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닷컴

폭염의 수용소

열도. 폭염의 수용소.
발신만 있고 수신은 없는 캄캄하고 숨막히는 열대의 밤.

불볕더위에 온열질환 사망 29명…150명은 중환자실 입원

온열질환자 직업을 보면 노숙인이 아닌 무직자가 452명이었고 기능원 및 관련 기능 종사자가 251명, 농림어업 숙련종사자가 210명, 장치기계조작 및 조립종사자가 115명 등이었다.

열탈진이 1293명으로 가장 많았고 일사병 555명, 열경련 240명, 열실신 185명, 기타 82명 등이 뒤따랐다.

누군가 사천만원 앞에서 미안해 하며 목숨을 던져버린 밤
누군가가 더웠다 추웠다 탈진인가 궁금해 했던 밤
문득 약혼녀가 연락이 끊어져 버린 당신이 궁금한 이야기 와이의 밤
일상의 메시지가 공포스럽게 읽혀버린 순간의 밤

살살 시켜.
아빠 안녕.
거울 속의 나.

어느 날 나는 달을 보며 슬픔과 공포와 무응답의
수용소에 갇히는 것과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갈 곳이 없다.

2018.7. (수) 4:47 am의 메모

이 새벽에 꼬냑 일 잔을 하다보니 집을 되살려야 한다는 마음 뿐이야. 나에겐 그 집이 있어야해. 비록 지금은 기둥도 처마도 지붕도 다 무너져 있고, 집까지 가는 길을 밝혔던 가로등도 깨져 있고, 결정적으로 난 그 집에 가는 길도 몰라. 하지만, 난 어떻게든 그 집에 돌아가야 해.

일단 집에 도착하면, 최소한 내 생에 돌아갈 곳은 생길테니. 일단 거기에 가서 다시 생각해 보자. 레트를 떠나 보낸 스칼렛처럼. 비록 난 그런 쎈 언니랑은 많이 다른 종자지만, 그래도 타라는 같아.

그리고 모든 것은 그 집에서 다시 시작될 거야.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겠지.

또 끝도.

달의 특별함

집이 돌아왔다.

아니, 집에 돌아왔다.

삼 년 전 draft로 매달아놨던 이 글을 publish 하는 것으로 집에 돌아온 소감을 대신한다.

너굴님, xenonix 감사합니다.

—–

하루의 반을 하늘에 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달과 해는 여러 비교를 당한다.

나는 전적으로 달의 편이다. 근데 이게 편을 가를 일인가 ㅋ

난 밤의 인간이고, 달과 훨씬 친하다. 일단 달은 계속 해서 바라볼 수가 있다. 눈이 부셔서 잠시만 바라도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해와는 다르다. 적당하게 부신 빛이 알흠답고 바라보기에 딱 좋은 정도의 광도다. 눈이 아프지 않고, 계속해서 바라 볼 수 있다. 달의 위치 변화와 함께 내가 달을 보는 동안 흘러간 시간의 정보도 정밀하게 느껴진다.

하늘과의 대비도 좋다. 내 눈으론 찬란한 해는 눈부신 푸른 밝은 하늘과의 경계를 짓기 힘들다. 하지만 달은 색깔부터 명확하게 대비된다. 흰 달, 검은 하늘. 흰 달 안의 검은 얼룩들.

그리고 계속 모양이 바뀌어서 매일 봐도 지겹지 않다. 조금씩 달라지는 모양이 늘 생각하게 한다. 내 인생의 그 어느 날과도 다르게 살았던 오늘 하루를.

바라 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달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이 지구 위의 누군가와 공유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대상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다. 계속 바라보기 힘든 해를 보며 너와 내가 같은 해를 보고 있다고 가정하기는 힘들다. 더구나 낮은 일하는 시간이잖아. 아직 한창은 일할 우리들이 낮에 하늘을 보면서 설렁설렁 시간을 떼울 가능성따윈 현실적으로 아주 낮다구. 난 그래!

하지만 달이라면? 밤이라면 말이야. 일을 끝내고 집으로 오는 길. 술을 마시는 야외의 포장마차. 술집의 나 있는 창문….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 떠들어대는 테레비전도 심심하고 지겨워서 달을 보면서 컹컹 짖고 싶다면 말이야. 마침 그 하늘에 눈이라도 내리고 있다면 말이야. 눈이 내리는데 달도 떠 있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라면 말이야.

