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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for January, 2010

나도, 고맙고맙

꽃은 금방 죽여버렸어요. 내가 그렇지 모…

같은 날, 다른 공간

하늘과 언덕과 나무를 지우랴
눈이 뿌린다
푸른 젊음과 고요한 흥분이 묻혀
있는 하루 하루 낡어가는 것 위에
눈이 뿌린다
스쳐가는 한점 바람도 없이
송이눈 찬란히 퍼붓는 날은
정말 하늘과 언덕과 나무의
한계는 없다
다만 가난한 마음도 없이 이루워 지는
하얀 斷層.

- 박용래 < 눈>

신림

분당

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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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좀 봐 줘!

후배네 집에 놀러갔더만 갓 돌을 지난 애기가 너무나 얌전하다. 치대지도 않고 혼자서 잘 논다고 칭찬이 무르익는데, 간만에 해후한 여자들끼리 수다꽃을 피우자니 어디선가 꽝~하는 소리가 난다. 이어 “으아앙~~~” 터지는 애기 울음소리. 데리고 놀던 알파벳 버스를 전복시킨 것이다. 딱 봐도 의도적으로 넘어뜨린 것인데, 명백한 메시지는 “왜 나한테서 눈을 떼는 거야, 날 좀 계속 봐 주지 않고 말야!” 이거였다.

아무리 얌전한 애기라도, 혼자서 잘 놀 수 있을만큼 의젓한 품성이라도, 최소한 관심은 늘 향해있어야 한다. 그 증거로, 눈만은 떼지 않고 계속해서 맞쳐줘 달라는 얘기였다.

요즘 페북이나 트위터 보면 뭔가 노땅들의 잔치인데, 그분들의 열렬한 업데이트 정신에서 “나 좀 봐줘!” “나 좀 들어줘!” 라는 같은 메시지를 읽는다. 하기야 블로그에서 이렇게 끼적거리는 나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반면 열심히 탐색을 거듭해 간신히 친추한 샤방샤방한 젊은 것들은 도통 아무 것도 안 올리고, 감감 무소식이니. 블로그, 미니홈피 때만 해도 안 그랬는데 말이다…아, 그땐 내가 젊었구나. 쩝! 그렇다면 작금의 이 현실은 매체의 특성이 아니라, 내 노땅화가 부른 비극이란 말인가.

어쨌든 한 인간에게는 그 만큼의 절대적인 관심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타인에게 관심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늘 찾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봐주는 누군가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어쩐지 나이들수록 봐 주는 사람보다는 봐 달라고 칭얼대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느낌. 들어주는 사람, 봐 주는 사람과 같은 신종 직업군을 개척해 보는 것은 어떨까? 왠지 유망할 듯.

누가 나를 봐주지 않아도 아쉬울 것 없는 사람…그냥 가까운 한 두 사람만 봐주면 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멋있다. 나도 멋없다 -_-;;;

sns

소셜 네트워크 나이별/상태별 분포 – SNS 대세라는 영거 싱글은 대체 어디에 -_-”
출처는 가트너가 요번에 뿌려댄 ‘Top 10 Consumer Mobile Applications in 2010′

슬리퍼야, 부탁해!

my sleeper

고단한 출근길에 마침표를 찍어주는 포근한 위로.
‘아, 오늘도 오고야 말았구나.’ 하루의 노동은 슬리퍼를 신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나에게 슬리퍼는 그냥 발싸개가 아니라, 그 포근함 속에 내 마음이 놓이는 소중한 물건이다.

새 슬리퍼로 갈아 신고, 헌 슬리퍼가 아쉬워 한 컷 담아놓는다. 고달픈 직딩 라이프지만, 태국에서 담아온 이 녀석으로 갈아 타고 난 후, 좋은 일이 많이 생겼었다. 고마운 슬리퍼다. 일에 몰려 삼실을 종종거릴 때도, 어려운 얘기들에 머리를 쥐어짤 때도, 울고 싶을 만큼 기운이 빠져 빈 회의실로 달려갈 때에도 한결같이 내 가장 밑바닥을 따뜻히 지지해 주었던 소중한 동무.

