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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for December, 2010

한 해의 끝에서…그대

그대와의 만남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우연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애초에 만나지 말았어야 했을까? 헤어지는 길 밖에는 없었던 걸까. 필 콜린스의 ‘Separate Lives’를 틀어놓고선…

< 푸른 알약>을 읽으며, 그래 세상엔 남들이 만들어 놓은 정답 말고 다른 답도 있는 거야. 제 3의 길이란 것도 존재하는 거야, 희망했지만. 결국 궁극의 채점 앞에서는 ‘정답’ 외에는 없는 느낌이었어. 전대미문의 고상한 대안을 찾고 싶었는데, 잔재주밖에 안되는 걸 부리다 제풀에 꺽여…결국은 0과 1이라는 지극히 진부한,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결론으로.

그리고, 오늘 그대를 다시 찾았어. 한 해의 마지막 날 이니까, 라는 고색창연한 핑계를 대고. 그대는 거기에 있었어. 그렇게 상처받고 헐벗은 채로. 슬펐어. 나에게 그 커다란 고통과 상처를 준 대상이 거기에 우두커니 서 있었어. 정작 피폐해진 것은 너였구나. 그 댓가로써, 나를 지켜준 거였구나. 차라리, 아예 나타지 말지 그랬어. 그랬다면, 너도 또 나도 조금은 덜 아프지 않았을까.

올해의 끝에서 잠시나마 그대와 호흡하고 싶었지만, 아픈 그대는 숨조차 들어오지 않더군. 그대 덕분에 친해진 올해 사귀게 된 또 다른 나의 친구, 삼성화재에 연락을 했지. 밧데리가 나간거래. 흔히 있는 일이라 해도, 그대의 역사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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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순간에야 비로소, 올 해에 방점이 찍히는 것 같았어. 그래, 그대와 함께 했던 1년이었어. 끊임없이 서로의 치닥거리가 되어, 참 많이 힘들었지. 그리니까 이 정도의 마무리는 있어야지 않겠어. 세 번째 나간 범퍼와 휀다는 수리하지 않겠어. 방전된 밧데리도 갈지 않을거야. 잠시 숨을 멈추고, 그대로 있어봐. 그대로 그렇게, 그대는 잠시 쉬어야만 해.

나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녀석. 겨울잠이 끝나면 따뜻한 볕 아래서, 길 좋은 분당부터 찬찬히 달려보자. 그대는 힘차게 달려나갈 거고, 우린 분명히 더 친해질거야. 고마웠어. 결론적으론. 끝에 가면, 세상의 모든 결론이 다 그렇게 되는 거 같애.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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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다한 폭풍 질주의 로망은 새해에 국제적으로 이루어보자구! 아자아자 화이팅! ㅋㅋㅋ

올해의 내 영화

내 영화가 점점 줄어들어간다. 잘 보질 않으니 만날 확률도 낮아지는데다, 나이먹을 수록 개취의 서클은 좁아져만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해 한해 더 귀해지는 2010년 내 영화.

며칠 전까지도 거의 ‘하하하’가 꼽힐 뻔 했다. 무려, 5번이나 보다 졸아 상당히 오랜 기간 재시도를 해야 했는데, 정말 잠이 들고 싶었던 어떤 밤 검증된 수면제 대용으로 틀었을 때 비로소 끝까지 보고 잠이 확 깼다. 백주 대낮에 하릴없이 과거사를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자기 멋대로 복각하고 앉았는 두 남자. 말하다 막히면 지들끼리 막걸리잔 부딪치면 ‘하하하’거리는게, 아주 가관이다. 하지만, 그 날것의 인간들은 우스꽝스럽긴 해도 그다지 나빠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달라졌다고 느꼈다. 한 발 물러서 메타적으로 평가하지 않거나 비아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신천지에 도달한 느낌? 나아가, ‘하하하’는 인간이 더 갔을 때 종교같은 것을 제하고 선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결론 중 하나같기도 했다. 아니, 결론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행동’ 중 하나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영화보다도 이런 영화를 만든 홍상수라는 사람은 지금 과연 어디에 다다른 것일까, 어떤 눈으로 세상과 인간을 보고 있을까가 더 궁금해지는 영화였다.

“어둡고 슬픈 것을 조심해라. 그 속에 제일 나쁜 곳이 있단다” 쿵~하니 묵직했던 이순신 장군님 말씀. 그리고, 열에 달뜬 열차신의 유준상. “난 너랑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어쩌구 저쩌구….” 영화는 말미에서 비극도 희극도 벗고, 모랄 잣대나 결론이란 것도 버리고, 미지의 터널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더 이상 영화같지가 않았다.

