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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모스크바의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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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을 갇혔다 탈출하는 남자의 이야기. 이렇게 빠삐용과 쇼생크의 맥을 잇지만, 수용의 실상의 사뭇 다르다. 어두컴컴한 감옥에서의 비참한 고립 대신, 고급 호텔에서 끼니마다 S급 요리사가 내놓은 메뉴에 와인이 서빙되고 어떤 밤은 연회가 펼쳐지는 감금이다.미모의 여배우와 VIP룸에서 사적인 오후를 보내는 비밀스런 사치의 순간도 있다.

그래도 이것은 결국 격리다. 우리 모두가 지나왔고, 또 앞으로도 어느 정도 감당해야 할 것. 책장을 펼치고 볼쉐비키 혁명 이후 스탈린의 지배하는 격동의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의 센터 메트로폴 호텔 속으로 들어간다. 가끔씩 궁금해지는 타인의 격리 속으로.

선동적 시를 쓴 귀족 계급이란 이유로 인민 위원회로부터 평생 호텔에 갇히는 연금형을 살게 된 로스토프 백작. 귀족 계급의 자유로운 삶을 누리던 그는 하루 아침에 VIP룸에서 옥탑방으로 쫓겨나 갇힌 신세가 된다. 잠자리와 식사에서 활동 범위, 할 수 있는 일과 만날 수 있는 사람의 범위까지 일상의 모든 것이 바뀐다. 잘나가던 서른 세 살 러시아 남자에게 닥친 뉴 노멀의 시작이다. 앞으로 36년이라는 시간동안 계속될.

이 남자에게는 어떤 인생이 펼쳐질까?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나가게 될까. 그는 이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현재 전인류에게 던져진 질문이기도 하다.

이 후 소설은 그의 생이 천천히 바뀌어 가는 과정을 그린다. 반격보다는 적응이 주를 이룬다. 모든 것이 바뀌어도 결코 바꾸지 않는 자신의 안목과 태도로 새로운 삶의 형식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가장 먼저 추려지는 것은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의 리스트. 옥탑방 리모델링도 필수다. 하루의 스케줄과 식사의 프로토콜이 정해진다. 고뇌하는 대신 하루의 동선과 페어링할 와인을 선택하고, 정부를 비난하는 대신 그안에서 ‘의외의’ 역할을 찾기도 한다. 사회적으로는 턱없는 추락이지만, 얼마나 멋진 발견이었는지.

이런 형식은 반복되는 삶을 조화로운 비율로 나누고 감싸는 우아한 액자 같았다. 견고한 뉴노멀의 루틴이다. 섬세한 장인의 솜씨로 한 땀씩 새겨져가는 세공품같은. 이 책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정교하게 묘사된 그 한 땀 한 땀을 음미하는데 있었다.

물론 비탄의 위기도 있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지붕 위의 커피타임 열리기도 하고 고향에서 꿀벌들도 찾아오는 세렌디피티를 마주하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과 맺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애정과 존중의 관계들은 지탱하는 힘이 되고, 선물처럼 따라오는 만남들도 풍성하다.

이것은 아마도 자신의 품격과 형식을 갖추고 지키는 사람에게 우주의 기운이 모이는 현상이 아닐까. 로스토프화 된 메트로폴 호텔은 우아한 소우주같았고, 그 안에서 로스토프는 조용히 자신의 센터를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페북과 인스타를 이어달리기 하듯 뒤지고,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들락거리다 보면 어디선가 삶이 지워져 가는 듯한 불안이 몰려왔던 격리의 시간들. 조금씩 산소가 희박해져 간다고 느껴졌을 때, 문득 로스토프 백작을 떠올렸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건가요.

그는 나에게 답한다. 생존의 조건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삶의 품위는 환경이 아니라 환경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결정한다는 것.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못하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남긴 메모이며, 이 소설을 관통하는 메시지이다. 그리고 하나 더. ’가장 현명한 지혜는 늘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것’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 그것으로 그는 소련에서 가장 운 좋은 남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이런 아름다운 적응을 교훈으로 남기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환경과 물아일체가 된 후 그 지배력의 포스를 모아 막판 뒤집기에 성공하는데…고급지고 대중적인 < 고도를 기다리며>일거라 예상했는데, 헐리웃 영화로 마무리가 된다. 추락하고 격리된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 대신 통쾌한 반전으로 이끄는 대중 소설. 로스토프 백작도 계획이 있었구나.

하지만 그 계획을 이룰 때까지, 때로는 형식으로 지탱해야 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런 때일 것이다. 아니 늘 그런 때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그 어떤 사유나 결심보다는 나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는 형식이 필요하다는 자각을 하게 된 것으로 이 책에 감사한다. 읽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예쁜 마음으로 이 책을 선물해, 독서를 강제해 준 사람에게도.

형식을 정의하자. 나를 나로써 지탱하게 만드는 매너를. 그리고 그 매너를 일관되게 유지하자. 그 결과가 대탈출로 이어지든 아니든. 버거울 줄 알았는데 매 순간 흥미롭게 몰입했던 600페이지 분량 독서의 최종 결론이다.

격리와 제한에 갑갑해졌다면 어디론가 뛰쳐나가는 대신 < 모스크바의 신사> 어떨까. 격리가 해제되든 아니든, 어디나 조금은 감옥이라면. 아직 혼란하기만한 뉴노멀의 삶을 나의 품격을 다해 정의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