새 슬리퍼도 즐거운 일, 멋진 일 많이 물어다 줬으면 좋겠다. 생긴 건 좀 아동틱하다만, 잘 해 줄 수 있겠지? 만만치 않은 시간들이 놓여져 있다만…부탁한다, 새 슬리퍼!

말에 관한 결심

말 많은 세상이다. 너도 나도 말을 듣고 말을 퍼나르기에 바쁘다. 특히, 사건사고 변화가 있을 때는 더욱 더. 누구누구의 열애 소식에서 누가 누가 이랬다 저랬다, 왜 그러냐, 사실이냐, 누가 그랬냐, 누구는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 ‘아는 것이 힘이다’는 이 말잔치의 경제에도 똑같이 적용되어, 들은 말이 많을 수록 그리고 그 말이 희소한 것일 수록 영향력도 높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점점 더 많이 가지려고 여기저기 소스를 찝쩍거리게 되고 더 희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정보의 색깔은 점점 더 옐로우해 진다. 그 영향력이란 것이 개떡 부칠 때 써먹을 만한 양념거리나 되려나 싶지만, 말하고 싶어 못 견디겠고, 듣고 싶어 못 견디겠는 명쾌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말의 가격을 산정한다. 그래서, 영양가 있는 사람에게는 높은 가격의 말을, 영양가 없는 사람에게는 일원 반푼어치의 말을 하게 되고, 높은 자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말을 포획하고, 낮은 사람은 말을 상납하여 높은 이의 환심을 사려 한다. 이런 식으로 말은 돈이나 지위만큼이나 분명하게 계급을 가른다.

나 역시 (고상하게 표현해) 이러한 말 취득에 관심이 많다. 이러저러한 목적으로 그 정보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라고 합리화하지만, 그저 말초적인 궁금증의 해소도 꽤나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왜냐.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 정도는 알아야 알아봤자 아무 소용없는 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 정보가 나의 삶을 나아지게 만드는 데 필요했나, 돌이켜 보면 있으나 없으나 하드만 차지하고 괜한 입방정에 남의 하드까지 오염시킨 그런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최근에 나는 어떤 일에 대한 여러 각도로 정보를 취득했다. 별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지하 유통시장에서 긁어 모은 파편이 조각이 되고, 조각을 맞추어 그림을 그리는 재미난 과정이었다. 나는 전체 그림을 보고, 나의 행보를 가늠해 보고 싶었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 과정에서 라쇼몽처럼 하나의 일이 여러 관점으로 재현되는 경험도 했지만, 이 조각 조각들을 편집해 하나의 스토리로 만드는 나의 태도에 관한 질문도 해 보게 되었다. 말에도 view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 엄격한 숫자의 세계에서조차, 그 해석에는 관점이 작용하는데, 정량화되지 않은 말의 세계야 말로 봉두난발의 난장이다. 그러니, 이런 세상에서는 많은 말을 취득하고 유통시키는 것 보다는, 그 말 중에서 fact를 가려 진성 정보만을 발라내는 것이 오히려 힘이 아닐까 싶었다. 원천 정보의 진실성조차 판단할 기준없는 말 시장에서 과연 그런 게 가능할지 싶긴 하지만.

하지만, 결국 그 모든 말들을 짜집어 완성한 그림 앞에서 …그것이 현실을 반영하는지 어떤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그 괴상한 그림을 걸어놓고 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았다.

왜 이토록 집요하게 이 그림을 맞춰보고 싶어했는가.

그 답은 부끄러웠다. 천박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심각한 나란 사람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말의 문제가 아니었다.

말이라면 그저 쫑긋하여 치마벌리고 영합하는 말의 화냥년으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긴장도 오버도 아닌 ‘내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해야 한다. 평상심이 내재화되지 못했기에, 내가 살고 싶은 모습을 의도적으로 각인시키며 본능과 싸워야 한다.