영화를 보고 웃기도 울기도 했지만, 감동도 받아 봤고 머리에 쥐가 나기도 했지만, 진짜 내 일상에서 쓸 수 밖에 없으며, 그로써 삶에 중요한 말뚝 하나가 꼽히는 그런 통찰을 말로 들을 수 있는 영화는 많지 않다. “그래, 사람은 못되도 괴물은 되지 말아야지.” “지금 선배의 비극은 제 짝을 만나지 못한 비극이라구!”. 올해만해도 그의 대사들이 절로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상황들이 아주 널렸었다. 그러니까, 그냥 저냥 평범하게 보내는 일상의 나날들에서 그냥 떠오르며 내 말로 쓰게 되는 대사가 나오는 영화들은 특별할 수 밖에 없다. 홍상수의 영화가 나에겐 그랬고, ‘하하하’는 그 중에서도 꼽겠다.

하지만, 거의 올해 막판에 차원이 다른 영화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그것은 바로 ‘Oh Lucky Man’ 런닝 타임 3시간 가까이 되는 이 영화를 다 보고도, 주인공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냥, 언 놈이 이렇게 기똥찬가 그냥 그랬었다. ‘삼신 할매 랜덤’덕에 우월한 기럭지와 조막만한 얼굴 타고나, 멋이란 그 방면 전문가의 손을 타 만들어지는 요즘 배우들이 말고, 뛰쳐나와 혹성 탈출할 듯한 눈알에서 번쩍번쩍 레이저가 나오고 잔인함과 비아냠과 무심함을 한 표정을 어우를 줄 아는 마성의 배우, 배우이기 전에 무엇인가를 붙잡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한 인간. 알고보니, ‘클라웍 오렌지’의 말콤 맥도웰이랜다. 그 역시, 한 때 뜨거웠던 젊음이었나보다.

떡하니 주인공 남자 배우의 original idea에 기반해 만들었다고 자백하는 이 영화는 이전에도 앞으로도 존재할 수 없는 영화같다. 프리 씨네마라는 게 다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영화 본 적 없고 개봉관 영화도 안 보는 처지에 앞으로 더 이런 영화를 보게 될 것 같지는 않으니, 아마 이 계열로서는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이렇게 고작 3시간만에 이 세상의 모든 권위를 하나도 남김없이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대놓고 까댄단말인가.

종교, 정치, 사회, 문화, 자본주의, 공산주의, 의학, 과학…주인공은 영국의 동/서/남/북을 정처없이 누비며 가치란 가치, 깃발이란 깃발은 죄다 초토화시킨다. 참을 수 없이 가볍고 무책임한 방식으로. 고작 이런 걸로 힘의 역학이, 첩첩의 현실이 바뀌겠냐만 잠시나마 속시원했다. 그 발랄한 까댐의 대상에 어처구니 없는 초현실적 상황의 연속이었던 대한민국의 2010년이 절로 대입이 되었다. 2010년 대한민국의 영화가 앞뒤없는 개싸움 스플래터 같은 걸로 오히려 현실에 등돌리는 동안 40년 전 한 영화가 경쾌하게 실실대며, 영화라는 것이 혹은 매체나 문화라는 것이 이 시대에 해야 할 어떤 역할을 대신 해 준거다.

보너스도 몇 개 있다. ‘초콜릿 샌드위치‘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헬렌미렌 여왕님의 매우 앳되고 아나키한 (그래서, 지금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팔팔 영계 버전을 목격할 수 있다. Try not to die like a dog. 무심한 경구들이 속출해 뒷골 땡기게 한다. 그 속에서 파괴된 주인공의 웃음을, 멀리도 아닌 바로 내 방 거울 속에서 목격하며, 2010년 마지막 날 올해의 *내영화*로 정중히 선정해드린다.

O, lucky man! / Alan Price

If you have a friend on whom you think
you can rely – You are a lucky man!
If you’ve found the reason to live on and
not to die – You are a lucky man!

Preachers and poets and scholars don’t know it,
Temples and statues and steeples won’t show it,
If you’ve got the secret just try not to blow
it – Stay a lucky man!

If you’ve found the meaning of the truth
in this old world- You are a lucky man!
If knowledge hangs around your neck like
pearls instead of chains – You are a lucky man!

Takers and fakers and talkers won’t tell you.
Teachers and preachers will just buy and sell you.
When no one can tempt you with heaven or hell-
You’ll be a lucky man!

