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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끝, 줄리언 반스

굶주린 상태가 되어 허겁지겁 줄리언 반스를 두 권 연거푸 읽어치웠다. 소설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에세이라 분류될 수 있을 <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주린 배에 제대로 씹지도 않은 쌀밥을 우겨넣듯, 음미보다는 정신줄 놓은 폭식이었다. 예상치 못한 허기가 치솟아 의자에 박혀있는 쇠못이라도 뽑아 씹어먹을 지경이었다.

<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 내 말 좀 들어봐> 을 까마득히 오래 전에 책장에 꼽아놓고도, 결국 펼치지 못했던 줄리언 반스와 2014년 6월의 끝자락에 마침내 이렇게 급만남했다. 다 읽고 나서는 묘한 당혹감이 드리운다. 이런 날 책을 읽다니…이 좋은 날을. 놀러나 가지. 차라리 쌓인 일을 치우던가.

반스가 나빴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그보다는 날이 너무 좋았다. 1년 중 해질 무렵이 이렇게까지 좋은 때는 얼마 되지 않는다. 누리지 않음이 무책임이라고 해야 할 정도의 날이었다. 그런데도 기아는 그 어떤 조건에서도 생존을 최우선한다. 정서의 기아도 마찬가지다.

줄리언 반스.

영국 소설이 썩 맞지 않는다.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역시….부커상 수상에 대단한 반전 소설 베스트 셀러로 꼽히나보다. 그런데 나에겐 묘하게 코드가 맞지 않았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까지 왜 이리 저 멀리 에둘러야 하는 것인가. 나의 지적 능력도 심하게 의심받는 느낌이었다.

결정적으로 난 반전이라는 장치가 대체로 참 별로다. 한 방의 역전을 위한 기나긴 설정들? 왜??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거길래. 기억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 뭐 그건 기본 상식 아니였어. 췟.

한편으론 번역체. 정서가 고팠던 나에게 이 번역체는 쥐약이었다. 아름답게 쓰여진 모국어가 그리워졌다. 번역 작가는 자기가 무슨 말을 옮기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했던걸까.

<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책을 펼치고 첫 장부터 이건 완전한 사기라고 생각했다. 저 제목말이다. 기구 매니아들의 무용담을 펼쳐놓는 도입부에선 사랑은 커녕 사랑의 냄새도 맡을 수가 없다. 원제는 Levels of LIfe. 그것 또한 모르겠다.

책을 던져버릴까 계속 읽을까 무지 고심하며 꾸역꾸역 책장을 넘겨갔는데.

100페이지쯤…제 3부 부터, 내가 읽고 싶었던 바로 그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래 난 이게 읽고 싶었다. 근데, 이 책 돈 주고 사서 읽은 사람들은 다 이거 읽고 싶었던 거 아니겠음??? 아내를 잃은 줄리언 반스의 비통한 고백.

이건 마치 전혀 상관없는 두 개의 책을 붙여놓은 것처럼. 솔직히 앞의 100페이지는 읽을 맘도 없고, 읽을 수도 없었다. 무지막지한 정보량도 그렇거니와 대체 이 정보들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가늠도 안되고…그저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었는데.

100페이지 3부. 그로부터 약 100 페이지를 읽는 동안 점점 난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내가 사랑하는 그 곳으로. 오늘 같은 날 가고 싶었던 곳이다.

그래서 정말 오랫만에 술도 한 병 딸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술을 딸까도 고민도 많이했는데, 결국은 와인으로다가. 냉장고에 넣어둔 차디찬 와인은 뒷향따윈 전혀 없어 목으로 바로 넘어가는 도수 낮은 소주같았다. 왜 땄니…ㅎㅎㅎ

그래 이거지.

매우 집중해서 읽었고, 읽는 내내 조앤 디디온의 < 상실(The Year of Magical Thinking)> 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수많은 포인트가 조앤 디디온과 정확히 조응했다. “이것은 극복할 수 없다”

사람이 이래. 고통에서조차 순도를 바라지. 소비의 대상이 가짜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간단히 말해서, 본전 생각. 책값, 시간, 들인 내 마음보다는 더 값나가는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

그들의 결론은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줄리언 반스는 이 책을 아내를 잃은 지 꼭 5년만에 냈다. 5년이라니…세상에. 말도 안돼. 그리고 그게 앞으로 10년, 20년이 될 수도 있다니. 그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가 세상에 있을까. 하지만, 완벽한 상실의 지옥도 못가는 좀비의 연옥은 누가 어떻게 풀어내 줄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지상과 지옥 사이를 떠돌며 아직도 지가 죽은 줄 모르고 지상의 해피엔딩을 꿈꾸는 원혼은.

책을 덮고 나니 세상은 다시 어둠이었다. 낮게 날던 비행기 소리도, 실용음악학원의 뚱땅거리던 피아노 소리도, 놀이터 아이들의 깔깔거림도 모두 잦아들었다. 나를 조기퇴근시키고야 만 그 아름다웠던 해질녘의 풍경도…

<나는 찍는다 스마트폰으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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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es24.com/24/Goods/11935043?Acode=101

경 축! 빰빠라라밤…

내가 쓴 한창민 작가의 < 나는 찍는다 스마트폰으로> 리뷰가 YES24 주간 우수작에 선정이 되었당!
좋은 책을 읽고 그냥 느낀대로만 발로 끼적끼적 썼을 뿐인데, 이런 경사가 ㅋㅋㅋ (으쓱으쓱)

오랜 벗이 낸 멋진 책에 한 마디를 얹을 수 있고,
그 한 마디가 또 작지만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 선순환의 주고받음이 기쁘고
상품으로 YES 24 상품권 3만원을 받아서 더 기쁘다.
글써서 돈 벌 때가 젤로 기분이 좋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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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런 사진책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사진을 펼쳐놓고 편하게 얘기하는 듯 하지만, 섬세하게 세공한 듯 편집된 사진이며 말이며 작가가 뿜어내는 감각의 내공은 전혀 평범하지 않다. 그런데, 그 감각이 스마트폰이라는 열악한 사진 장비를 만나, 비루한 일상의 순간을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찰나의 순간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 드라마틱했다.

거창한 출사도, 고가의 장비도 없이, 그 흔한 라이트룸과 스트로보 하나 없이, 달랑 스마트폰 하나를 들고, 이런 멋진 순간들을 포착해 내다니. 대체 어떻게?!! 평소에 인스타그램에서 작가의 사진을 보며, 어떤 눈을 가졌기에, 무슨 비법을 숨기고 있기에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그 비밀을 조금은 엿본 느낌이다. 하지만, 알아도 따라하지 못하는 게 전략이라 했던가. 비법을 전수를 받고 나니 오히려 숙제가 더욱 어려워진다.

옛날식 고무 다라에 놓인 흰 플라스틱 대야를 찍어놓고 ‘다라이_달아이’라고 이름 붙인 센스며, 낭창하게 흐드러진 장미를 여왕폐하라 부르며 제멋대로 사진 찍기를 허락받는 능청스러움, 철거를 앞둔 빈집을 다시 찾아 무력함과 덧없음에 비감을 느끼는 작가의 다채로운 성정에 매료된다.

콩국수에 방울토마토를 얹어 ‘콩국수_마우스’라며 찍어놓고 ‘국물까지 다 들이마시고 방울 토마토로 입가심을 하니 깔끔했다.’는 마무리에서 어느 무더운 여름날, 북촌을 쏘다니며 제 철의 맛과 멋을 누리는 느긋한 한량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SNS 예찬에 이르면 문득 시간을 뛰어 최첨단의 ‘지금’을 달리기도 한다.

풀떼기를 찍어놓고 대뜸 추사의 향조암란에 헌정한다거나 성탄 전야에 카페에 혼자 앉아있는 흑인 남자에게서 에드워드 호퍼를 짚어내는 자유분방한 연상. 북촌의 평범한 담벼락과 배치한 오규원의 시와 소설가 윤후명, 영화감독 허진호 등 문화 예술계 인사들과의 인연, 자타가 공인하는 문화 사랑방 ‘평화만들기’의 유혜심 대표가 걸어둔 ‘각선_미인’을 틈만 나면 카페의 남자 손님들이 달라고 떼쓴다는 에피소드 등. 평범하다는 남자가 무심히 풀어놓는 이야기에는 전방위 문화 예술 코드가 숨가쁘게 쏟아진다. 그런데도, 스마트폰만 들고 있으면 나도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는 여전히 평범한 일상인으로 말한다. 힘주어 거창하거나 인상쓰며 심각하지 않다. 크롭된 사진의 화질에 안타까워 하면서도, 그래도 찍길 잘했다며 스스로를 달래는 수수한 낙관이나, 잘 모르는 것은 모른다며 좀 더 배워야겠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대목에서 그와 내가 그렇게 다르지만도 않음을 실감한다. 우연히 찍힌 걸인과 다음에 만나면 소주 한 잔 걸치며 인생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말에는 마음에 오래 배인 다정함이 묻어난다. 책 곳곳이 그렇다.

