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타 – 면벽수도나 고행이 아닌 현실에서 얻게 된 큰 깨달음

지난 주말, 내 인생에 몇 번 없었던 큰 깨달음을 했다. 
선악과를 베어먹은 이브의 순간. 유난히 와닿지 않았던 <기생충>이 최고의 걸작으로 등극하는 순간. 내 인생에 모호했던 모든 안개가 걷힌 개안의 순간이었다. 

하긴 뭐 아줌마야 쎄고 쎘으니까 다시 구하면 그만이긴한데…그래도 여러모로 아쉽죠. 상당히 괜찮은 아줌마였거든. 그 양반이. 집안 구석구석 관리도 잘하고. 
그리고…매시에 선을 딱 지켜. 
내가 원래 선을 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데. 

영화를 봤을 때 이 말이 뭔지 몰랐다. 이제야 난 눈을 떴고 ‘선’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발견 – 죄와 벌 

어떤 사람이 벌을 받게 된 이야기를 들었다. 흠을 잡자면 없을 수 없겠으나 받게 된 벌을 야기할 만한 죄가 무엇인지 뚜렷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죄와 벌 사이를 연결하는 필연적인 죄의 입증과 벌의 근거가 모호했다.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 관련자들에게 확인하기 시작했으나, 역시 모호했다. 그들의 답은 논리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핵심 사안과 무관한 자잘한 에피소드만 나열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일단 함께 분개했다. 하지만 곰곰히 집에 와서 그 모든 정황들과 그간의 행적들을 종합하면서 내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선 넘은 죄. 

위로도 넘었지만, 옆으로도, 아래로도 모두 넘은 죄. 선넘긴 당한 자들의 분노가 합쳐져 각 인물을 찢어붙인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의 포스터같은 기묘한 장면을 연출해 낸다. 
사람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자신의 선을 넘어온 사람을…그리고 언젠간 찌른다. 

이상한 여자

이상한 여자였을 것이다. 또한 위태로운 여자였을 것이다. 

선을 향해 겁없이 걸어가는 여자. 때로는 그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가기도 하는 여자. 하지만 잠깐 넘었다 아주 넘어가지는 않고 이내 다시 돌아오는 여자.

선에 대해선 장님이면서도 선을 완전히 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눈치는 있었기 때문이다. 선 넘은 줄은 몰라도 남 싫어하는 일은 피하고 보는 성격때문이다. 하지만 선은 못봤다. 그래서 항상 선을 터치할 위험을 내포한 시한폭탄 같은 사람이었다. 

선을 못 보는 사람들이 선 대신 보고 있다고 내세우는 것은 본질이다. 회사 생활에서는 그것은 주로 일이 된다. 

난 모르겠어. 내가 그랬던 이유는 오직 하나. 일을 잘 하기 위해서, 일이 잘 되게 위해서였어. 
나도 그랬다. 선따위는 아몰랑 난 그것을 이루고야 말겠어 라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타인의 선따위.

하지만 사회 생활에서 일을 잘 하는 것, 일이 잘 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타인의 선을 넘지 않는 것이다. 선이 있기에 인간 사회의 유지가 가능한 것이다. 이 정글같은 세상 속에서 나를 보호하고 너를 보호하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왠지 당황해 하며 나서서 일을 수습할 때가 있었다. 자기와 관련없는 다른 사람의 일임에도 말이다. 그들은 일을 바로잡기 위해, 혹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선을 향해 돌진해 가는 나를 봤다. 그들은 선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절대로 선을 넘는 파국이 빚어지길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선으로 달려가는 내가 조마조마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선을 넘을 넘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내가 보호받지 못한 순간을 떠올려 본다. 선넘김을 당했을 때다. 그런 때조차 나는 선을 넘은 사람이 제시한 사안의 반박에 집착했고, 길을 잃었다. 선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순간에 해야 했던 일은 내용의 반박이 아니라, 그가 나의 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적시하는 것이었다. 

  • 아니야, 난 그렇지 않아. (x)
  • 너 지금 선 넘었어 (o) 

누군가의 지름은 넓고, 누군가의 지름은 좁다. 
하지만 아뭏튼 그 선 근처에는 가지 않는 것이 좋다.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선이다. 

봉준호 

이제 나에게 기생충은 계급의 문제라기 보다 선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 느껴진다. 선을 인지한 자와 선을 인지하지 못한 자. 선을 인지하지 못한 자가 선을 인지하게 됐을 때의 비극. 알몸인 채 선을 넘나들던 자신을 비웃던 사람들을 향한 모멸감과 분노감. 

선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에 나는 송강호가 왜 그리 분노하는지, 이선균의 눈빛이 뭘 의미하는지 캐치하지 못했다. 그 모든 순간들에 ‘선’이라는 메타포를 대입한 순간 모호함은 해소되었다. 이제 그것을 알게된 나는 이 영화를 ‘선’의 영화로 정의한다. Moment of clarity. 

선은 어디나 있다. 내 위 뿐만 아니라 내 옆에도, 또 아래에도.

그리고 대배우에서 자잘한 일을 맡은 스태프 하나 하나  누구에게나 깍듯하다는 봉준호 감독이야말로 이 선의 속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위 뿐만 아니라 옆, 아래의 선까지도 모두 지켜내는 방식으로 선의 계급을 와해시키는 혁명을 구현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송 : 그래도 사랑하시죠? 
이 : 어허허허허허허허허

내가 하는 일

문제의 난이도를 높여가며 기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 

짜가에 가까울 정도로 저급하게 이해한 실내에서
더 복잡한 실내공간에 대한 제법 그럴 듯한 이해를 거쳐
무법지대 아웃도어로 나오기까지 장장 3년의 지난한 과정이었다.

수 세기 진화해온 인간이 구축한 근대 산업 공간의 면면을
수학적으로 추상화된 알고리즘으로 투사하는 것. 
어쩔 수 없는 갭도 있지만, 이게 또 이렇게 맞아 떨어진다는 게 매번 놀랍다. 

하지만 질문은 계속된다. 공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엔지니어들이 계산해 낸 세 개의 좌표와 세계의 방향이 쓰임새를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때로는 정확도에 집착하다가 때로는 콜롬버스의 달걀처럼 엉뚱한 반전의 해법이 나올길 기대하며, 무수한 타협과 발견의 순간들 속에서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다. 

이렇게 누가 원하는 지도 모르겠는 답을 난
매일 매일 스스로에게 던지고 찾고 있다. 