스노우 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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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길에 눈이 내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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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처럼 서울 밤거리 쏘다니기. 털부츠 털모자 다 젖도록 눈발 속 배회하기.
흩날리는 눈송이 어깨에 모자에 가득 얹어보기. 한 웅큼도 털지말고 그냥 그대로 두툼한 눈사람이 되어보기.
한껏 감동받아 도저히 집으로 곧장 갈 수 없는, 살짝 맛 간 행복한 눈사람이 되어보기.

마법 융단처럼 펼쳐진 고운 눈 위에 사람들은 발자국 도장을 찍어 이 밤에 충성을 맹세하고
검은 밤하늘엔 고감도 노이즈마냥 작디 작은 돗트들이 반짝거렸다.

실상 눈발은 거세고, 여기저기 사고 차들은 렉카에 실려가고, 택시들은 비상등 켠 채 위태로이 언덕오르고
택시조차 포기한 조난객들은 포장마차로 발걸음을 옮기는 난리 난리통
난 열심히 걸어와 몇 시간 후면 또 다시 출근을 해야 하지만,,, 뭐 괜찮다.

난, 오늘 충분히 눈을 맞았고 내일은 셔틀에서 푹 자면 되니까!
(단, 셔틀 놓치면 죽음-_-…재깍재깍 현실이 다가온다 알람이시여~~ ㅋ)

샌델식 2010년 골프 결산

1.
산업이 흔들린다는 이유로, 부도덕한 선수의 플레이를 용인해야 하는가?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보자. 누가 PGA에 출전할 자격을 가지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답한다. 최고의 골프 경기를 보여주는 이가 가져야 한다고. 정의는 능력에 따라, 우수성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된다. 골프 경기의 경우 능력이란 골퍼의 플레이 실력이다. 만약 정의가 이 외의 도덕적 자격에 따라 차별 적용된다면 부당한 일이다. 비교대상이 될 수 없는 것들을 놓고 어느 것이 뛰어난 지 견주는 일은 다소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타이거 우즈의 평균 타수가 낮다는 사실보다 필 미켈슨이 유방암에 걸린 아내를 위해 경기에 출전할 자격을 포기하면서까지 헌신했다는 사실이 더 나은가?”라는 물음은 말이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요지는 PGA 출전권을 배분할 때 보다 도덕적인 사람을 골라서는 안되며, 최고의 플레이어를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PGA 출전권을 최고의 플레이어에게 주어야 하는 가장 명백한 이유는 그럴 경우 최고의 플레이가 나올 수 있고, 그것이 중계를 보는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유는 다르다. 출전권이 최고의 경기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PGA의 존재 이유, 텔로스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골프계는 타이거 우즈를 통해 프로 골프 리그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텔로스에 대한 합의에 이르렀다. 프로 리그는 유부남이면서 120명과 잤다는 한 인간의 모럴 해저드보다는 시청률과 입장권이 반토막나고, 대회 스폰서가 떨어져 나가는 산업의 몰락을 더 두려워했고, 산업과 산업을 지탱하는 팬들은 1등의 부재를 단 6개월도 지탱하지 못했다.

따라서, 타이거 우즈에 대한 진짜 비난은 그가 그러한 자격을 부여받고도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준다는’는 가치를 실현하지 못했을 때 터져나왔고, 그동안의 모든 악재를 감내했던 질레트는 마침내 재계약 중단을 통보했다. 제대로 수염을 깎지 않고, 더부룩한 상태로 경기에 출전했을 때 타이거 우즈는 질레트 스폰의 텔로스를 깨트렸기 때문이다.

2.
2008년 LPGA 협회는 ‘효과적 영어 커뮤니케이션은 LPGA의 사업과 선수들의 성공을 위해 아주 중요하다’며 영어 사용 의무화 방침을 내세웠다. 심지어 협회가 요구하는 영어 수준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투어 참가자격이 정지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출전 기회 불평등을 수정하는 것과 타고난 재능 불평등을 수정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어떤 국가의 선수가 다른 국가의 선수에 비해 우수하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면, 그 우수한 선수들에게 영어 사용 의무라도 강요해야 하는가? LPGA의 비즈니스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재능있는 선수를 가진 국가의 언어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10년, LGPA의 한국 선수의 활약은 여전히 눈부셨다. 2010년 12월 롤렉스 랭킹 기준 Top 500중 139명, Top 100중 36명, Top 10중 5명이 한국인이다. 나머지 둘은 아시아인인 일본의 미야자또 아이와 대만의 청 야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선수는 노르웨이의 수잔 페테르슨. 영어를 네이티브로 구사하는 미국 선수는 크리스티 커와 그나마 한국계인 미쉘 위 뿐이다.