그렇게 다정하게 다가와 슬그머니 어깨를 두드리며 사진을 찍어보라고, 또 뽑아보라고 부추킨다. 예술가의 드높은 자의식이 아닌, 한 세상을 같이 살아 가는 동시대인의 언어로 꼬득인다. 우리, 거창하지 않게 ‘일상의 예술’을 해 보자고. 내 눈과 마음만 열어 두면, 날마다의 일상이 예술이 되고, 또 그 예술이 일상이 되는 거라고.

스마트폰 사진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깃발을 꼽은 라이징 스타의 작품집으로 읽어도 재미있고, 스마트폰 사진찍기의 따라하기식 교본으로 활용해도 유용하고. 사진 쌩초보이자 똑딱이조차 거부했던 귀차니스트 중년 남자의 인생 후반 반전 스토리로 읽어도 흥미진진하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피카소의 그림같은 정체불명의 입체감이 이 책의 매력이다. 오래 옆에 두고, 그 중 하나씩을 뽑아 새로운 책으로 다시 독해해가는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에게 이 책은 이태준의 < 무서록>, 김용준의 < 근원수필>을 잇는, 고전적 아취가 듬뿍 묻어나는 한 폭의 사진 수필로 읽힌다. 세상사는 멋과 풍류도 알고, 인간사의 이모저모를 꿰뚫어 보면서도 그저 껄껄껄 웃고 마는 눈 밝은 한 사내가 붓 대신 스마트폰을 들고, 난 대신 세상을 쳤다.

그 결과는 수묵의 담박함과는 거리가 먼, 세상 온갖 것들이 제멋대로 뒤섞여 뛰노는 요지경 난장이지만, 스마트폰 하나로 세심히 풍경들을 건져올린 사내의 글과 그림에는 빠르고 거칠게 달려가는 요즘 세상에서 맡기 힘든 그윽한 난향이 풍겨난다.

1Q84 – 하루키의 대작에 임하여

1Q84

3권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 나도 모르게 짐승의 신음 비슷한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끄어어어….끄어어어…하루끼씨…”

정말 오랫만에 집중해서, ‘장편 소설’이란 걸 읽었다. 연말과 연초의 잉여로운 시간들을 바쳐. 한 해를 마무리할 호젓한 돌이킴의 시간도, 나름 한 해의 top 10을 뽑아보던 관례도, 지인들에게 보낼 인사 메시지도 제끼고 각기 700페이지 내외를 육박하는 세 권의 1Q84 세상에 매립되어 현실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 한 해를 여는 재야의 종소리가 울리던 그 순간에도, 난 마치 우시카와라도 된 양 교차되는 덴고와 아오야메를 일거수 일투족 스토킹하며, 그들과 함께 두 개의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열광은 신년의 해가 밝아 2권이 중반을 넘기고, 신비로운 소녀를 인터페이스로한 텔레딜도닉스(달리 무어라 표현하겠는가!)의 클라이맥스가 지난 후 꺼져가는 모닥불처럼 점점 잦아들었다.

새로이 우시카와 편이 합류한 3편은 이건 아니겠지, 이건 아닐꺼야….여러 개의 설마들이 챕터의 끝마다 줄을 서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다음 챕터를 이어 받았다. 넘겨도 넘겨도 설마들은 줄은 길어져만 갔고, 난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야들여야 하는 지에 대해 혼란에 빠진 채로, 3편 후반 대부분 페이지를 넘겨야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아주 오랜만에 집중해서 읽어낸 소설의 예상했던 헛헛한 마무리에 멘탈에 금이 가버리고 만 거다. 부디, 이런 소설이 아니기를 바랬다.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기를 바랬듯이.

1Q84라는 설정은 절묘하다. 하루키는 거대한 세계를 만들었다.

한 줄 한 줄 질 좋은 실을 뽑아, 섬세하게 잇고 겹쳐 옷감을 짜내듯 고급스런 비유들을 이어 문장을 만들고, 문장들이 모여 믿을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믿을 수 있도록 표현해 낸다. 마치 허공 속에서 실을 뽑는 소설 속 공기 번데기와 같은 문장들. 챕터 1 야냐체크의 신포니에타가 흐르는 앞뒤로 꽉 막힌 수도 고속도로에서 난 이미 1Q84행 버스에 올라타 있었다.

가장 신선했던 것은 이 새로운 세계가 현실계와 완전히 분리된 미지의 영역이 아닌, 이 세계에 교묘하게 병행하면서도 미묘하게 틀어져 있는 겹쳐진 세계라는 점이다.

1Q84는 토끼의 인도를 따라 간 앨리스가 나무 구멍으로 들어가 만난 이상한 나라, 회오리 바람에 집과 함께 휩쓸려가 도착하게 된 오즈라는 미지의 세상, 옷장을 열었을 때 펼쳐지는 판타지 나디아가 아니다. 수도 고속도로의 비상계단을 내려갔을 때, 도쿄의 도심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똑같이 펼쳐져 있다. 너무나 똑같아서, 주인공들조차 자신이 이상한 나라로 이동되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헨젤과 그레텔에게 남겨진 작은 과자 조각처럼 던져지는 작은 단서들을 통해서 이 세계가 변질되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갈 뿐.

멋진 설정이다. 변함없는 현실 속에 있지만 현실과는 다른 또 다른 세계가 겹쳐져 있다는 것. 그 겹쳐진 세계를 정상인 세계의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세계를 헤쳐나간다는 것. 아오마메를 내려준 택시기사는 경고한다. “현실은 언제든 단 하나 밖에 없어요” 하지만, 1Q84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의 현실이 무엇인지를 직접 찾아내야 한다. 바늘로 찌르면 붉은 피가 나는지 스스로 확인해 가면서. 그리고, 하루키의 성실한 문장은 그 이상한 세계를 무리없이 납득하게 한다. 두 개의 달이 뜨고, 리틀 피플들이 날뛰며 공기 번데기를 지어내는 기묘한 세계를.

예상을 비트는 드라마틱한 전개, 하루키의 새로운 모습을 보다.

그러고 보니 하루키의 장편을 많이 읽지는 않았구나. 그래도, 그 어떤 전작에 이렇게 흥미진진한 전개가 있었을까 싶다. 재미만점의 영화 곳곳에 포진된 반전들처럼, 자극적인 상황들이 총알처럼 날라와 아드레날린 폭탄을 터트린다. 특히, 1편에서 덴고가 공기번데기의 개작에 참여하게 되기까지의 전개와 아오야메와 노부인의 은밀한 동맹의 과정. 그리고 선구의 역사와 산산조각난 다마루의 셰퍼드, 사라진 츠바사까지…숨쉴틈 없는 사건사고들이 이야기에 몰입시키며, 진행되는 상황들의 배경과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지 않고는 못배기게 만든다.