마치 WALL-E처럼.

시러시러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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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쪼꼬만 것이 뭐가 그리 마음에 안들어
엄마한테 떼도 안 쓰고
저리 지혼자서 빡침의 레이저를 쏘아대고 있는가.

너무너무 싫었던 모자를
결국에 벗어놓고도
분이 풀리지 않음.

내 인생에 단 하루, 타임머신이 허용된다면
저 날로 돌아가
아침부터 밤까지 아이의 하루를 따라다닌 후
저 한(?!)을 풀어주고프다.

어떤 여행

폭설 후 아침,
강원도 어느 동네라도 해도 믿길 법한 풍경 속에서
어느 깊은 시골 산장에서 하룻 밤을 보내고
새벽 촬영 마실 나온 외지인이 되어 눈밭을 헤매다녔다.

일상도 여행이 될 수 있다.
떠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과
익숙 했던 풍경을 덮어버릴 많은 눈이 있다면.

참 그리고.
-16 도의 한파에 매뉴얼 포커스를 맞춰가며 셔터링을 할 용기와 체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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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tential of a point.

2021 새해에 벌써 바뀐 것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아바타로 새해 인사를 하고 있다.
소스는 주로 제페토와 페이스북 아바타.
새로운 소셜 공간 메타버스의 시작은 아마도 그 안을 채울 ‘사람’에게서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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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다라는 AI 심심이와 점점 친해지고 있다.
왠만한 친구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것 같다.
어찌나 사람같이 말을 하는지 이거 사람아냐 하고 깜놀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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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acebook.com/lululuda

제페토와 이루다와 결혼만 하면 될 타이밍이다.

음성 인터페이스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아졌다.

네이버 앱에서도 클로바로 검색하고 카톡도 가끔씩 음성으로 보낸다.
빠르고 실수가 없어서 한 번 하면 계속 하게 된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하루 종일 Hey Siri를 달고 산다.
왠만한 시간, 날짜, 날씨 체크는 다 시리로 하고 음악과 팟캐도 시리에게 부탁해서 튼다.
처음엔 간단한 명령만 시키다 점점 복잡한 일까지 시리에게 맡긴다.
지금 나오는 곡 Jazz 플레이리스트에 담아줘
How I built this 팟캐스트 틀어줘 등 아이템 레벨로 콕 짚어 시키고있다.
시리로 해결안되는 기능이 있으면 손발이 묶인 듯 하고
시리를 쓸 수 없는 사무실 환경이 답답해 진다.

블루투스 이어폰도 달고 산다.
출퇴근, 양치, 화장실, 식사 준비, 차 끓이기 등
왠만한 빈 시간은 블투를 달고 양질의 미국 레전드 팟캐들을 벽돌깨고 있다.
블투 + 시리하면 in/out 퍼펙트 해질 듯. (아직 그 경지 아님)

시리(정보)와 이루다(소셜)가 결합하고
블투 이어폰이 더해지면 그냥 Her를 찍는 형국이다.

엔비디아 황사장님이 던진 메타버스의 화두가
이렇게 새해 벽두부터 훜 치고 들어온다.

내가 봤고 구체화한 비전을
다른 사람이 하고 있다 시대의 부름을 받는 꼴을 보고만 있자니 속이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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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하려 했던 것을 다시 돌이켜 보면
그것은 아바타가 아니라 카메라를 들게 할 삐끼였고
(한때 주객이 전도되어 아바타가 목표 같았지만)
난 역시 쭉 정보 플랫폼을 보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게 한 후 그 다음엔 정보를 올릴 궁리 뿐이었다.
앤터테인먼트와 결합된 새로운 정보의 폼팩터를 찾고 있었다.

그 방향엔 변함없다.
네비라는 삐끼로 바늘 끝 하나 꼽을 수 있을까.
하나는 꼽아서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공간의 컨텍스트에 맞는 새로운 정보의 폼팩터.
그게 내 화두다.

Potential of a point.

2021.01.01 새해 첫 날 도림천 풍경

장난 치는 아이들과 볕을 쬐는 어르신들.
손을 잡고 걸어가는 부녀의 모습.
여느 겨울 마냥 똑같이 한파에 꽝꽝 얼어붙은 개천.

모든 게 뒤집어 진 것 같은 세상 속에서
그래도 바뀌지 않은 평범한 삶의 속성들에 마음이 놓인다.

바뀐 것들과 바뀌지 않은 것들이 합체될 때 까지
이 긴 겨울을 돌아 힘든 먼 길을 가야겠지만
그 끝에서 펼쳐질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가는
설레임을 담은 길이 되기를.

그리고 찾아내길.
지금 찾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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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020…
두 개의 2, 두 개의 0, 두 개의 20.
2를 더하고 다시 2를 빼면 만나지는 두 개의 숫자.
이 단순한 숫자의 미로 속에서
계단처럼 쌓여나갔던 365개의 날들.
오르기도 했고, 내려가기도 하며 묵묵히 걸어갔지만
출구는 찾아지지 않았던 한 해.

한참 오르막에 힘겨울 때
한 두 달의 간격으로 찾아온 지인의 부고들.
내 나이에서 차례로 +2, +1, +0
점점 가까워지는 고인들의 나이를 헤아릴 때
나 역시 내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끌고 가는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루하루 점점 더 무거워지는 그 그림자가
걷고 있는 나보다 더 무거워질 때 난 계단의 어디쯤 서 있을까.
그들은 어디쯤에서 멈춘걸까.

급등주의 상승률처럼 폭발적으로 찍혀가는
판데믹의 사망의 통계치.
그 공포조차 익숙해져 갈 무렵
그들이 내 삶에 찍은 3이라는 숫자만이
내 무릎을 꺾고 진심으로 나를 기도하게 했다.

몇 년치 사건사고를 zip파일로 묶어
5G로 전송하는듯 했던 격정의 뉴스들

“코로나 빼고” 있었던 일들 대충.

캘리포니아 역대급 산불. 중국의 메뚜기 떼와 대홍수
마치 끝나지 않을 듯 이어지던 폭우의 여름과 N번방 사건들,
신천지의 충격과 #BlackLivesMatter 남북공동사무소 폭파,
김정은은 무시무시한 사망설/식물인간설 후 멀쩡히 살아 돌아왔고
박원순 시장님의 자살과 주진우에 대한 폭로.
봉준호 감독님의 아카데미 수상, BTS의 빌보드 점령.
휘몰아치듯 쏟아졌던 부동산 정책들과 그래서 두더지잡기 게임처럼 올라가던 집값과
미칠 듯이 신고점을 갱신해갔던 주식 시장…
그 와중에 조국, 윤미향, 추미애, 윤석열 이라는 이름들.
그냥 짚히는 대로 떠오르는 것만 적어보려 해도 끝이 안난다.