롤스의 정의론을 되돌아보며 LPGA 협회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본다. 롤스는 강제로 평등을 달성하는 일을 능력 위주 시장사회를 대체할 대안으로 보지 않는다. 그의 대안은 차등 원칙이다. 재능있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으면서 재능과 소질의 불공정한 분배를 바로잡는다. 재능 있는 (한국) 선수들을 격려해 그 재능을 개발하고 이용하게 하되, 그 재능으로 시장에서 거둬들인 대가는 공동체 전체에게 돌아가게 하라. 가장 우수한 선수에게 족쇄를 채우지 말고, 최선을 다해 경기하게 하라. 단, 우승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재능이 부족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점을 미리 알려 준다. 이미, 지애와 나연이 KLPGA 챔피언쉽에서 모든 상금을 다 기부함으로써 실행했듯이.

3.
커트 보네거트의 단편 < 해리슨 버거론>을 패러디한 <2010 프로골프 리그 결산론>은 균등한 플레이에 대한 근심을 반유토피아로 묘사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해는 2010년이었다. 모든 선수가 마침내 평등해졌다. (…)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치지 않았다. 더 가까이 핀에 붙이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더 낮은 타수를 치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하거나 우수하지 않았다.”

오초아의 돌연한 은퇴와 함께 마지막 여제가 떠난 자리, LPGA의 다승왕과 상금왕, 롤렉스 랭킹 1위는 각각 다른 선수들에게 분배되었다. 미야자또 아이는 5승으로 다승왕을 챙겼고, 상금왕은 180만 달러를 얻은 최나연에게 돌아갔다. 2010년 12월 현재 롤렉스 랭킹 1위는 642.3 포인트를 얻은 신지애다. 22개의 경기가 치뤄진 2010년 KLPGA에서 생애 첫 승을 거둔 선수가 무려 8명. 이 중, 2009년의 트로이카로 꼽혔던, 서희경/김하늘/유소연의 이름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없는 선수 중 하나로 꼽는 짐 퓨릭이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 PGA는 아예 끔찍했고, KPGA는 탑랭커들조차 스폰서를 구하기 힘든 존재감 결핍의 차디찬 스토브리그를 보내고 있다. 춘추 전국 시대, 혹은 균등 플레이의 악몽.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전반적으로 참 재미없었던 한 해. 송희군은 결국 1승을 못 챙겼고, 난 95타의 라베를 깨지 못했다.

Messaging Fragmentation

바이버로 통화한 후배의 바이버 개통 소감 멘션을 크롬버드 노티창으로 받아 티월드에 접속해 웹SMS로 답변을 했다. 내 블로그 코멘트를 남긴 분들께 트위터 멘션으로 답글을 달기도 한다. 문자로 초대받은 모임 후기를 멘션으로 날린다. 페북 친구(Bejeweled 점수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이들) 하나는 회사 메신저로 말을 걸어와 요새 왜 이리 달리냔다. 심야 트위터에 심취하던 날 소재가 파악된 나는 야밤에 엄한 곳에서 등덜미를 잡히고야 만다.

이상한 나라에서나 할 법한 이상한 소통. 개인적으로 올해 가장 적응 못했던 환경 변화는 급확장된 커뮤니케이션 채널이다. 데스티네이션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데, 그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경우의 선’은 쉴틈없이 늘었다. 그 선이 또 다른 데스티네이션을 발견해 주어, 누군가에겐 사상 최대 인맥 확장의 해였다고도 한다. 살짜쿵 간만 봤던 나조차 조금은 새로운 인연들에 엮이거나 과거의 잊혀진 관계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했으니, 고작 버튼 클릭 한 번으로 이어지는 디지털의 선이 어디쯤 두어야 할 지 모르겠는 관계의 형태로 바뀌는 과정에 현기증이 없었을 리 없다.

트위터 DM으로 제안된 벙개 메시지를 놓쳐 몇 번의 모임에 불참해, 스산한 왕따 어린이가 되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소녀처럼 멘션과 DM의 의미를 정립 못했다. 계정만 열어놓고 테스트용으로만 쓰던 트위터에 어느 날 답변 못한 멘션과 DM이 썩어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래기도 했다. 혹시 내가 상대방에 커뮤니케이션 기대감에 흠집을 낸 것은 아닐까, 라는 지극히 구시대적 예의 문제를 고민했다. 남들 다 보게 멘션과 리플로 모임을 소집한다는 것은 문화적 충격 앞에 버벅버벅 동참했지만, 그 때 난 딱 눈 감으면 튓 베어간다는 삐까뻔쩍 트위터 역 앞에 난생 첨 보따리 하나 들고 어리버리 기웃거리는 시골 촌년이었다.