하루키하면 항상, 옅은 회색톤이 드리워져 있지만,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조용히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뭔가를 놓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묘한 감정선을 따르는 분위기 있는 전개를 떠올렸다. 극적인 반전이나 숨막히는 전개, 허를 찌르는 답변을 휘두르며 상황을 쥐락펴락하는 인물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런데, 1Q84에서는 오히려 이런 흥미진진을 프로페셔널하게 구사하는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하루키를 봤다. 울퉁불퉁 격한 이야기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시 이어 붙여가며, 사람들을 몰입시키는 솜씨가 대단하다. 1권과 2권의 중반까지는 계속 그랬고, 후반에서는 특히 고양이 마을의 젊은 간호사가 공기 번데기의 도터를 언급하는 장면(3. 208p)의 기묘한 섬뜩함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오감을 자극하는 비유의 향연. 작가수업으로 참고해도 좋을 만한 비유의 총망라. 하지만…

한밤중의 악마처럼 뜨겁고 진한 커피가 그녀의 취향이다. (1-180p)
고마쓰는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는 열리는 일 없는 서랍의 깊숙한 곳에서 끄집어낸 듯한 웃음이었다. (1-39p)
지나치게 가까워져서 자칫 깊숙하게 엮인 참에 발밑의 사다리를 쓰윽 가져가버린다면 그건 정말 못 견딜 일이다. (1-369p)

소파에 자리를 잡고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내장이 뽑혀나간 생물의 한숨처럼 공허하게 들렸다. (2-169p)
다마루는 잠시 침묵했다. 모래주머니처럼 무거운 침묵이었다. (2-72p)
덴고는 손 안에 남겨진 죽은 수화기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농부가 해가 쨍쨍한 날에 타들어간 야채를 집어들고 바라보듯이. (2-168p)

그의 묘사력은 극에 달한 것 같다. 최고의 해상력이다. 오즈나 나디아같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라면 오히려 쉬울 것이다. 하지만, 겉모습은 현실계와 동일한데 동시에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동되어 버린 세계의 미묘한 차이를 눈에 베일듯 예리하게 그려내어 믿게 한다는 것.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도전이었을 거다. 그리고, 그 도전은 성공했다.

변함없는 그의 장기. 이 샘솟는 비유들은 대체 어디서 튀어오는 것일까? 이 수 천 페이지를 어쩌면 이렇게 한결같이 그토록 다채롭고도 적확한 비유로 채워낼 수 있단 말인가. 하루키씨를 위한 별도의 비유 수집팀이라도 가동되는 것인가. 밤마다 비유 요정들이 나타나 낮동안 긁어모은 비유 꾸러미라도 던져주고 가는 것인가. 이 책은, 소설로서의 가치와 별개로 작가 지망생을 위한 비유법 사전, 비유법 레퍼런스로 사용되어야 할 것 같다.

거듭 감탄한다…또 감탄한다. 하지만 이윽고 무감해지고, 나중에가서는 심지어 피곤해진다. 과함때문이다. 굳이 비유를 쓰지 않고 담백하게 넘어가도 좋을 것 같은 상황까지도 굳이 장식을 달고 마는 그의 한없는 성실함? 완벽주의? 넘치는 재능? 때문이다. 때로는 몰입에 흐름이 깨지는 느낌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소설의 상황과 비유를 순환해야 하는 인지적 피곤함도 누적되었다.

예컨대, 우시카와의 이상한 생김을 이해하기 위해서, 갑자기 설탕항아리 속의 지네까지 순간 이동해 갔다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인지의 일탈이 하루키 소설을 읽는 고유한 재미이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전개가 무뎌질 때 쏟아지는 비유는 오히려 인지의 교란이 되고 만다. 극의 전개가 덤덤해져가는 3권에서는, 마음 속으로 여러 번 *감히* 하루키씨의 빨간 펜 선생님이 되는 것을 상상했을 정도다. 이런 부분은 쫌 그냥 넘어가자구요… 응?? 자꾸 그러면 왠지 신의 물방울스러워진단 말이예요.

많은 사람들이 하루키처럼 말한다. 그리고, 모두 다 지나치게 촉이 좋다. 아무도 틀리지 않는다.

노부인의 집을 지키는 시큐리티는 비트겐슈타인을 인용한다. “직감에 대해 나는 경의를 표하지…하지만 일단 자아가 이 세계에 태어난다면, 윤리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밖에 없어.” (3-275p) 치매 아버지가 입원한 시골 병원의 담당 의사는 아버지의 증세를 이렇게 진단한다. “급격하달 건 없지만, 방금 말한 대로 생명력의 수위는 조금씩, 하지만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어요. 마치 열차가 조금씩 속도를 늦추며 정지를 향할 때처럼.” (2-536p)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간호사는 언어는 이렇다. “얼굴이 무척 편안했어. 뭐랄까. 가을 끝 무렵에 바람도 없는데 나뭇잎이 한 장 떨어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 (3-522p)

안전담당 어깨의 비트겐슈타인과 저 캐캐묵은 시골 의사와 간호사의 고급 비유라…뭔가 어색하다. 소설 속 인물들이 다들 이런 식이다. 모두들 지나치게 세련된 언어를 쓴다. 뭔가를 표현할 때는 비유를 달기 좋아하는 비유법의 달인들이다. 각자의 삶의 이력을 가지고 그 이력에서 만들어진 자신만의 언어로 발화하는 개별적 존재라기 보다는, 꼭 한 사람의 여러 버전처럼 느껴진단 말이다.

아오마메가 천신만고 끝에 조우하게 된 리더의 언어도 그렇다. 그 미스테리한 베일 뒤의 리더 마저도 등장하자마자 주저리 주저리 아오마메를 분석한다. 물론, 당연히 현란한 비유의 향연을 펼치며. “…정확히 말하자면 가톨릭 교회는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지동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 자네도 마찬가지야. 지금까지 오랫동안 몸에 걸쳐온 단단한 방어의 갑옷을 벗어던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어…” 지나치게 많은 말과 말 속의 깨알같은 비유들. 그렇다고 언어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리더에게 기대했던 압도적인 존재감은 희석된다. 더불어, 이야기의 핵을 단단히 붙들고 있던 리더가 자아냈던 긴장감도 함께. 최소한 리더란 사람은 저런 수도꼭지는 아니어야 하지 않아! 당최 없어보여서… ㅠ

게다가 등장 인물들 모두 촉이 어찌나들 좋은신지. 별 구체적 정황이 없음에도 아오야메와 덴고는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그가 다시 나타날 것을 믿고, 그도 1Q84에 있음을 느끼고, 그를 다시 찾게 될 것을 안다. 다마루는 우시키와를 추리해 내고, 우시키와 역시 덴고와 아오마메의 정황을 짚어낸다. 그 외에 여러 가지 것들을 여러 사람들이 다 미리 알거나 예감한다.

이들에겐 쉬운 일이다.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우연히도 그냥 그렇다는 느낌이 그냥 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해 내고, 이런 상상은 어긋나는 법이 없다. 그리고 다들 그 전제가 어긋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행동한다. 모두가 미래를 비추는 수정 구슬 하나라도 숨겨놓고 있는 듯,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야기한다. 아예 예지 능력을 사전 탑재한 후카에리는 말할 것도 없다. 여기저기서 너도 나도 모두 다 같이 번득이는 오컴의 면도날은 맨밥에 들이붓는 맹물처럼 이야기를 싱겁게 만든다.

리틀 피플은 위협적이지 않다.

호이호이를 외치며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와 공기에서 실을 뽑는 리틀 피플은 여지없이 <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움파룸파족을 떠올리게 한다. 위험하다기 보다는, 귀엽고 깜찍해 보인다. 그들에게 위협과 추격을 당하는 이들의 긴장과 공포는 그토록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데, 정작 공포의 핵심인 그들은 존재감 희미하다.

하나이며 거대한 지배자인 빅 브라더의 대립항으로 우리의 일상에 물처럼 스며들어 지배하는 작은 존재들인 리틀 피플은 개념적으로는 흥미롭지만, 그들이 선구를 접수하고 그 모든 위험한 사건들의 배후라는 것은 어쩐지 연결이 안된다. 오히려 소설에 등장하기 전, 공기 번데기라는 소설의 등장 인물 상태로, 상상의 베일 뒤에 숨어있는 리틀 피플이 더 신비롭고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리틀 피플은 하루키의 소설에서 잘 보지 못했던 ‘명백히 타도해야 할 적’으로 규정된다. 이 적을 향해 아오야메와 덴고, 후카에리 등은 자신이 가진 것을 총동원해 맞서 싸운다. 물론 그 실체가 알고 보니, 그다지 일방적으로 나무랄 수만은 없는 상대적 악이었다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악의 악성은 그려져야 하지 않은가. 리더를 움직이고, 그 많은 이들을 덜덜덜 떨게 하는 악의 발현 과정도. 나에게 리틀 피플은 선구나 그 외 어떤 사건과도 무관한, 그저 어딘가 동떨어져 공기 인형을 자아내는 동화 속 일곱 난장이처럼 느껴져서 실패였다.

운명적 첫 사랑의 신화

이게 3부에서 가장 나를 괴롭혔던 부분인데…뭐 다 그렇다 치고. 다른 건 뭐 넘어갈 수 있다 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과 접신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2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이 장대한 소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놀라운 비유의 향연도, 1Q84라는 세계의 조성도, 자신의 한계를 끌어안고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있는 인물들도 모두 모래성에 불과하다.