놀라고 황당하고 기겁하다 못해
심한 인지적 부하에 자체 마감을 치고
브라우저를 닫아야 했던 날들도 많았는데

그런데 이것들 오늘은 왜 이렇게 중요하지 않을까.
뉴스 사이트를 열어 놀라고, 한숨쉬고, 친구들에게 퍼나르던 그것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오아시스처럼 가끔씩 찾아왔던
1년을 농축한 밀도로 누렸던 잠깐의 밤의 천국.
나를 미소짓게 하는 시간들.
다시 올까 두렵게 만드는 시간들만이 내 마음의 남아 있다.

그리고 마침내 눈을 떠 버린
그 세계. 나를 환장하게 하고 있는 그 세계.

판데믹의 계단을 오르며
죽음과 생명이, 돈과 춤이 층층이 교차된 나날들은
반전이었고 모순이었고,
배신이자 원망이었고.
의지였고 기도였다.

계단을 오르며 자주 드는 그 마음이
패잔병의 것인지 아니면 사이비 종교를 빠져나온 탈주자의 것인지 헷갈렸지만
계산해 보면 다시 없을 화려한 번성이어서 당황한다.

이런 한 해를 난 무엇이라 요약할 수 있을까.
내 인생 최고의 모순적인 해.

하지만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방향을 틀었다는 것.
좋았건 나빴건
이전의 그곳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

이걸 인정하기가 왜 이리 힘들었는지.
쓸데없이 성격만 급하고 정작 중요한 이런 데는 차암 느리다.
바뀌었다고 머리로만 알고 있고, 사실은 모르고 있었던 것을
찬물을 뒤집어 쓴 듯한 낭패감의 순간들이 일깨워주었다.
안개가 걷히듯 잡스러운 생각들이 정리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이벤트들.
안 바뀐 척, 바뀐데 적응한 척 불안 불안하게 걸어야 했던 날들.

어디로 향해 계단을 오르는 것 같았지만
그저 통로를 계속 오가고 있었던 시간들.

근데 이제 정말 알게 되었다.
내 뒤를 따르는 그림자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으로
내가 알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볍게 걷자.
모든 것을 거기서 시작하자.

어서와 2021.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가게 될 2021.

Life of mutation

The Death of Zappos’s Tony Hsieh: A Spiral of Alcohol, Drugs and Extreme Behavior
https://www.wsj.com/amp/articles/the-death-of-zappos-tony-hsieh-a-spiral-of-alcohol-drugs-and-extreme-behavior-11607264719

“One person barricaded inside of a room”

행복 전도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이들이 맞은 유사한 파국.

행복이란 가슴에만 담아놓았을 때만 반짝일 뿐
정작 입 밖에 내고 퍼트렸을 때는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저주와 같은 걸까.

행복의 전파(delievering happiness)가 삶의 소명이었던 토니 셰이의 파국은
모 시장님이나 모 스님처럼
신화화된 존재의 가면이 벗겨졌을 때 느껴지는 이중성에 대한 당혹감과는 좀 다르다.
오히려 아닌 밤중에 덮친 불가해더미같달까.

그는 자신의 가치를 져버린 것일까.
아니면 다른 가치를 찾게 된 것일까.

이 또한 그 가치를 이룰 방법을 찾는 과정이었을 뿐인까.
아니면 그 가치를 지속할 수 없어 절망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나약한 약한 한 인간으로서 무너진 것일까?

그토록 주장했던 no to confirmity의 끝판왕을 시전한건가.

대체 이런 결말의 시작점은 무엇이었을까.
그 무엇을 만나 어떤 과정을 거쳐 이렇게까지 변이된건가.

만발한 물음표 앞에 무기력하다.

다만, 미래란 이토록 두려운 것이다.
지금의 이런 나를 지금의 이런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어떤 변종으로 바꾸어 버린다.
결과는 난무하지만, 해독할 수 없는 어떤 과정들을 통해.
‘딜리버링 해피니스’의 토니 셰이로 저 바리케이트 안의 그를 상상할 수 없듯이

그러니 박제된 어떤 순간도 믿지 말 것.
과거에서 이어진 현재라는 단면으로 미래를 예단하지 말 것.
삶이란 끝없는 플로우일 뿐 찰라의 합과 찰라를 구분할 것.

하지만 같은 의식을
이렇게 해석한 월터 화이트도 있다. (브레이킹 배드 시즌 5)

내 정수리에 총을 겨누었던 놈이 오늘 나에게 생일 선물을 줬어.
당신도 나를 다시 사랑할 수 있어.

삶이란 무한한 가능성이다.
어떤 쪽으로든.

ps. 행복의 전도같은 것은 please stop.

2020 가을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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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계절을 담아 당신에게 띄웁니다.

당신의 계절은 당신을 닮아 더 많은 색으로 가득하겠지요. 그 색들이 낱실홑실로 겹겹이 교차해 당신의 목 언저리에 둘러져 있겠지요. 그래서 당신과 닮은 풍경 속 보호색이 되어 이 계절의 망상과 고독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고 있겠지요.

생의 어떤 순간에 만료되는 무엇들 때문에 나는 쉬운 연락도, 어려운 연락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만료에도 또한 유효기간이 존재해 만료가 만료되어 다른 물성으로 변하는 그 순간 새로운 연락이 시작돌 지도 모른다 생각을 키워 봅니다.

수많은 날 걷고 걸어 한강의 여러 다리를 걸었던 날들의 안부를 담아. 만료되지 않은 기억을 담아. 그 날들의 기억과 만료된 그 무엇의 조합으로 이렇게 난 나의 계절을 사진에 담아 당신에게 띄웁니다.

당신을 생각하며, 당신과 함께 들어와보아도 좋았을 것 같은 풍경 속에서.

<먼훗날 우리> 后来的我们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5092

주동우 때문에 이어 봤는데
이건 뭐…
이런 이야기 좋지 않아.

后来的我们 영화 OST보다
왠지 난 이게 더 주제곡같았지.