좀 처절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말의 계급사회에서 천민 취급 받더라도, 두려움에 지지 말고 조금만 더, 단 몇 프로라도 더 맑게…아니 조금만 덜 탁하게.

슬픔

꿈에서 깨자, 한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여전히 눈은 감은 채로. 방은 아직 어두웠다.

바로 이런 것이 슬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망도, 아픔도, 서러움도. 연민도 모두 걸러진 순수한 슬픔의 결정체.

뱃 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가슴을 타고 올라와
혼탁한 여타의 감정과 섞이지 않고 곧바로 물질화한 한 줄기 맑은 눈물.

격한 흐느낌이나 울부짖음과는 다른
부정할 수 없는 인식 후에 오는 무섭고 깊은 감정이었다.

코끝이 좀 시릴 뿐, 얌전했다.
그리고 어찌할 수 없이, 슬펐다.

난 죽은 듯이 누워, 꿈 속 마지막 장면의 하얀 방을 생각하며
그렇게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봄을 그림

추웠지만, 한 점의 빌미도 주지 않은 칼날 같은 냉혈의 혹한은 아니었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어쩐지 겨울스럽지 않아 어색하기까지 한 따스한 기운이 내리쬐어…탄천을 걷는 나는 어느새 봄을 그릴 수 있었다.

오색의 수건을 둘러쓴 자전거‘떼’들이 세력행사라도 하듯 줄지어 다니고, 트레이닝복 차림 고운 처자들이 옅은 숨을 뿜어내며 재빨리 칼로리를 소비하는 동안, 어르신들은 천천히 걸음을 떼어 아예 이 계절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버리신다.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을 따스함 머금은 초록의 생기가 몇 퍼센트쯤 생기있게 만들어 주는 그런 날.

그 날엔 지난 늦가을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친 예초기 부대의 등장에 딱 하루만에 어이없이 민둥이가 되어 버린 계단이며, 둔덕의 풀들도 빼곰히 고개를 내미리라. 몇 계절 정들인 친구들의 무기력한 초토화에 어쩌지도 못하고 분하고 또 분해 그저 눈물만 쏙 뺐던 그 날의 쓰라림이 불과 한 계절 앞을 내다보지 못한 약한 마음의 소치임을 야단치기라도 하듯. 준엄한 생명의 법칙은 나불거리는 세 치 혀가 아닌 꽝꽝 얼어붙은 어두운 땅 속에 몇 달을 웅크리고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솟아나는 무서운 실천으로 나를 깨닫게 할 것이다.

작년 이맘때 생각도 난다. 연말연시 솔로부대 맘달래기 셀프 서비스에서 시작됐던 탄천 산책이 요맘쯤에는 제법 뜀박질로까지 발전됐었다. 뎀님이 장만해주신 새 PMP를 귀에 꽂고 새로 발견한 김효진의 라디오 프로그램의 사이클에 맞춰, 열심히 뛰었다. 그러고 뛰고 나면 세상이 너무 환해져, 난 뛰어야 하는 사람이며, 언제까지나 그렇게 뛸 줄 알았다. 딴딴해진 장딴지가 마냥 흐뭇했던 것도 봄이 피크였다. 김효진이 짤릴 즈음, 오피스가 바뀌고, 뛰는 것도 중단됐지만.

모든 것엔 끝이 있다고 다 산 노인네처럼 혼잣말 웅얼대곤 하지만…아직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영원한 것은 그렇게도 없다는 것.

겨울도 봄도…가을도 여름도. 겨울이 지나 다시 봄이 온대도, 그 봄이 지나 여름이, 가을이, 그래서 또 다시 겨울이 온대도.

하지만 지금 내가, 내 몸이 확실히 느끼고 있다. 봄이 오고 있다. 추위는 매서웠고, 무표정하게 시간의 쳇바퀴를 돌리는 우주만큼이나 인간 역시 잔인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생명은 계속되고 있다. 멈추지를 않는다. 그래서 영원한 것은 없지만, 끝나는 것도 없다.

그렇게 나는 전대미문의 최대한 준비된 자세로 2010년 봄을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