그것은 운명적 첫사랑, 그리고 그 사람과의 절대적 교감에 대한 믿음이다. 아오야메와 덴고. 이런 저런 사정들이 있었으나, 초딩 때 교실에서 손 한 번 잡은 것 만으로 낙인찍혀 이후의 인생이 결정되고, 다른 사랑 따윈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굳이 찾으려 하지는 않지만, 두 사람이 항시 연결되어 있음을 그리고 언젠가 운명처럼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라. 1Q84는 결국 그 둘을 다시 만나게 하기 위한 거대한 장치같은 것에 불과했다는 느낌이 들만큼, 소설은 이 오그라드는 전제를 근간에 두고 있다.

근데, 이게 믿기냐? 솔직히 이거 너무 향그러운 순정만화틱하지 않냐고. 근데 이걸 안 받아들이면, 이 소설은 아무 것도 아니야. 어찌보면, 그냥 거대한 비유법 사전이야. 근데 난 못 믿겠다고… 제발 이게 아니라고 말해줘. 이런 대작의 스케일에 걸맞는 인간과 삶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이 있다고 말해줘.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니어도 좋지만, 분량으로만 치면 까라마조프에 맞먹지 않냐며 나는 울부짖는다.

그게 아니라면, 난 뭐한 거냐고. 그 귀한 연말과 연초를 바쳐 난 뭘 읽은 거냐고. 질문은 그저 책갈피 사이 언어의 계곡을 공허하게 메아리칠 뿐이었고, 이윽고 밀려오는 허무함에 그만 난 책장을 덮고 짐승의 신음 소리를 내게 되고야 만 것이다.

소설 속 문장처럼 하나의 사물은 하나의 시간에 하나의 장소에만 존재하는데. 그것을 심지어 아인슈타인이 증명했다는데. 나의 시간과 장소는 무엇을 위해 바쳐진 거냐며. 일본 소설 읽을 때마다 귀결되고마는 ‘펀더멘탈이 안 따르는 과도한 장식의 헛헛함’을 남도 아닌 하루키에게서 느낄 줄이야. 아휴…얼마만에 읽은 기나긴 소설인데. 물론 1권~ 2권 반까지의 오버도스만으로도 책값은 넘치게 뽑았다지만.

하루키씨 4권을 쓰고 있다는 썰이 있던데, 읽게 될지 모르겠다. 읽게 되겠지. ㅠㅠ난 하루키 호갱님이니깐요! …라고 하기엔 지난 날 하루끼 서비스는 참으로 훌륭했다. 1Q84도 이상한 소설은 아니고. 하루키의 대작이라는 점에 너무 기대가 높았던 거지. 1권 456p 노부인의 DNA론같은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간간히 이런 사고를 접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보석같은 시간이었는데. 여하간 나이든 여자란 뭘 갖다 바쳐도 피곤하게 구는 법이다. 내가 날 서빙해도, 내 비위는 못 맞추겠다…라는 요상한 결론으로 ㅋㅋㅋ

잊혀지지 않는 문장이 있다. 2권에 나오는 치매 아버지의 대사. 비유법 같은 것 없는 직구여서 더욱 깊게 꽂힌다. “설명을 안 해주면 그걸 모른다는 건, 말하자면 아무리 설명해줘도 모른다는 거야.” 알겠니? 이 빙신아. < - 단 일곱 자를 덧붙여, 이 멋진 문장을 이토록 저질스럽게 승화시킬 수도 있다는 거. 하루키상, 스미마셍! ㅎㅎㅎㅎㅎㅎㅎ

물론, 나에게 하루키씨의 가장 매력적인 컨텐츠는 하루키씨 그 자체다. 그래서, 나에겐 거대한 1Q84보다는 잡스러운 < 하루키 잡문집>이 여전히 가장 좋다.

잊지 못할 첫사랑 따위,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같은 달을 보며 그리워 하고 있다는 것 따위! 그 달이 하나든 두 개든!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 과잉 희망의 해독제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벼랑의 끝에 선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 탈출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가끔 어떤 사람들은 글을 통해 그 순간의 실상을 중계한다. 펜을 드는 건, 탈출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자각할 무렵이다. 그 순간 감았던 눈이 뜨이듯, 새롭게 인식되는 세계에 대해 그들은 쓴다.

놀라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절망보다는 희망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희망이라는 몰핀에 기꺼이 영혼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만이 그런 순간에조차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요지의 글만이 출판이라는 사회적 시스템을 통해 선별 및 전파되어 모든 인간이 처할 궁극의 패배에 대하여 잠시나마 납득하게 하는 순기능을 하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난 6월 26일, 노라 애프론 여사가 사망했다. 그녀의 이름에 바로 붙어 따로오는 두 개의 단어가 있다. ‘로맨틱’ ‘코메디’ 심지어 그녀가 낸 에세이집 I feel bad about my neck은 ‘내 인생은 로맨틱 코메디’라는 뜬금없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다. 로맨틱 코메디의 클래식 샐리 해리부터 시애틀의 잠못이루는 밤, 유브갓메일 그리고 최근의 줄리앤줄리아까지. 적정한 유머로 지펴진 알콩달콩 로맨스가 바로 노라 애프론이기에. 그녀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었지만, 뭔가 도시적 센스가 넘치는 활달하지만 다소 깐깐한 매력적인 뉴욕의 여성으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노라 애프론을 각인하고 있었다. 즉, 샐리라는 퍼소나의 실제 인물로서 말이다.

하지만, 부고를 듣고 주문한 그녀의 마지막 에세이집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를 읽고, 난 그녀에게서 두 개의 단어를 모두 떼어내야 했다. 웃기지도, 로맨틱하지도 않다. 원제인 I remeber nothing이 제시하는 황량한 공허에 비하면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따위는 달달하게 가미된 출판사의 판매 전략일 뿐이다. 당연히 철 드는 시절의 이야기도, 그 즈음에 가지게 되는 판타지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수 십년간 기자로 일했고, 뉴욕 타임즈 편집장까지 지낸 여자가 탈출 불가의 벼랑을 직면한 순간의 ‘자각’이 그려질 뿐이다. 한 점의 타협도 위로도 없이, 저널리즘적 팩트주의에 입각해. 그녀가 맞이한 벼랑은 ‘늙음’, 딱 한 걸음 더 내딛으면 죽음인 수준의 노화. I feel bad about my neck에서도 노화는 수사없이 그려진다. 한 마디로, 나이들어서 좋은 점은 하나도 없다는 거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 어떤 위안도 주지 않는다. 괴롭다고 말하지만, 책임지라는 식은 아니다. 죄없는 아이와 부녀자들이 폭격에 죽어나가는 전장의 비극을 리포트하는 CNN 기자처럼, 그녀는 자신과 주변에 닥친 나이듦의 비극을 리포트한다. 과잉도, 미화도 없이.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안도했다. 도대체 긍정해 주지 않는 전개가 힘들 때도 있었지만, 아브라카다브라의 양탄자로 덮어버린 과잉 긍정보다는 돌리던 폭탄을 터트려 주는 편이 덜 불길하다. 어짜피 폭탄은 터진다. 그리고 폭탄은 폭탄이다. 사람을 다치게 한다. 그 괴로움과 절망에 대해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 적막함이 오히려 불길할지도. 폭탄의 장점을 나열하는 것도 별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폭탄의 파괴력을 인식한 후에, 놀래고 충격받는 그 스테이를 보낸 후에, 혹은 보내면서라도, 조금 침착하게 다른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책을 썼을 때가, 이미 70세…

이 책에 담긴 그녀의 마지막 에세이의 제목은 이렇다 < 그립지 않을 목록> 그리고 < 그리워할 목록>. 글이 아니라 목록이다. 마지막 순간에 남기고 싶은 것은 문장이 아니라, 그저 몹시 그리워할 것들의 짧은 목록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목록엔 어떤 것들이 올라 있을까.