페북은 또 어떤가? 엊그젠 불나게 비주얼드 하다가 누군가 나에게 Chat 걸어 온 것을 뒤늦게야 발견하고 메시지창의 off된 아이디를 향해 조아려 사죄했다. 디폴트 OFF 설정인데, 딱히 손댄 것도 없다만…(설정 옵션으로 치자면, 이미 자포자기한 사이트 한 두개 아이 아님) 거침없이 친구를 수락하다가, 어느 순간 밀려드는 친구 요청에 깜놀해 어느 순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뤄둔 신청만 171개. 알면 알 것도 같고, 한 두 다리 건너면 분명히 알 것 같지만…사실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 그들의 출몰은 나아가 그들과의 관계 맺음은 디지털의 축복일까 재앙일까. 그나마 수락한 친구들의 메시지들이란 게 온통 뜻모를 행사와 이벤트 초대장인데, 끊으면 그만일 명쾌한 관계이거늘. 대체 어디서 끊는거니. 이렇게 한 개 한 개씩 밖에 못 끊는거니? 귀차니즘을 넘어선 규우차니즘 ….규찮혀…규찬타구…

정작 지난 가을엔 어떤 한 특정한 사람을 찾으려고, 그 친구 찾을 방법은 네이트온 밖에 없기에 줄기차게 접속했지만, 사라진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고. 심지어 동생 핸폰을 내 명의로 등록하는 과정에 계정이 꼬이면서, 지금은 네이트온 접속하면 친구는 0명이고, 네이트온에서 친구들에게 날린 SMS는 죄다 동생 번호로 날라갔으니. 엄한 답문자 받은 동생은 황당해 하고. 회사에서 막힌 MS 메신저는 하도 안 쓰다 보니 라이브 비번이 가물거리고. 지난 몇 년간 축적한 고귀한 소셜 그래프는 이렇게도 무너지는데, Chatroulette같은 전지구적 황당 만남은 ‘Scan’버튼 클릭 한 번으로 언제 어디서든 가능하다. 여기서 쏟아지는 메시지야말로…ha.

어떤 사람에게 할 말이 생겼을 때 선택의 플로우차트는 더욱 복잡해졌다. DM이냐 멘션이냐 SMS이냐 담벼락이냐 미투냐 코멘트냐 메일이냐 메신저냐 대놓고 전화냐…이것이 문제로오다. 햄릿은 고작 두 가지 옵션을 두고도 실존적 고민에 긴긴 밤 지새웠는데, 누군가에게 할 말이 있을 때마다 이런 선택의 교차로에 서야 한다니. 휩쓰는 토네이도는 아니지만 싸락눈처럼 나도 모르게 조금씩 누적되는 피로감이다. 대상의 활동 영역은? 메시지에 적합한 인터페이스는? 공개 수위는? 답변 필요성은? 답변 강제성은? 답변의 실시간성은? 지금이야 어느 길목을 지키고 서야 그의 메시지를 포획할 수 있을지 인간의 감으로 판단하지만, 좀 이따가는 또 다들 Presence 획득에 열을 올리게 될꺼나.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 하셨지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기도 하다. 누군가 산산히 흩어진 내 메시지들을 한 바구니에 담아, 꿈에도 그리던 통일을 이뤄줄까. Facebook Message가 출사표를 던지긴 했다만, 보나마나 홀 투성이겠지. 하지만 사실 그건,,, 채널의 갯수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멘션에 웹 SMS로 답하기까지의 간극엔 분명히 내 문화 경제 심리적 상태가 개입되어 있다. 혼란은 다채널의 일방적 강요가 아니라 내 선택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뻔한 사실을 덮고 싶을 뿐.

Fragmentation은 골치아픈 문제다. 그리하여, 파편화되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선택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 지에 대한 제법 그럴듯한 히스토그램을 그려준다. 거기서 그 말을 하는 이유. 여기서 이 말을 하지 않는 이유. 첫 눈 오던 날 집 앞까지 뛰어와 이름을 불러야 얼굴을 봤던…닿을 방법이 없으므로, 닿음에의 노력이 더욱 간절했던 때를 그리워 하고 있다고 여기에 쓰고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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