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키지 여행은 재미없다. 패키지 영화도 그렇다.
기대가 컸었다. 시크폐인, 주원앓이로 몇 달 살았지만, 현빈 때문이 아니다. 닿고 싶었던 건 김태용이었다. 휴가 나온 여자 죄수와 날탱이 제비족의 2박 3일 짧은 만남. 쫓기는 남자와 돌아가야 하는 여자. 여고괴담 2와 가족의 탄생같은 *놀라운* 영화를 만든 감독이, 너무 심하게 뻔한 이 설정에 어떤 마법을 걸어줄까가 관전 포인트였다. 드라이하게 말해서 그렇지, 설레였었다. 다시 강조. 현빈 때문 아니고!! 김태용 감수성과의 조우에.
결론적으로 난 이렇게 울부짖는다. 마안추~~마안추~~~만추야, 이 자슥아~~!!! 일단 난 이 영화가 김태용 감독의 영화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안개에 덮힌 시애틀, 더 오리무중인 두 사람의 만남. 그림 엽서같은 멋진 풍광. 현빈과 탕웨이. 어쩌구 저쩌구…영화보다 욕나왔다. 씨발. 돈 받고 아웃소싱만 해 준 거지 쓴 건 아닐꺼야…애써 진정하는데, 떡하니 엔딩에 Written and Directed by 김태용하고 뜬다. 납득도 안돼 집에 와서 찾아보는데, 역시!!! 영화사 사장이 제안한거고, 정황상 탕웨이도 영화사에서 물어온 것 같다. 현빈은 탕웨이 맞춰서 대충 끼워넣은 것 같고. 1년 전 현빈은 애매했을 테니. 둘이 해야 되니까 한국도 중국도 아닌 시애틀 같은 데로 갔어야겠지. 김태용은 열심히 구상했겠지만, 이미 정해진 셋팅이 워낙 타이트해서 운신의 폭이 없었을 거고. 기본적으로 클래식한 로맨스 감정을 잘 못 푸는 것 같다. 어거지스럽구 무리구. 애초에 그거 해야 될 사람도 아니고. 아니, 그런 뻔한 거 정반대의 것을 해야 되는 감독 아닌가!! 그런 유니크한 재능을 왜 이런 패키지 영화에…낭비. 물론 여기까지 다 추측성 발언.
어쨌든 결과는 또 한 편의 ‘호우시절’이다. 요런 영화, 나는 ‘투어 로맨스’라고 분류하는데. 대충 여자 남자 둘이 우연히 만나서 여기 저기 싸돌아다니는 그런 영화. 로드 무비라고 하기엔 이동거리가 그다지 길지 않고 대략 테두리가 정해진 도시 단위의 공간 내에서 동선이 그려진다. 투어 로맨스의 좋은 예, 비포 선라이즈, 어떤 하루(흠) 나쁜 예, 호우시절, 만추. 우선 포인트는 남 녀의 치고 받기. 워낙 1:1 상황이라 둘의 호흡이 중요하고, 꼭 알콩달콩일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두 남녀사이에 흐르는 어떤 식으로든지의 ‘전류’가 극의 재미를 좌우한다. 그 다음 포인트는 스팟의 매력과 스팟에서 이루어지는 의외의, 하지만 이질적이지는 않은 이벤트. 좋은 예는 비포 선라이즈의 청음실이나 케이블카. 나쁜 예, 호우시절 댄스장(So..Cliche’), 만추의 판타지 무언극(생..뚱). 만추는 아무 것도 못 살린 것 같다.
그래, 저런 거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건 저런 거야. 엔딩씬 롱테이크가 좀 와 닿는 순간 탕웨이 오글거리는 독백. 기다림의 실재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긴 것 같아 촉촉히 젖어드는데, 대사에서 확 깼다. 그래, 이건 영화였지! 그렇게 강조해야 되나. 그냥 경계에 버려뒀으면 안돼는 거였니.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에 잠기듯, 영화 속에서 실재라는 꿈속으로 빠져들게…
색계를 못봤는데, 소문대로 탕웨이 대단했다. 뉴스에서 공항 입국이랑 기자 회견 사진 같은 거 보고 뭐야 얘 왜 이래 그랬는데, 영화 속에서는 180도 변신. 낮은 음성, 무표정 속에 뿜어내는 기가 장난이 아니다. 소박한 백지에서 잠들었던 용들이 꿈틀꿈틀 한 마리 두 마리씩 튀어나오는데 허걱. 백 마리는 본 것 같다. 반면, 현빈은 그저 안습. 도당췌 자기절제가 내면화된 성실 노력 매너남 현빈의 어디에 그런 나쁜 남자, 껄렁남 끌어낼 여지가 있단 말인가. 껄렁해 보이려 하면 할 수록, 껄렁해 보이려고 참 열심히 노력하는구나 이런 느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한 데 대사까지 영어로 할려니…어떤 사람인지 모르겠고, 감정 라인이 전혀 안 잡힌다.
영화 보는 내내 장국영 생각이 너무나 간절했다. 아비정전의 첫 장면, 단 한 씬만으로 여심을 뒤흔들어버리는 그런 나쁜 매력. 하기야 그건 장국영 한 사람밖에는 안 되는 거지만.
하지만, 어찌됐든 만추는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극장 꽉꽉 차고. 최소 백만 정도만이라도 가주고. 그래야 김태용이 다음 작품을, 온전히 자기 것인 김태용표 뭔가를 만들지. 그 훌륭한 가족의 탄생이 겨우 20만 넘었다는데, 힘들었겠지. 아티스트에게 흥행은 어려운 문제다. 그래도 하고봐야 하는 것이기에 T_T 하지만, 가족의 탄생은 소중한 영화인데. 김태용 감독도 그렇고. 임권택, 봉준호, 박찬욱, 홍상수…뭐 이런 뾰죽한 산맥들과는 다른 김태용만의 옹달샘이 있는 거다. 맑고 달고, 예민하고 적확하지만 신경질스럽지않은. 개런티받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감독이 아니잖아. 창작이 고통이 너무 힘들어 잠시 돌아간 길이겠지…그렇다고 믿고 싶다. 오늘은 죄다 추측성 발언. 유난히 타블로이드 돋는 밤이군요.
현빈군, 고마워. 이번 주말에만 10만 넘게 들었다는데. 그렇게 떠가지구 김태용 감독이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게 해줘서. 역시, 기특한 자식. (마무리는 알흠답게~)
전대미문의 가족을 탄생시킨 것처럼, 나를 놀라게 하고 전혀 다른 가능성에 기꺼이 끄덕이게 하는 김태용표 감수성을 기대한다. 예민하고 연약하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는 견고한 감수성을. 김태용 감독을 좋아해, 만추보고 열받았음. 애정이 깊어 뜻없는 열받음조차 기록에 남김.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