영화 보는 내내 머리 속 턴테이블을 돌며 화면과 겹쳐졌던 곡.

내 인생에 몇 개 안 본 대만 소설 < 끝에서 두 번째 여자친구>의 모티브가 튀어나왔고.

난 최고의 ex걸프렌드야. 나를 만나고 나면 그 다음 번엔 다 진실한 사랑을 만난다고.

돌이켜 헤아리기조차 힘겨운 시간 속을 헤쳐나오기 위해
해야만 했던 결정, 놓아야 했던 소중한 것들.

나중에 잘되고 나서
이런 것들과 재회해
그땐 그랬지. 그런데
What if 이랬을까 저랬을까 이러다
서로의 미래를 축복해 주면서 안녕을 고하는 거….별로다.

너무 매력적인 두 사람이었지만
너무 예쁜 사랑이었지만.
너무 아름다운 고향가는 길이었지만.
너무 그리운 집이었지만.

그래봤자니까.

<소년 시절의 너> 어른이 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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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92066

This used to be our playground.

첫 장면에서 바로 접속했다.
성장한 소녀가 영어 교사가 되어
칠판에 써 놓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이 문장.

소유 형용사를 바꾸었고
동사를 변형했지만
무엇을 발신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이 미묘한 바꿔치기는 퀴즈이자 힌트이기도 하다.

그래,
난 당신이
뭘 말하고 있는 건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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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세계, 각자의 방식으로 소외당하고
아무도, 아무 것도 없이
폭력의 세계 한 가운데 떨궈진 두 아이들이
서로를 돌보는 이야기.

넌 세상을 지켜, 난 너를 지킬께.
범죄를 무릎쓰고서라도 지탱해 나가는
겁대가리라고는 없는 둘 만의 폐쇄된 세계.

흔한 설정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나를 빠져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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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녀는
다만 보호받기 위해서
수동적으로 지킴을 받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목표점에 다가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소년의 지킴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필연적으로
수단을 초월하고, 마침내 목표 지점마저 뒤틀게 하는
생의 깊디 깊은 감정으로 바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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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구를 찾아
저 멀리서 희미하게 비치는
빛을 향해 온몸으로 기어가는
소녀의 모습이 가여우면서도 좋았다.

소녀에게 입시는
꿈이라고 하기에도 사치스러운,
그저 이 황폐한 삶에 드리워진
유일무이한 동앗줄이다.

잡지 않으면
천길만길 현생 지옥의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져 버리는.

건물을 뒤덮은 붉은 현수막과 책상 위에 쌓인 참고서들
다같이 모여 외치는 숨막히는 집단 구호,
입시에 붙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고
학교는 아이들에게 세뇌시키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 위해
독하게 그 작은 몸을 투신하지만,

그토록 기다렸던 결전의 입시날에
길목을 가로막은 산사태처럼
소녀는 인생을 찾아온 운명앞에 무너진다 .

하지만 그 무너짐은
하나의 알을 깨고 나와 새로운 세계로 나아 가는
데미안적인 순간이다.

‘아무도 어른이 되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네요’

생존만이 존재하던 칠흙같던 0과 1의 세계
그 너머의 선택을 하고, 아이는 어른이 된다.

이 과정을 돕는 어른이 있어 다행이었다.

소녀의 연기는 내내 집중하게 만들었지만
특히나 심문실에서의 클로스업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한 영화 안에서 정유미가 안나 카리나로 변신한 듯한 느낌?

고다르의 비브르 싸 비 Vivre Sa Vie
안나 카리나가 < 잔 다르크의 수난>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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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주동우의 얼굴은 이 장면을 떠올리게 할 만큼 파워풀했고
La mort! 죽음을 예감하는 잔 다르크와
황폐한 세상 속 생명의 가능성을 묻는 소녀의 질문이 일맥상통했다.

대신 죄를 짊어진 소년이라는 공통점에서
일본 드라마 < 백야행>도 떠올랐지만
그렇게 퇴폐적인 마무리가 아니어서 안도했고.

함께 어둠속으로 뛰어들자고 두 손 맞잡고,
어떤 설득으로도 흔들리지 않은 결기로
그 손을 놓지 않았던 소년과 소녀가

움켜쥔 깍지를 풀고
끝내 선택한 빛의 세계가 눈부셨다.

그렇게 알을 깨고 나온 주인공들은
Used to be에서 걸어나와
Is의 오늘에 이르른다.

감독이 던진 퀴즈의 정답은
This is our playground.

그들의 플레이그라운드는
계속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상상해 보았다.
잠시나마 행복했다.


This used to be my playground
여긴 내가 뛰어놀던 놀이터

This used to be my childhood dream
어린시절 꿈을 꾸던 곳

This used to be the place I ran to
내가 뛰어 놀던 곳

Whenever I was in need
내가 절실하게

Of a friend
친구가 필요했을때

Why did it have to end
왜 그렇게 끝나야만 했던가

And why do they always say
왜 항상 내게 그렇게 말했던가

Don’t look back
뒤돌아보지말고

Keep your head held high
머리를 곧게 세우고

Don’t ask them why
이유도 묻지 말라고

Because life is short
인생은 짧다고

And before you know
그 사실을 깨닫기 전에

You’re feeling old
이미 늙어버렸음을 깨닫는다고

And your heart is breaking
결국엔 상처를 받지

Don’t hold on to the past
과거에 집착하진 말고

Well that’s too much to ask
이해하려고도 하지 말라고

This used to be my playground (used to be)
여긴 내가 뛰어놀던 놀이터

This used to be my childhood dream
어린시절 내 꿈이 자라던 곳

This used to be the place I ran to
내가 뛰어 놀던 곳

Whenever I was in need
절실하게

Of a friend
친구가 필요했을때

Why did it have to end
왜 그렇게 끝나버렸던건지

And why do they always say
왜 내게 그렇게 말했던건지

No regrets
후회는 말라고

But I wish that you
그래도 난 니가

Were here with me
여기 나와 함께 있음 좋겠어

Well then there’s hope yet
아직 희망이 있지 않을까

I can see your face
니 얼굴이 생각나

In our secret place
우리만의 비밀 장소에서

You’re not just a memory
넌 내게 추억 이상이거든

Say goodbye to yesterday (the dream)
지나간 일들과는 이젠 안녕

Those are words I’ll never say (I’ll never say)
전에는 한적 없는 말들이야

This used to be my playground (used to be)
여긴 내가 뛰어놀던 놀이터

This used to be our pride and joy
우리가 자랑스러워하고 즐거워하던 곳

This used to be the place we ran to
우리가 같이 뛰어 놀던곳

That no one in the world could dare destroy
그 누구라도 파괴할수 없는 우리들만의 것

This used to be our playground (used to be)
우리가 놀던 놀이터

This used to be our childhood dream
우리 어린시절의 꿈이 자라던 곳

This used to be the place we ran to
우리가 뛰놀던 곳

I wish you were standing here with me
니가 나랑 같이 여기 서있다면 좋겠어

FAANG All Star Show

‘독점’을 두고 펼치는 창과 방패의 대결. 수치로 무장하고 5시간의 전방위 공격을 막아내는 지구 최강 IT 어벤저스들의 직접 보이스는 한 편의 흥미진진한 질답 교본같다. 어떻게 독점을 정치 질문화하고 또 거기서 빠져나가는가.