“저 위에서는 다음 주에 발행할 < 뉴스위크>를 마감하느라 정신이 없겠지. 하지만 아무도 신경 안 써.” 참으로 놀라운 개안(開眼)의 순간이었다. p.45 < 저널리즘에 대한 러브 스토리>

영화업계에 몸담지 않은 사람들 언제나, 관계자들은 이 영화가 잘 안 될 거라는 걸 미리 알지 않느냐고 궁금해한다. 그들은 묻곤 한다. “몰랐단 말이야?”, “어떻게 그런 걸 모를 수가 있어?” 내 경험상, 진짜 모른다. 시나리오를 쓰느라 온갖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진짜 모른다. 배우들도 너무 좋고, 스태프들도 사랑스럽다. 이삼백 명의 사람들이 황야에서 나만 보고 따라온다. 나의 요청으로 그들은 인생 중 6개월이나 1년 정도를 이 영화에 바친다. p. 149 < 실패작>

한편으로 실패의 장점을 설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실패를 통한 성공에 대해, 실패의 힘에 대해 책을 쓴다. 그들은 실패가 성장의 경험이었고, 실패로부터 뭔가 배울 수 있다고 한다. 그 말이 맞길 바란다. 내가 보기엔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앞으로도 언제든 또 다른 실패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p. 152 < 실패작>

사람들은 언제나 시간이 약이며 고통을 잊게 될 거라고 말한다. 이런 말은 출산할 때 듣는 상투어이기도 하다. 엄마는 아이 낳을 때의 고통을 잊어버린다고들 한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그 고통을 기억한다. 진짜 잊어버리는 건 사랑이다. p.172 < 이혼>

요점을 말하자면, 아주 오랫동안 내가 이혼했다는 전력이 나에 대한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거다. 그리고 이제는 아니다. 현재 나에 대해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늙었다는 사실이다. p.173 < 이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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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 Meninas – Diego Velázquez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어제밤 꿈에 실리콘밸리에서 길을 잃었다. 손수건에 칼을 숨긴 강도를, 만나 가진 돈을 다 내놓으라 협박을 받았고, 한 치 혀를 나불거리며 살아남을 방도를 강구하던 나는 매우 개꿈스럽게도 그분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추남이었다. 외모는 필리핀과 쿠바를 뒤죽박죽 뭉쳐놓은 것 같았고, 굵고 검은 머리카락은 근본없이 곱슬거리고, 키는 나보다 조금 크고 배도 불툭 튀어나왔다. 싱긋이 웃을 때면, 떼워넣은 금니 조각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하지만, 그 대단한 사랑이라니…말하자면, ‘상상을 초월하는, 천문학적인 이득’을 얻은 듯한 그런 사랑. 처음으로, 실리콘밸리에 가고 싶어졌다.

이 모든 건 어제 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잠에 든 탓이다. 잠재의식의 작동이란 때로 이렇게 단순하다.

소설도 그래. 412 페이지까지 필요한 이야기였을까. 고도 성장을 기록했다던 눈부신 80년대가 드리웠던 그늘에서 만나 짧은 한 시절을 같이 보낸 사람들의 이야기. 80년대하면 떠오르는 그 흔한 운동권 후일담이나, 지지리 궁상맞은 달동네 스토리라면 오히려 할 말은 많았겠지만…’못생긴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라면, 굳이 80년대일 필요는 뭐였지. 알고보니 백화점 회장 핏줄이었다는 제 3의 주인공 요한이 캐릭터는 오히려 요즘 막장 드라마에 더 어울리는 것 같고.

140자로 충분히 요약가능한 이야기. 층층이 복잡다단한 시대상이나 놀라운 반전같은 것도 없다. 그래도 이 두꺼운 412 페이지가 전혀 과하지 않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사랑’이라는 화두 하나를 잡고 이 단순한 이야기를 있는 데까지 펼쳐놓는 박민규의 필력 때문이다. ‘오케이! 할 수 있는 데까지 한 번 지껄여봐. 이런 거라면…’ 이런 기분이었다. 앞뒤없이 푹 젖어들게 만드는 10대…잘 쳐봐줘야 20대 초반에나 어울릴 감수성의 폭풍이 그렇게 유치하지만은 않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모두가 살고 싶어하는, 사랑이란 걸 하며 살고 싶어하는 시절이다.

시와 산문의 경계에 있는 듯, 툭툭 부러 끊어놓은 문장들. 때로는 시처럼, 때로는 고승의 중얼거림처럼 이어지다 끊어지고 그러다 다시 이어지는.

논리로 보면, 가장 핵심적인 왜 이 여자와 사랑에 빠졌는지의 이유조차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도저히 모르겠다. 그 앞에 길게 늘어놓은 부모 세대의 이야기를 봐서는 유독 추녀에 끌리는 DNA의 영향이나 혹은 되풀이 되는 숙명의 댓구같은 걸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하지만, 굳이 앞뒤를 따지고픈 기분은 들지 않는다. 머리야, 너 좀 저기 구석에 가 있을래? 나 지금 얘랑 사랑해야 되니까. 돌이켜보면, 항상 그럴 때였다.

상관이 있든 없든, 또 누가 이익을 보았든…퇴근 무렵의 주차장이나 옥외의 광장…들소 떼가 지난간 벌판처럼 휑한 느낌의…그래서 홀로 어느 고원에 선 것 같은 기분으로…고원의 저편에선 개발을 하든 뭘 하든…들소 같은 여자들과 백화점, 설사 모두가 이익을 봤다 쳐도…역시나 결국 여당 독재자들에게 그 이익이 돌아간다 해도…그해 가을을 살았던 사람들 중 누구보다 큰 이익을 본 사람은 < 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랑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익이었고, 세상의 가장…큰 이익이었다. 천문학적 이익이란 아마도 이런 걸 뜻하는 게 아닐까, 무렵의 나는 생각했었다. (156p)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야. 이쁘지도 않은 서로를, 잘난 것도 없는 서로를…평생을 가도 신문에 기사 한 줄 실릴 일 없는 사랑을…그런데도 불구하고 해 나가는 거지. 왜, 도대체 그런 일을 하느냐 이 얘기야. 기적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 (224p)

애당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 (228p)

그런 저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당신에게 도망친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당신을 보고 싶어하는 나라는 여자에게서 도망을 친 것입니다. (265p)

샤워를 하다 문득, 이별이 인간을 힘들게 하는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고통보다도, 잠시나마 느껴본 삶의 느낌… 생활이 아닌 그 느낌… 비로소 살아 있다는 그 느낌과 헤어진 사실이 실은 괴로운 게 아닐까… 생각이 든 것이었다. (300p)

한 가닥, 그 사건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 러브 어페어>를 떠올리게 했다. 아네트 베닝…병신이 되어도, 다들 결국엔 찾아간다. 인상적으로 몰아친 첫 챕터. 아주 오랫만에 하루키의 < 상실의 시대>를 펼쳐보고 싶게 만들었다. 시간과 공간을 가늠하기 힘든 남자와 여자의 대화…그리고 마드리드의 Las Meninas. 언젠가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불면증 4 : 우울의 적합한 대상

오늘밤도 여전히 불면신의 강림을 영접했다. 물론, 낮에도 영접했다. 그토록 깊은 사랑으로 나의 낮과 나의 밤을 함께하시는 불면신은 그간의 나의 방만을 꾸짖기라도 하듯, 너무나 많은 시간을 벌로써 하사하시어, 그 시간을 모두 정보와 노동으로 채우는 사역으로 단죄하셨다. 해서, 나의 뇌는 이런 짬짜비빔면스러운 맥락없는, 그러나 맥락이 아예 없지도 않은 난장판 꼴라주를 그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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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판 일부 발췌

그리고 이윽고 이 기사에 이르렀을때, 고열과 심적 압력을 견디지 못한 나의 심장은 우울의 노심용해를 시작했고, 피폭 경계령을 발동해 불면신의 뜻을 어기고 모든 미디어에서 5클릭 이상 떨어져 있을 것을 키보드에 통보했다.

이런 경위로,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이토록 낯선 ‘심야의 독서’라는 행위를 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의 오염을 막을 특단의 조치로써.

‘하라 켄야’ 일본 디자이너. MU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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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JI 포스터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이 있다’

현실계의 암울한 팩트와 구렁텅이같은 감정들이 고도로 정제된 백(白)의 표면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는 느낌이랄까. 강한 기호를 가지게 하는 상품보다는 ‘이것으로 충분하다’라는 느낌을 주고 싶다는 그의 디자인 철학은 직접 디자인한 본인의 글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저 혼자 달려나가는 혼란한 마음에 정연한 질서를 부여한다.

‘디자인의 디자인’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지만 곧 현실의 일부가 되어 많은 이들을 감동시킬 존재들을 창조하기 위해, 역으로 현실을 분해하여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버리고 다시 조립해가는 복잡한 과정을 설명한다. 하지만, 여기서 목표하는 감동이란 것 조차 압도적인 세계 앞에 울컥하는 터트림이 아니라 그저 일상의 사용에서 투명하게 얹어지는 보편재로서의 충실함에 보내는 조용한 경외심에 가까운 감정이다. 그 부분이 너무 좋았다.