그러면 달이란 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너와 내가 공유하는 유일한 것일 수도 있어. 여기 같이 있지 못하지만, 최소한 같은 달을 보고 있다. 그런 상상정도는 인간이라면 해 볼 수 있는 거야. 그 정도의 벳팅은 해 볼 수 있고, 때로는 마카오에서 일확천금을 따고 돌아올 정도의 그 낮은 가능성이 황폐한 사막을 걷는 인간에겐 유일한 희망의 확률일 수도 있는 거야. 그게 내가 말하고 싶은 달의 특별함이야. 그게 한 두 시간 반 정도 달을 보면서, 달만 보면서 걷다가 내린 결론이야.

집에 오니 케이블에선 < 해피 투게더>를 틀어주고 있었어. 늦은 시간이었지만 끝까지 다 볼 수 밖에 없었어. 아하 이런 이야기였군. 그래서 아휘는 보영에게서 벗어났는가. 하지만 그 정도의 거리만이 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해피 투게더잖아. 열심히 봤는데 아휘가 보영을 잊었다는 암시는 없어. 혹시 그 둘은 영원히 함께 하는 건 아닐까.

그 만큼의 거리를 두고
매일 밤 같은 달을 보면서.

그렇담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둘이 해피 투게더하는 해피엔딩일 수도.

아…그랫으면 정말 좋겠다.

14 October, 2015 @ 2:46 by youzin

moon
사진은 불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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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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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pano

새해의 결심

뜨거웠던 12월.

꼭 더운 나라에서 며칠을 보내고 와서가 아니라, 그 나라의 기후때문이 아니라
열정인지 욕심인지 모를 그놈의 것 때문에 징글맞게 혹사당한 몸과 마음때문에
그리고 이어진 후유증 때문에 정신 못차리게 타다타다 재가 되어버린 12월이었다.

덕분에 모든 게 쓰나미처럼 지나간 신정 연휴쯤에는 전쟁치르고 돌아온 군인처럼
내 방에 돌아와 쓰러져 자다 깨다 먹다만 반복했고
시달린 노구는 며칠 그런다고 정상으로 돌아오질 않았다.

이만하면 충분히 쉬었다 싶어 잠깐 놀러도 나가봤지만,
물속인지 꿈속인지를 모를 곳을 헤매다 온 느낌 뿐.

지난 여름 제주에서 하고 싶은 거 양껏이 아니라 양을 넘치게 누린 댓가로
그렇게 혹독한 후유증을 치른 후
이제 다시는 내일을 팔아 오늘을 사는 것은 어려운 나이가 됐구나
실감하고 앞으론 그러지 말자 다짐했건만
또 다시, 더더욱 심하게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쉴 기회가 있었건만 또 다시 욕심부리고 (혹은 열정을 불태우고) 나니
남은 것은…

산산 조각난 생활리듬과 노안 노구, 늘어난 흰머리와 ㅠ
가출한 영혼. 멍때림 ㅠㅠ
하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석같은 경험.
인생의 뜨거운 한 순간.
뭐가 맞는걸까. 중간은 어딜까. 중간이 너무 어렵다…

어쨌든 그렇게 탱탱 부은 육신과 멍한 정신을 데리고 또 다시 출근.
괴롭다 힘들다 투덜거리면서도
일상의 리듬에 어거지로 몸을 꿰어 맞추어 며칠을 보내니
그래도 오늘은 조금씩 정신도 돌아오고 몸도 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정신을 차린 상태로 좀 전에 오랫만에 거울 속을 들여다봤는데.
지난 달보다 조금 더 풍화된 한 누이의 얼굴이 놓여있는 것이다.
어떤 샵에 가면 ‘어머님’이라는 호칭을 듣기도 하는 @_@

찬찬히 그 얼굴을 들여다 보니
어느덧 해가 바뀌었다는 사실이 생각이 났고
자연스럽게 새해의 결심이란 것이 떠올라서 이렇게 오랫만에 일기장을 펼치게 되었다.

이젠.
뭐 내일이고 뭐고 없다.
그냥 오늘, 지금 이 순간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수 밖에.

그게 전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 지금 이 순간, 오늘 하루만 생각하고 살기로.