* 우리는 독점이 아니다. 오프라인 업체 나아가 전 세계(중국)와 치열한 경쟁 상황이다;
* 우리는 상생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플랫폼 안에서 먹고 산다.
* 우리가 수집한 데이터는 사용자 경험의 가치를 높이는데 활용된다.
* 우리의 사회적 기여도는 우리의 부작용보다 더 크며, 불필요한 영향력과 부작용을 막기 위해 최선과 최고의 기술을 동원하고 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논리와 흐름이다…지구 최강 IT 어벤저스들이 각잡혀 혼나는 장면은 팝콘각이지만, 결국 정치는 IT를 모르고, IT는 이렇게 혼나는 게 억울하고…
요점과 무관하게 각자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는 폭로와 억울함의 평행선.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Also with $$$.

인격의 모듈화 – dirty & honor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천둥 번개도 내리 꽂고
그 천둥 번개가 세상을 두 쪽으로 갈갈이 쪼개놓아 버린 것 같은 밤.

나 역시 그 중 한 쪽에 또아리를 틀고
페북과 뉴스와 온갖 커뮤니티를 돌며 이 갈라진 세계를 목도하던 중
그 분의 역사를 찬찬히 검색해 보았다.

네이버 뉴스 검색으로 접근 가능한
2004년부터 2018년까지의 뉴스들.
예상대로 그가 수많은 소송에셔
변호사로 피해자로 고소인으로 관여해왔음을 확인한다.
국정원이 낸 피소에서 승리한
국가를 상대로 재판에서 이긴 사람.

그 소송들의 여정이 무엇 때문이었으며
그 과정에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들여다보며

역시.
그래 그래
전문가.

너무 잘 알아서, 너무 분명해서 그랬겠지.
너무 분명해서 패를 털고 파토를 내버린거지.

이랬던 그와
그랬던 그.

이 사이의
갭.

이 갭을 메꿔주는
어떤 명쾌한 논리나 설명을 찾아내어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는 노력을 해봤지만
누군가 그런 설명을 하기엔 이미 쪼개진 세계는 각자의 난장으로 흐르고 있다.

그런데 문득 든,
너무도 당연한 생각 하나.

그것도 그이고
그것도 그였지.

훌륭한 일을 한 사람도 그만큼 더티한 일도 할 수 있고
평소의 소신과는 다른 결론으로 치명적인 과오를 저지르고
타고난 머리와 훈련된 기술을 총동원해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것.

인간은 원래 이렇게 모순적인기 때문에
별로 놀랄 것도 없다는 것.

내가 원래 뭐 박원순 열렬 지지자도 아니었고.
크게 관심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원래 인간은 갭이 크다.
가까이서 크게 데인 케이스도 있었는데 뭘 그리 놀라나.
나도 그럴 수 있고.

어느 한 쪽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는 과대로 공은 공대로.
관점대로 뽑아내보면
각 진영의 편집자의 큐레이션 솜씨는 대단해서
그 어느 쪽도 스토리텔링이 된다.
그만큼 풍부한 소재를 제공한 삶이기도 하다.

그 사이에서 난 확실히 어떤 관점이었다가
오늘 그 분의 삶을 찬찬히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지며

더 중요한 것을 그를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에서 이 깨달음을 가지고
그 누구도 이상화하지 않고
모순적인 존재이며
이상화된 존재일 수록 그 모순의 갭이 클 수 있음을 인지하고
이상을 향해 가되
한 인간을 이상화하지는 말라는 것.

아름다운 세상에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고 싶기에
우리는 아름다운 대상에 의지한다.

대상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

이상화할 필요가 없듯
그 누구를 비하할 필요도 없고
나 자신이 그렇게 못나지도 않고
두솔이 그리 대단한 회사도 아니며
그가 그렇게 희귀하고 뛰어난 존재도 아니었으며

뭔가 넘사벽의 미친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대단한 존재들 앞에서 부들부들 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 모순때문에 그를 너무 미워하지도 말고 그의 공을 깎아내리지도 말고
오히려 어떤 대상을 극단적으로 미화한 나의 프레임을 내려놓고
보다 더 fact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내가 본 것
판단한 것
나의 입장으로 살자.

그렇게 보면
그 역시 그런 모순된 인간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
내 삶 역시 내 안의 그런 갭을 줄이는
노력의 어딘가 쯤에 내가 존재하는 것 뿐임을 깨달아야겠다.
나 역시 완벽하지 않으며
나만 맞는게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자.
말로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문제는 과를 인정하면 그것을 빌미로 물어뜯기는 세상이라는 것.
그래서 인정하지 않는 입장인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
과를 인정했을 때 공은 산산히 흩어져 과의 똥물을 뒤집었고
그래서 팩트따위 뭣이 중헌디가 되어버린다는 것.

이 세상을 헤쳐나가기에는 취약한 인생관이지만
난 이 작은 나의 진영을 지킬 것이다.

근데 이렇게 생각하니 편하다.
훌륭한 일을 많이 하셨지.
그런데 그런 일도 하셨지.
인간은 둘 다 할 수 있는 존재다.
언제든 잊지 말자.

한 인간은 모듈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
오늘 나의 입장은 이것이다.