아름다운 컨셉 보드에서 출발해 최고의 디자인이라고 상도 받고, TV에도 나오고, 그 업계에서 엄청 회자되는 디자인 산출물도 직접 써 보면, 정작 고상한 컨셉과 미의 치장에만 열을 올렸지 소비자의 이해에는 별 관심이 없었구나라는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 윈도우에 전시된 것을 관람하는 사람들이야 그저 아름답다 박수치면 그만이지만, 정작 그 제품을 심지어 매일매일 쓸 수 밖에 없는 사람으로서는, 그 아름다운 디자인 앞에 얼굴 붉히며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에휴~

논리적인 설계와 우아한 구현이 한 치의 틈도 없이 우아하게 직조된 그의 글은 하나의 디자인 작품같다. 딱딱한 논리와 무거운 통찰조차 아름답게 세공하지 않고서는 밖으로 내보낼 수 없는 디자이너로서의 감각일지 모르겠다.

두 번째 책 ‘백(白)’은 좀 더 추상적인 주제였지만(그러나, 역시 감동), 오늘 읽은 책은 좀 더 가벼운 것이었다. ‘포스터를 훔쳐라 +3′ 젊은 날의 하라 켄야씨가 91년 월간 연재한 에세이를 묶은 책이다. 조금 발랄하고 패기넘쳤지만 그의 글을 이미 타고난 세공사의 솜씨였다.

여기서 나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린 그의 우울을 접했다.

< 블레이드 러너> 미술 감독했던 세계적인 거장에 일본 업체 일을 맡기고 중간에서 디렉팅하다 망한 과정을 그린 짧은 글이다. 엄청 대단한 사람인 줄 선입관 가지고 쫄면서 빈틈없이 기계적으로 일하다 일 끝날 때쯤 미국으로 만나러 갔는데, 결과물은 실망스러웠다. 알고 보니 소탈하고 자유로운 사람이어서 만사 제쳐두고 미리 만나 얘기했으면 일이 잘 됐을 것 같다. 그래서 돌아오는 태평양이 우울했다는 얘기다.

오늘 밤, 유난히 이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우울’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갑자기 독서 이전에 느꼈던 시대의 우울이 너무나 피상적으로 느껴지면서, 문득 좀 더 진지하게, 구체적 우울해지고 싶다는? 그래야 한다는? 욕구를 느끼게 된 것이다.

젊은 날의 하랴 켄야 식으로 우울할 사안들도 몹시 많은데, 구체적인 일상과 업무에는 뺀질거리며 잘 생각해보면 우울해야만 했을수도 있을 상황을 교묘하게 비껴가고, 어쩌다 난 많은 시간에 본 몇 편의 기사로 거대한 시대와 이념을 우울해 한다라…지금 내게 적합한 우울의 대상은 무엇일까. 혹은, 정말 진지한 대상이어야 할 시대의 우울 역시 그저 내 불면증에 *몹쓸 어뷰징*되는 있는 것은 아닐까.

푹 자고 나서도 이렇게 시대가 우울한지 다시 확인해 봐야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자야한다. <=허무한 결론-_-;;

소셜 웹 기획(Designing for the Social Web)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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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웹 기획

Joshua Porter| 황현수, 유상은 역| Insight (인사이트)| 2008.11.15 | 236p | ISBN : 8991268528

책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여러 번 빙긋이 웃었다. 나의 첫 번째 책에 있는 내용도 있었고, 두 번째 책에 쓴 내용도 있었다. 반가움과 스산함…모순된 두 가지 기분이 같이 들었다.

나 역시 한계가 한아름인 책의 저자인 주제에, 남의 책에 대해서 뭐라 왈가왈부하기 참 뭐하지만(“너나 잘하지 그랬니?”)~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한계는 ‘장치’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장치는 중요하지만 장치만으로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는다.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를 규명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규명하지 않는 한 웹기획도 웹기획 책이라는 것도 모두 겉돌고 만다.

이 책은 이유라고 주장하지만, 대부분 장치다. 이렇게만 하면 사람들이 개떼같이 몰려들어와 참여하나? 이 답이 될 수 없어서 그렇다. 이유를 극대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유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한다. 물론, 장치를 잘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물론, 내 책도 같은 부분에서 반성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웹 기획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라면 모두 같은 질문을 받아야 할 것이다.

스스로 고민할 포인트와 생각할 거리를 짚어주는 대신, 기존의 방식을 정리하고 “~를 하라”고 말하는 태도도 다소 구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이 배웠지만 거부감도 많이 들었던…그리고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 비슷하게 되어버린 제이콥 닐슨 박사님의 유저빌리티 10계명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 책의 챕터 제목들도 죄다 “~하라”군. (ex) 소셜화 – 관계를 맺고 공유하게 하라 -_-a 꾸벅

하지만 이 책은 시종일관 편안하게 끝까지 읽힌다. *적어도 나에게는* 만족스러울 만큼 깊이 파고드는 책은 아니었지만, 저자의 경험이 잘 녹아져 있고 로컬라이즈 이슈가 다소 적은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어 볼 만 했다. 특히, 너무나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두께와 전개 방식이 무거워 정작 읽지 않게되는 책들에 비하면 책값에 대한 ROI는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담없이 흥미를 가지고 끝까지 읽을 수 있다는 것, 어떤 책이 가질 수 있는 너무나 훌륭한 장점이다.

원제는 Designing for the social web인데, 디자인 -> 기획으로 번역이 되었다. 정작 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UI 디자인도, 웹기획에 대한 것도 아니다. 이 두 가지를 포함해 사용자의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소셜한 웹사이트를 기획하고 운영할 때 고려해야 할 전반적인 문제들을 다루었으며, 사용자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참여시키느냐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앞쪽에는 사용자와 대화하는 법도 몇 챕터에 걸처 다루고 있어, 서비스 기획자가 아닌 CS담당자나 운영자, 고객 커뮤니케이션, 리스크 매니지먼트 담당자들도 참고할 만 하다.

그만큼 구성이 두루두루에서 멈추고 마는 아쉬움도 있지만, 여러 가지 내용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 사용자 참여를 기획하는 분들은 읽어보면 여러 생각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내 직무 자체가 참여 기획쪽이 아니라 큰 감흥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슈와 포터는 블로그 보카르도(bokardo.com)의 저자이며, UI 전문가다. 예전부터 자주 봐왔던 블로그라 책이 나올 때부터 기대가 많았다. 뉴라이더스답게 책 표지도 시크하고(너무 좋아라~한다), 제목도 유혹적이라 실제로 번역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재미있게 읽고나서, 나는 내가 전에 있던 어떤 세계를 떠나왔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내가 새로 마주한 푹 담그고 있는(혹은 싶어하는) 이 새로운 세계의 풍경이 읽어내기는 어렵지만, 얼마나 멋진 것인지 새삼 실감하게 되어 뿌듯했다. 물론 그 세계 속에는 이 책에서 소셜 매개체(Objects)라는 명칭으로 휙 지나가고만 징글징글한 데이터들이 득시글거린다.

좋은 책을 만들고 보내주신 인사이트에 감사합니다. ^^

김훈 <바다의 기별> – 근무 수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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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나무| 2008.11.17

김훈 선생님의 신작 에세이집을 읽었다. 글의 배경이 언제든, 문장의 계절은 언제나 겨울이었다. 검은 겨울 밤을 가르며 휘몰아치는 흰 눈보라처럼 살벌하고 준엄한 문장들이 가득했다. 그 문장들은 실체와 말 사이의 구천을 떠돌며, 그 어느 쪽에도 안착하지 못한 독한 아귀들 같았다. 글을 쓴다는 것이 꼭 이렇게 무겁고, 무서운 일이어야만 하는지 숨이 막혀왔다.

하지만 피식피식 웃음이 나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흘러나온다. “하여간 사내들이란…”

어쩐지 김 훈 선생님은 고집 센 어린 남자애 같다. 그 치열한 사유의 깊이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성숙한 어른이라는 느낌이라는 들지 않는다. 일부러 성을 내고, 일부러 까칠하고, 일부런 쎈 척 어른의 흉내를 내는 똑똑한 어린애 같다는 혐의가 든다. 온갖 폼 잡고 사람들 모아놓고 근엄한 표정으로 공자왈 맹자왈 하다가도, 뒤로 가서는 장난스런 눈빛으로 배시시 농도 건네고 언니들의 추파에 응수도 하며 낄낄거릴 것만 같다. 그러다가 금새 옷섭을 여미고 단정해지기 놀이에 심취하고.

