나 뜬금없이 사라지는 갑툭튀의 공격. ‘새’에서 표현되는 공포의 근원은 ‘갑툭튀의 불가해함’이다. 고속도로의 미치광이. 동기없는 연쇄살인. 죄없는 어린 존재를 고통 속에 빠뜨리는 페스트.

인간을 딱 그 깊이만큼 들여다보고, 들여다 본 딱 그만큼을 아무 군더더기 없이 최단거리로, 더 이상 명쾌할 수 없게 쇼트로 살려내신 히감독님. 너무 오래 놓고 있었다. 추억 속 열광의 ‘기록’만이 남아있을 만큼. 오늘 다시 히감독님을 이렇게 뵙자오니, 감동의 눈물만이 흘러 내린다. 스쿨씬이나 공중부스씬, 다락방씬, 이웃집 방문씬 등 대표 명장면들도 좋았지만, 그 외의 모든 장면이 다 너무 좋았다. 단, 한 장면도 뻔하지 않다. 어떻게 영화가 이래. 아니, 영화가 원래 이런 거였지…영화가…영화라는게.

미스트(전체 스토리와 결말), 신체강탈자의 침입(Invasion), 악마의 씨(쫓기는 여자와 전화부스씬), 봉준호 감독님 마더(마더! 제시카 탠디…특히 이웃집 방문하고 돌아오는 전경씬) 등등의 영화가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음. 정말 행복한 여름 밤이었다. EBS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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