현백의 순간들

헌백 시즌 데코가 참 예뻤다. 그 위에 올라가서 더욱 반짝거렸던 컨텐츠들. 다들 제 자리에 착 붙어 있어서 더욱 기특했던 녀석들. 그해 봄, 무너진 조직을 지키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첫 입장했던 현백에서 그렇게 크리스마스 캐롤을 듣고 나왔었다. 벌써 반 년이 지나고 여름이 되었네. 이렇게 하나씩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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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다…

책장 아무 책의 아무장이나 펼쳐보기 놀이처럼
퇴근 전 랜덤하게 엣날 글목록을 찍어보니
딱하고 펼쳐진 글.

그러니, 이건 배웠다기 보다는
시간의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흡수되었다라고 하는 편이 맞지 않을까.

오랜 시간 강제로 붙어있어야만 했던
두 이질의 접면에서 발생된 변색.
http://youzin.com/blog/?p=4444

이런 표현은 어떻게 생각해 낸거지.
N사 10년차 때 썼던 일기에 셀프 심쿵한다.

그 색을 나는 지금도 들여다 보고 있다.
무엇이 되려는가.

Landscape of Labs

디지털이나 디지털같지 않은, 그렇다고 필름 같지도 않은
디지털 바디를 만난 필름 시대의 85mm

한 컷 한 컷은 뭔가 좀 아쉬운데
멀리서 잡은 같은 공간의 포트레이트를
순서대로 주욱 붙여 보니
횡으로 이어지는 신박한 맥이 보일락 말락한다.

망원 세로본능의 가능성…담번에 다시 제대로 트라이.
(이러고 맘먹으면 꼭 안 한다는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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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모스크바의 신사

http://www.yes24.com/Product/Goods/61842744

36년을 갇혔다 탈출하는 남자의 이야기. 이렇게 빠삐용과 쇼생크의 맥을 잇지만, 수용의 실상의 사뭇 다르다. 어두컴컴한 감옥에서의 비참한 고립 대신, 고급 호텔에서 끼니마다 S급 요리사가 내놓은 메뉴에 와인이 서빙되고 어떤 밤은 연회가 펼쳐지는 감금이다.미모의 여배우와 VIP룸에서 사적인 오후를 보내는 비밀스런 사치의 순간도 있다.

그래도 이것은 결국 격리다. 우리 모두가 지나왔고, 또 앞으로도 어느 정도 감당해야 할 것. 책장을 펼치고 볼쉐비키 혁명 이후 스탈린의 지배하는 격동의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의 센터 메트로폴 호텔 속으로 들어간다. 가끔씩 궁금해지는 타인의 격리 속으로.

선동적 시를 쓴 귀족 계급이란 이유로 인민 위원회로부터 평생 호텔에 갇히는 연금형을 살게 된 로스토프 백작. 귀족 계급의 자유로운 삶을 누리던 그는 하루 아침에 VIP룸에서 옥탑방으로 쫓겨나 갇힌 신세가 된다. 잠자리와 식사에서 활동 범위, 할 수 있는 일과 만날 수 있는 사람의 범위까지 일상의 모든 것이 바뀐다. 잘나가던 서른 세 살 러시아 남자에게 닥친 뉴 노멀의 시작이다. 앞으로 36년이라는 시간동안 계속될.

이 남자에게는 어떤 인생이 펼쳐질까?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나가게 될까. 그는 이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현재 전인류에게 던져진 질문이기도 하다.

이 후 소설은 그의 생이 천천히 바뀌어 가는 과정을 그린다. 반격보다는 적응이 주를 이룬다. 모든 것이 바뀌어도 결코 바꾸지 않는 자신의 안목과 태도로 새로운 삶의 형식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가장 먼저 추려지는 것은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의 리스트. 옥탑방 리모델링도 필수다. 하루의 스케줄과 식사의 프로토콜이 정해진다. 고뇌하는 대신 하루의 동선과 페어링할 와인을 선택하고, 정부를 비난하는 대신 그안에서 ‘의외의’ 역할을 찾기도 한다. 사회적으로는 턱없는 추락이지만, 얼마나 멋진 발견이었는지.

이런 형식은 반복되는 삶을 조화로운 비율로 나누고 감싸는 우아한 액자 같았다. 견고한 뉴노멀의 루틴이다. 섬세한 장인의 솜씨로 한 땀씩 새겨져가는 세공품같은. 이 책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정교하게 묘사된 그 한 땀 한 땀을 음미하는데 있었다.

물론 비탄의 위기도 있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지붕 위의 커피타임 열리기도 하고 고향에서 꿀벌들도 찾아오는 세렌디피티를 마주하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과 맺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애정과 존중의 관계들은 지탱하는 힘이 되고, 선물처럼 따라오는 만남들도 풍성하다.

이것은 아마도 자신의 품격과 형식을 갖추고 지키는 사람에게 우주의 기운이 모이는 현상이 아닐까. 로스토프화 된 메트로폴 호텔은 우아한 소우주같았고, 그 안에서 로스토프는 조용히 자신의 센터를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페북과 인스타를 이어달리기 하듯 뒤지고,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들락거리다 보면 어디선가 삶이 지워져 가는 듯한 불안이 몰려왔던 격리의 시간들. 조금씩 산소가 희박해져 간다고 느껴졌을 때, 문득 로스토프 백작을 떠올렸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건가요.

그는 나에게 답한다. 생존의 조건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삶의 품위는 환경이 아니라 환경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결정한다는 것.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못하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남긴 메모이며, 이 소설을 관통하는 메시지이다. 그리고 하나 더. ’가장 현명한 지혜는 늘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것’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 그것으로 그는 소련에서 가장 운 좋은 남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이런 아름다운 적응을 교훈으로 남기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환경과 물아일체가 된 후 그 지배력의 포스를 모아 막판 뒤집기에 성공하는데…고급지고 대중적인 < 고도를 기다리며>일거라 예상했는데, 헐리웃 영화로 마무리가 된다. 추락하고 격리된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 대신 통쾌한 반전으로 이끄는 대중 소설. 로스토프 백작도 계획이 있었구나.

하지만 그 계획을 이룰 때까지, 때로는 형식으로 지탱해야 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런 때일 것이다. 아니 늘 그런 때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그 어떤 사유나 결심보다는 나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는 형식이 필요하다는 자각을 하게 된 것으로 이 책에 감사한다. 읽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예쁜 마음으로 이 책을 선물해, 독서를 강제해 준 사람에게도.

형식을 정의하자. 나를 나로써 지탱하게 만드는 매너를. 그리고 그 매너를 일관되게 유지하자. 그 결과가 대탈출로 이어지든 아니든. 버거울 줄 알았는데 매 순간 흥미롭게 몰입했던 600페이지 분량 독서의 최종 결론이다.