어느 날 술 마시는 자리에서 내 친구들에게 여러 소방장비들의 기능과 작동방식을 열거하면서, 그 기능 하나하나가 어떻게 인간의 생명과 연결되는 것인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도심을 질주하는 소방차가 어째서 아름다운 것인지를 설명해 주었다. 내 친구들은 별 감동이 없었다. 술 마시는 자리에서 왜 불 끄는 얘기를 하느냐고 나를 나무라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실망했고, 친구들이 내 말을 알아 듣지 못해서 답답했다.

< 바다의 기별> 중 –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75p

술자리에서 혼자 들떠 열변을 토하다, 자기 말 안 들어준다고 삐쳐버리는 남자. ㅋ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 분을 두 번 뵈었다. 두 번 다 1:1이었다. 그렇다고 소개팅은 아니고ㅎㅎ. 그런데, 정작 ‘한국 문학의 벼락 같은 축복’이자 동시에 ‘벼락 같은 베스트셀러’였던 그 분의 책은 이번에야 처음으로 보았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도 새롭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와 문장과의 거리, 그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헛된 열망, fact에의 집착, 과학적인 글쓰기, 조사의 어려움, 몸으로 밀고 나가는 세계, 단독자, 밥벌이의 중요성과 지겨움, 보편성과 개별성…이미 신문 기사나 인터뷰를 통해 반복했서 접했던 레퍼토리들이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독대해 직렬연결로 전달받아 더 선명하게 각인됐고. 다른 책들은 어떨까? 결국 그것들 역시 다른 대상에 투영된 같은 세계의 응용일 것이다. 개별적이자 단독적이며 구체성을 띈 fact에 기반한 응용.

어쨌든 나로서는 문학보다는 어떻게 살아야/살아남아야 할까가 더 고민이다. 그런데, 구구절절한 책 속 문장보다는 그 분 작업실 칠판에 적혀져 있던 몇 줄의 근무 수칙이 번쩍~와 닿는다. 같은 근로자로서의 연대감이 너무너무 살갑다. 그래. 근무를 잘 하기 위해서는 근무 수칙을 지켜야 한다. 2009년에는 새해의 결심 대신 새해의 근무 수칙을 만들어 봐야겠다. 어렵고 혼란한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단순하고 명징한 근무 수칙을. 또 한 해가 바짝바짝 끝을 죄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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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근무수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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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컴퓨터를 다룰 수가 없지만, 컴퓨터로 그을 쓸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본 적도 없다. 연필로 쓰기는 몸으로 쓰기다. 연필로 글을 쓸 때, 어깨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작동되는 내 몸의 힘이 원고지 위에 펼쳐지면서 문장은 하나씩 태어난다. 살아있는 몸의 육체감, 육체의 현재성이 없이는 나는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다. 글은 육체가 아니지만, 글쓰기는 온전한 육체노동인 것이다.

< 바다의 기별> 중 – ‘무너져가는 것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것’ 1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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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만을 가지런하게 챙기는 문장이 마음에 듭니다. 나는 이런 문장을 이순신 장군의 < 난중일기>에서 읽었습니다. 거기 보면 그 분이 군인이기 때문에 사실에 정확하게 입각한 군인의 언어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인이 아니면 쓸 수가 없는 문장입니다. …(중략)

저는 장군님께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분이 돌아가신 날이 되면 꼭 노량에 가서 소주 한 병을 놓고 절을 하고 돌아옵니다.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노량은 남해도 입구인데, 아주 경치가 좋습니다.거기 이락사(李落詞)라는 사당이 있습니다. 이순신이 바다로 떨어져 죽은 사당인데, 그 이름도 참 이순신답죠. 아무런 수사학이 없고 떨어질 ‘락’자를 써서 이가 떨어진 바다라는 뜻이죠. 난 전국 사당 이름 중에서 이락사가 제일 잘 지은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가 죽은 바다다. 이런 단순성이 온갖 슬픔보다 더 거대한 슬픔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저는 요즘 이런 명석성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습니다.

< 바다의 기별> 중 – ‘회상’ 141~1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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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풍륜은 늙고 병든 말처럼 다 망가졌다. 2000년 7월에 풍륜을 퇴역시키고 새 자전거를 장만했다. 이 책을 팔아서 자전거 값 월부를 갚으려 한다. 사람들아 책 좀 사가라.

< 바다의 기별> 중 – ‘자전거 여행’ 서문 1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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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A다’라고 말하면 분명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하나마나한 말입니다. 사람이 입을 벌려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사전이라는 것은 동어반복의 거대한 시스템입니다. 이 동어반복의 지옥을 벗어나서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모습을 직접 포착하고 그것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문학과 자연과학의 목적은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바다의 기별> 중 – ‘말과 사물’ 1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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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설에는 종교나 내세나 구원이나 피안이나 이런 것들이 나오지 않고, 오직 이 해탈하지 못한 중생들만 나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득도하지 못한 중생만 저의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제가 소설로 쓸 수 있는 영역은 매우 좁은 것이죠. 득도하지 못한 중생 얘기만 쓰는 아주 협소한 영역을 쓸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까, 인간의 안쪽에서만, 인간의 언어만을 붙들고 살아야 되니까. 그런 협소한 자리의 부자유를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 안에서만 한 줄 한 줄의 글을 쓰다가 때가 되면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 바다의 기별> 중 – ‘말과 사물’ 1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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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 분위기?! -_-;; 쪽팔리당… 그래도 가문의 영광^.^V

인생이란 무엇이냐고?

환란의 때야말로 사람은 일상의 잠에서 깨어 영혼 속으로 깊이 침잠해 표면 아래에 숨겨진 본질을 갈구할 드문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의지하고 싶어서. 위로받고 싶어서. 혹시 속세에는 도저히 없는 구원이 거기 숨어 있는가 싶어서.

이럴 때야 말로, 너저분한 것들을 털어내고 옥석을 가릴 수 있게 된다. 감정의 사치를 위해 쓸 소소한 악세사리 비용까지 바닥나는 절망의 상황에서만이, 내 인생에 도저히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온전히 그것에만 경제적으로 마음을 쏟을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진정한 위로, 진정한 의지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지 왜곡없이 가늠할 수 있다.

심란함의 쓰나미를 몰고 온 9시 뉴스를 보면서, 하루 분의 전국민적 패닉에 마침표를 찍는다. Enough. 방에 와서 란딩 준비물을 챙기는데 날이 추워 어딘가 쑤셔둔 바람막이를 찾다가 문득 이 책을 발견했다.

톨스토이 < 인생이란 무엇인가>

눈이 번쩍 뜨여졌다. 톨스토이가 인생의 경구들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매일 매일 몇 쪽씩 적어내려간 책이다. 10월 24일, 과연 어떤 말이 쓰여져 있을까? 대문호 톨스토이는 무엇을 사색했을까? 수 백년 후 오늘 이렇게 많은 이들이 고통에 몸부림치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을까? 한쪽 반 분량의 글을 읽으며 새삼 ‘위대함’ 역시 우리 삶에 필수불가결한 한 요소임을 깨닫는다. 늘 나는 한 명의 인간, 그러므로 모든 인류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수 백 페이지의 엑스레이로 찍어놓은 듯한 도스트예프스키를 경배했지만, 결국 돌아올 길이라 해도 인간의 탈을 쓰고 갈 수 있는 그 끝까지를 가 보았던 극한의 실험성을 찬양했지만, 이제 나는 안다. 인생에는 예술만큼이나 스승이 필요한 것을. 뻔한 인생의 교훈을 뻔하지 않게 들려주며 겸허히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위대함의 영역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늦은 밤, 마음을 담아 한 자 한 자 타이핑해 본다. 평화로워진다. 내일 아침에는 또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고, 그러므로 또 다시 세상살이의 어려움에 치를 떨지라도. 하루 분의 비타민을 삼키듯 당분간 저 위에서 처방해 주신 위대함을 섭취해 봐야겠다. 매일 매일 꼭꼭 씹어서.

인생이란 무엇인가 – 10월 24일

1
만약 우리 모두의 생명의 근본이 같지 않다면, 우리가 늘 경험하는 동정이라는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다.