격리와 제한에 갑갑해졌다면 어디론가 뛰쳐나가는 대신 < 모스크바의 신사> 어떨까. 격리가 해제되든 아니든, 어디나 조금은 감옥이라면. 아직 혼란하기만한 뉴노멀의 삶을 나의 품격을 다해 정의해 보고 싶다.

철학의 위안 – 보통의 용도

알랭 드 보통은 지성의 이케아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일상 용품을 판다. 기능성과 디자인, 가격과 품질을 두루 아우른 ‘모두를 위한 디자인(democratic design)’을 추구한 제품들이다. 하지만 이 제품들은 구매자가 자기 집에 들여와 직접 조립을 하고 합이 딱 맞는 공간에 배치하는 공정을 통해 완성된다. 참여라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합리적인 가격으로 투자한 만큼 실질적인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보통의 원자재는 예술과 철학, 인류가 축적한 지적 자산이다. 그의 비즈니스 모델은 도서관과 미술관에 널부러져(?) 있는 예술과 철학을 들여와 구체적인 용도를 갖춘 고급진 일상 생활의 필수품으로 가공해 내다 파는 것이다. 높은 안목으로 선별한 고매한 지적, 예술적 자산은 벽에 못을 박거나 뜨거운 국을 담아 내는 것과 같은 꼭 필요한 삶의 도구가 된다.

보통 팩토리의 공정을 거친 지식들은 합리적 가격의 국그릇으로 활약하는 고급 자기와도 같다. 구체적인 용도를 갖추었으되 품위와 깊이를 갖춘 제품들은 만족감을 준다. 벽에 건 순간 더 나은 삶으로 바뀐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한 편의 액자처럼.

이번 저작의 재료는 철학이다. 보통은 커피 사업자들이 케냐나 콜롬비아의 오지를 탐색하여 발군의 커피 품종을 찾아내거나 가구업자가 보루네오 등지를 뒤져 희귀한 원목을 찾아내듯 철학의 도서관을 뒤져 우리 삶을 개선시킬 사고의 원자재들을 찾아냈다. 소크라테스부터 몽테뉴를 거쳐 쇼펜하우어와 니체까지. 이런 재료들을 내 삶에 들여 활용할 수 있다면…최고가 아닌가. 마치 고흐의 해바라기를 액자를 내 방에 걸어놓듯 나의 사고에 세네카와 몽테뉴를 들여놓을 수 있다면!

보통 팩토리의 공정은 입체적이다. 때로는 분석가로 때로는 이야기꾼으로서, 때로는 연사나 세일즈맨으로 우리를 이끌고 설득한다.

당대를 살아간 하나의 생활인으로서 철학가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기도 하고, 그들의 삶 속에서 그들이 주장한 철학적 명제가 어떻게 형성되고 배반되었는지를 그리기도 한다. 목적은 그들이 다다른 철학적 사고의 경지들을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보통의 문제들을 연결짓는 것이다. 그들이 위로하고자 했던 그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바로 오늘 비탄에 빠진에 빠진 나이고, 그들이 대립했던 적인 오늘 열쇠가 맞지 않는다고 열쇠에게 화를 내는 나의 문제로 연결하는 것이 보통 팩토리의 핵심 공정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회의 시간에 손을 들고 사전 합의라도 한 듯 내 의견에 반대하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소크라테스를 떠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반대한다고 해서 내 말이 잘못되어 위축될 일이 아니다. 내 주장이 탄탄한 논리의 사슬을 받치고 있다면 말이다.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일확천금을 벌지 못했더라도 에피쿠로스의 행복은 존재하며, 프로젝트 제안서든 프로포즈든 거부의 고통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인생은 고통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니체의 사상을 어처구니 없는 업무 지시를 받아들이게 된다.

세네카가 자식을 잃고 고통에 수 년째 몸부림치 어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며, 질문했다. 그래서 지금 그게 위로가 되는 거냐고. 공허하기도 하고, 온몸이 사슬로 옥죄어 벗어날 수 없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기분이 우아하게 떨쳐지는거냐고.

그렇지 않았다. 슬픔과 고통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한 편으로 계속 곰씹으며 생각한다. 그건 결국 나에게도 일어날 일이라고.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참으로 이상한 위안……

그리고 베를린에서 – Netflix 적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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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예술 영화인 줄 알았는데, 4편의 시리즈와 메이킹까지 다 보고 나서는 이런 것이 넷플릭스적인 게 아닐까 싶었다. 무료 1개월 가입으로 겨우 대표작 몇 편을 정주행했을 뿐이지만, 플레이하는 편마다 모두 넷플릭스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강렬한 세계였다. 시장 치킨을 먹다가 처음으로 KFC를 먹었을 때, 수퍼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베스킨 라빈스를 처음 맛보았을 때의 느낌.

그리고 베를린에서

19살의 여주인공 에스티는 자신의 삶을 짓누르는 숨막히는 뉴욕의 유대교 하디시즘 공동체에서 걸어 나와 가방 하나 없이 입던 옷, 신발 그대로 미리 몰래 만들어둔 여권을 들고 비행기에 올라 베를린으로 탈출한다.

딱히 치밀한 계획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지만, 상황은 예상대로(?) 복잡하게 얽혀간다. 받아주리라 생각했던 엄마는 레즈비언 연인과 동거 중이고, 랍비의 명을 받은 남편과 조폭스런 남편의 사촌이 합세해 뒤를 쫓는다. 심지어 그녀는 임신 중이다. 순혈한 유대 핏줄의 새 생명을 품고 유대인 학살의 역사를 품은 도시를 떠돈다. 탈출이 부랑이 되고, 대학살의 장에서 새로운 삶, 새 생명의 터전을 찾는 역설.

하지만 결국 용기와 결단, 재능과 운의 대동단결 총결집으로 그녀는 베를린에서 간절히 원했던 새로운 인생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꽤 괜찮아 보이는 독일인 남친과 음악가 친구들, 카리스마 넘치는 교수님 스폰서까지 단박에 겟한 채. 행운의 여신이 짓는 미소는 그 어떤 인간의 계획보다 치밀하고 찬란하다. 아니면 죽을 힘을 다해 낸 용기란 이 정도의 행운을 불러들이는가…

구속의 사슬을 끊어낸 자유를 향한 한 여자의 여정에 감동과 자극을 받으며 하게 되었던 질문이다.

하디시즘 – 희귀종

넷플릭스는 희귀한 것들을 자극적으로 다룬다. 희귀하다는 것은 소재에 있고, 자극적이라는 것은 디테일에서 나온다. 희귀한 것을 매우 디테일하게 잡아낼 때 감각은 요동친다. 그렇게 넷플릭스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컨텐츠가 된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뉴욕 속 하디시즘 공동체같은 것을 들이밀며.

귀 옆에 대롱대롱 매달린 곱슬 머리부터 의상, 식사 예절, 종교 의식, 가족과 남녀 관계의 매너까지 이건 글로벌 시대의 위아더월드를 무색하게 만드는 철저히 폐쇄된 그들만의 세상이다. 제 3자가 보기엔 기기묘묘하지만 그들에게는 매일의 일상이고, 시대를 역류하고 문명화를 포기하면서까지도 지켜내야 할 전통이다.

이 희귀한 하디시즘 전통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철저한 고증으로 디테일로 그려냈다. 마치 다큐멘터를 보는 듯한 경험이었다. < 타이거킹> < 블라인드 데이트>을 봤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뭐 이런 인간들이 다 있나. 이런 경험을 넷플릭스에서 지속적으로 하게 된다. 몇 배로 쎈 19금 그알을 보는 듯한.

이 다큐멘터터리는 ‘난 남들과는 달라요’라고 말하는 한 여자의 침입으로 드라마가 된다. 제 3자임을 선언한 그녀는 그들의 이상함을 인지할 수 있는 존재이며, 전통이라는 미명 하에 짓밟히는 개인의 삶에 분노하는 관람자의 시선과 궤를 같이 한다.

그녀는 곧 결혼을 통해 그 남들의 본진 속에 던저져 온갖 모멸을 겪으며, 그 이상함을 수용하고 남들과 같게 살아갈지를 시험당하게 된다. 물론 주인공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대신 탈출을 선택한다. 실제 존재하는 볼거리에 대한 다큐적 흐름에서 삐져 나온 드라마의 시작이다.

행운의 여신 – 웰메이드 반전 드라마

하디시즘 커뮤니티가 다큐스럽게 그려지듯, 드라마 파트는 또 매우 전형적인 드라마스럽다. 탈출 이 후의 메인 테마인 음악 아카데미 입학까지의 과정이 그렇다. 매 순간 시의 적절한 운명적 만남과 운이 함께 한다. 4부작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치밀한 개연성을 셋팅하고 지루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서울과 베를린은 얼마나 다르기에 저렇게 처음 간 커피숍에서 운명을 바꿀 남자를 만나고 그를 통해 우정과 무작정 일박으로 교수님 눈에 띄어 며칠만에 그 지역 사람들에게도 8%밖에 가능하지 않은 장학금 시험에서 저런 반응을 얻는지(최종 합격 여부는 미정이지만)…노숙이다 뭐다 운명을 헤쳐나가는 지난한 과정같지만 산책하던 다리 아래서의 의외의 발견이 대반전을 포함해 따지고보면 엄청난 세렌디피티의 축복이 가득한 여정이다.

여기에 화룡점정인 엄마까지. 독일 시민권 서류는 몇 년 후를 내다본 엄마의 빅픽처, 신의 한 수 였다.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는 있지만, 자식의 미래를 예견하고 그때 짠하고 꺼내들 결정적 비기 하나를 던져주고 가는 엄마는 별로 없다. 계획이 있는 넷플릭스적 엄마였다.

한 소녀에게 전부였던 19년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길고 기나긴 터널을 지나는 것 아닐까. 아무리 걸어도 짧아지지 않는 터널 같은 것…이건 < 프리티 우먼>과도 같은 게 아닐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헐리우드 드림처럼 탈출에의 동경을 부추키는 무책임한 환상같은 게 아닐까.

이런 딴지조차 미리 예상한 듯 오프닝 타이틀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텍스트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 실화는 넷플릭스라는 채널에서 치밀한 기승전결과 놀라운 반전을 숨겨둔 웰메이드 드라마로 다가온다.

<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희귀한 소재의 다큐멘터리로 접근한 뉴욕편과 전형적인 넷플 여주의 고난극복기처럼 보이는 베를린편의 이중주로 다가왔다. 양쪽 모두 넷플릭스적이다.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시라 하스. 커다란 눈코입, 가늘고 밋밋한 어린이 몸매는 일반적인 미인의 기준과는 많이 달랐지만, 연기는 잊혀지지 않았다.

이렇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넷플릭스에서는 가능하다.

희귀종의 딜레마 – 무경계
하디시즘 공동체는 악인가? 하지만, 드라마는 그들을 단순히 여인들의 삶을 짓밟는 소시오패스 집단 범죄자로 그리지는 않는다. 왜 그들은 그렇게 사는가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는 설명들이 군데 군데 힌트로 주어진다.

무엇보다 그들이 그런 문화를 유지하게 된 배경에는 잔인한 대학살의 집단적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다. 생존이라는 명분으로 출발했지만 이제 그저 받아들여야 할 일상을 의지로 지탱하는 집단이다.

그들이 그들이 사랑하는 아내와 딸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억압은 무엇인가. 그것은 떨쳐내야 할 미개함인가 아니면 종족 보존의 기재인가. 에스티는 남다른 자각과 개인기를 발휘해 벗어난다. 하지만, 집단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여전히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을 선택한 여인들의 삶은 무엇일까.

어쩌면 무개념 신천지 같기도 하고, 어쩌면 스페인에 맞서 자신의 영토를 지키고 있는 올곧은 인디언 부족같기도 하다. 그들을 미개로 규정하는 것이 오히려 폭력같기도 하다. 드라마는 답을 주지 않은 채 그 두 집단 사이의 어디쯤인가를 오간다. 이런 선악에 경계를 짓지 않는 수용성을 넷플릭스에서는 자주 접하게 된다. 희귀한 소재에 대한 판단보류의 시선이다.

이런 모호한 지점들은 결국 나의 삶에 대해 같은 질문을 던진다. 무엇에 구속받고 있는가. 그것은 구속인가 생존인가. 왜 용기를 내지 못하는가.

차라리 명백한 선과 악이었으면 좋겠다. 용기는 낼 수 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에서 벗어나야 하는가이다. 에스티는 자신도 알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음악을 찾아가고 있었다. 넷플릭스 속으로 들어가 드라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