2
누군가의 분노를 진정시키려면, 예를 들어 그것이 아무리 정당한 분노라고 하더라도, 화를 내고 있는 사람에게 “하지만 저 사람도 불행한 사람 아닌가!”하고 말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빗물이 불을 끄듯, 곧 동정은 분노를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좋으니 그 사람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며 그에게 고통을 주고 싶다면, 자신이 이미 그 고통을 상대방에게 주었고, 실제로 상대방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민하거나 어려움과 결핍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나 때문이라고 중얼거리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나머지 일은 어떻게 되든 그것만으로도 분노가 사라질 것이다.
쇼펜하우어

3
똑바른 길, 또는 우리가 따라야 할 행동의 규범 – 그것은 인간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멀리 떨어져 있다면,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느다면, 그것은 행동의 규범이 될 수 없다. 도끼자루를 깎는 목수는 눈앞에 견본을 놓고 일한다. 그는 자신이 깎고 있는 도끼자루를 들고 요모조모 뜯어보며, 새 자루가 완성되면 얼마나 똑같은지 알아보기 위해 두 개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본다. 그것처럼, 타인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한 것과 같은 감정을 품는 현인은, 확고한 행동의 규범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려 하지 않는다.
공자

4
남을 욕하며 그와 다투고 있을 때, 너는 인간은 모두 형제라는 것을 잊고 있으며, 사람들의 친구가 되는 대신 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너는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고 있다. 왜나하면 네가 맨 처음 신이 창조한 선량하고 자비로운 인간이 아니라, 몰래 다가가서 먹이를 덮쳐 물어 죽이는 야수로 변한다면, 너는 너의 가장 소중한 재산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너는 지갑을 잃으면 크게 소동을 피우면서, 어찌하여 너의 가장 소중한 재산인 ‘마음의 선량함’을 잃고도 아깝다고 느끼지 않는 것인가?
에픽테토스

5
‘너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도 많아.’ 확실히 이 말은 네가 사는 데 지붕 역할은 못하더라도 비를 피하기에는 충분하다.

6
너는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고 슬퍼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떠올린다면,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7
진정한 동정이 시작되는 것은, 우리 상상으로나마 괴로워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진정한 고통을 대신 경험해볼 때이다.

스키니 비치 : 미녀 삐끼에 낚여 脫고기 레볼류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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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니 비치 (앞서가는 그녀들의 발칙한 라이프스타일) Skinny Bitch 
로리 프리드먼, 킴 바누인| 최수희 역| 밀리언하우스| 2008.04.01 | 232p | ISBN : 978899164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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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들은 여기저기 발길질을 해대며 미친 듯이 몸부림친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다치지 않기 위해 작업자들은 요동치는 소의 척수를 머리 뒤에서 칼로 세게 내리쳐 끊어버린다. 그 고통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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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소고기 정국이 막 불붙던 시점 만나게 된 이 책.

스키니 비치라면서,
책의 맨 끝에 보면 정작 다이어트 비법은 소개하지도 않았으며
애시당초 그런 거 소개는 관심도 없었다고 생깐다.

그건 그냥 혹하게 만들어서
다소 재미없게 느낄 수도 있는 올바른 먹거리 전도를 위한 삐끼 작전일 뿐이었단다.

이론~!!!
한마디로, 배배배 …배반이다.

말라깽이 비치로 새로이~ (눈 반짝반짝★_★) 재탄생할 수 있다는 구언의 복음을 믿고 여기까지 따라온
가엾은 중생에게 책 다 끝난 이제와서 이 무슨 해괴한 망언이냐.

게다가 더 황당한 사실.

이 책을 읽으면, 밥상 위에 먹을 것이 거의 없어진다.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죄다 독약이거나 죄많은 인간이 짊어진 호러블한 무한탐욕의 증빙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자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여기는 구멍 뻥~ 뚫린 죽음의 타이타닉호다. (꼭 그렇게 쓴 건 아니지만)
침몰의 공포를 느낀 인간들이 죄다 뛰쳐나와 아둥바둥 기울어진 갑판을 기어오르며 이 한 몸 탈출을 도모한다.
웰빙이라는 값비싼 구명조끼와 유기농이라는 최고 경쟁율 구명보트를 차지하려고 발버둥치며…

이런 풍경을 SATC의 캐리가 컬럼으로 쓰면 어떤 삘이 날까? 바로 스키니 비치 삘이겠지.
경쾌하게 거침없이 재미나게. 전직 모델이었다는 예쁜이 둘이 글까지도 참 잘~ 썼다.
게다가 끔찍한 도축 과정이라든지 음모론에 정부 차원의 조직적 결탁도 자유분방하게 까발려 주신다.

왜 그런 애들 있자나.
겉보기엔 인형처럼 이쁘장한데 건들건들 농이라도 걸라치면 바로 앞차기 날려주시는
겁대가리없이 깡 좋~고 머리는 더 빨리 도는 완소 언니들.

이거저거 뭐 다 좋은데, 문제는 actionability다.
이 책대로 차 떼고 포 떼면 먹을 거라곤…T_T 거의 없다.
게다가 추천 식단이라고 몇 페이지 늘어놓은 게 도당췌 와닿아야 말이지. (머나먼 외국의 먹거리)

자연성분 그대로 정제되지 않은 켈트해소금-> 어디서 팔까요???
레드어이언을 넣은 전곡 베이글 -> 이거 뭔지 아시는 분~~?
렌틸콩 수프와 익힌 케일 -> 이거는?
방금 짠 신선한 오렌지주스 -> *방금* *짜야* 된다는 거.
식물성 가짜 닭고기로 만든 햄버거 고기 -> 어디서 파는데??
블루베리, 아몬드, 두부 스크램블 -> 요 정도가 그나마 접수 가능한 수준

골프도 치러다니고(요건 책에는 없으나 내 귀에만 들린 소리^^)
비싼 옷도 퍽퍽 잘 사면서 왜 그렇게 짜치게 구냐며
유기농에도 돈 좀 들이라는 데, 이건 돈이 아니라 근본적인 내 생활 환경의 문제다.
집에서의 먹거리야 엄마 뎀비 손에 달려있는데, 가까스로 천신만고끝에 그들을 설득한다 해도
일단 집에서 먹는 밥이 한 달에 몇 끼가 되야 말이지.
밖에 나가서 사 먹는 밥에 이거 가리고 저거 가리면…남는 것은 외로운 왕따의 길.

그리하여 나의 절충안은 육고기 탈출 대작전.
고기 국물도 먹고 가끔 아침 김밥에 햄도 먹는 매우 느슨한 채식이라고 하기도 거시기한
아주 간~~신히 육고기만 겨우 피하는 형태의 머라 이름도 없는 이거.
(베지, 모시기 모시기 되게 많던데~~난 NONMEAT라고 이름붙여본다)

근데 이상하게 그렇게 힘들지 않다. 너무 너무 이상하리만치.
혼자서도 매끼 고기를 구워먹던 원단 육식주의자였던 내가.

너무나도 맛있는 광주 식당 김치찌게의 돼지비계를 골라내는 날 보며 “유진이 변했구나” t_t
그래도 일본가서…방목해 키웠다는 마블링 너무도 선명한 소고기 구이, 그리고 …눈물을 머금고 아니 흘리면서도
부들부들 떨면서 젓가락을 접게 만든
다시금 되새기며 움찔하게 만들었던, 나를 움직인 표현은 바로 이거였다.

you’re what you eat.

따라서 니가 고기를 먹으면, 너는 그들이 느꼈을 슬픔과 분노와 고통을 함께 먹는 것이다.

그래서 요새 육고기를 좀 피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채식은 아니고),
그러던 어느 날 장어 초밥을 너무도 맛나게 먹는 것을 본 친구의 한 마디.

“장어의 슬픔과 분노와 고통은 어쩌고?!”

“그래도 장어는 좀 덜 느끼지 않을까????” 힘없는 반격…흑.

채식하면 살이 빠질까? 온순해질까? 행복해질까?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소, 돼지, 닭들의 성난 영혼이 내게서 떠나갈까?
채식은 도깨비 방망이~ 만병 통치약~ 아싸. 채식만 하면 수리술술 인생이 풀려요 이게 바로 시크릿.

살아야겠기에 살아있는 또 다른 것의 생명을 “앗아” 씹어 삼켜야 한다는 존재의 기본 원리가
좀 거시기하게 다가오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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