물론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결심들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주 많이 원하는 것들을 점점 가지기 힘들 거라는 명확한 실감앞에서
내일을 생각할 에너지도, 미리 끌어다 쓴 내일을 버틸 에너지도 부족한 상태의
헤부적거리며 지푸라기를 잡는 것과도 같은 결심과는 좀 다를 것이다.

그 지푸라기를 쥔 아귀에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모아볼까 …가 아니고
그냥 그럴 수 밖에 없다. 되든 안되든.

오늘 하루라도 기분좋게 웃으며 살기 위해서는.
적어놓는다.

ㅎㅎㅎ

애플 뮤직 천국과 지옥

#천국

지난 몇 년간을 써 온 네이버 뮤직 앱은 아직도 어디로 가야 내가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으려나…들어갈 때마다 헤매다만 나왔는데, 애플 뮤직은 딱 하루 쓰고 났더니 쓰기 시작할 때와는 완전히 딴판인, 세상 단 하나 뿐인 나만의 앱으로 변신해 버렸다. 첫 눈에 사랑에 빠졌다.

들어도 들어도 좋은 음악이 끝도 없이 쏟아지고, 하루에도 여러 번 깜짝 깜짝 놀래면서 요런 보물들을 못 만나고 찾아 헤맨 지난 시간 내 인생이 아깝기만 했다. 담당자들도 애쓰고 있겠고, 톱100과는 교집합이 없는 독특한 내 음악 취향때문이기도 하겠지만은 어쨌든 그렇게 됐다. 지난 일주일 신세계를 경험하며, 음악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내 인생에서도 뭔가 이렇게 딱 맞는 채널을 못 찾고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새로운 차원의 의구심으로 발전될 정도였으니.

늙어서 그랬다고 생각했다. 감수성이 메말라서, 더 이상 내 마음이 음악같은 건 원하지 않게 된 거라고. 아니었다.오밤중에 일어나 미친듯이 쿵쿵거리며 춤을 추기도 했고, 이불을 끌어안고 펑펑 울기도 했다. 음악으로 밤을 세우고 아침을 맞는 것도, 어둠 속에서 핸드폰 액정만 들여다보는 것도, 아이폰6를 거꾸로 들고 끝도 없이 클릭질을 하는 것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저 난 만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래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선 이렇게 나를 위한 음악이 대량으로 만들어지고 있었어.

덕분에 극도의 수면부족과 시력감퇴, 노안 등등 부작용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난 애플 뮤직과의 연애가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 오프라인으로 듣기>로 차 안에서 간밤에 받아놓은 수 백 여곡을 랜덤 플레이 하고, 귀에다 이어폰을 달고 살며 하루에도 여러 번 시시때때로 들려오는 음악 퀄리티에 자뻑을 했다. 뜬금없이 DJ가 되고 싶기도 했다. 이 좋은 음악들을 혼자 듣기가 아까웠다. 세상의 문 하나가 새로 활짝 열린 느낌이었다.

#지옥

어제 저녁, 한국 앱 하나 받으려고 로그아웃하고 한국 계정으로 들어가려다 보니 한국 계정도 로그인이 안되고, 애플 뮤직을 썼던 미국 계정도 로그인이 안되는 현상이 발생! 졸지에 iOS 미아가 되어 vpn 앱을 받고 등등 난리를 치다가 결국 수십 번 트라이 끝에 간신히 미국 계정으로 로그인하긴 했는데…. 그것도 사실 참 요상한 일이다. 안될려면 끝까지 안 돼야지…왜 수십번 하다보니까 들어가 지냐고. 수십 번을 그러고 있는 나도 웃기지만. 절박하고 궁지에 몰리면 사람은 그런 일이 하나도 웃기지 않고 다 하게 된다.

열튼 천신만고끝에 로그인을 했는데 !!! 두근두근 뮤직 앱에 들어갔더니 그동안 담아놨던 모든 음악이 날라가 버린 것이다. 일주일동안 밤새워 만든 리스트와 받아놓은 곡들이 싹 다. 그 음악들을 만났을 때의 설렘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우린 이제 시작일 뿐인데.

충격과 공포였다. 결론적으로는 무수한 검색질과 잔머리 끝에 아이클라우드의 애플 뮤직 라이브러리를 on시키자 리스트들이 돌아왔지만, 나로선 알 수 없는 ‘병합’과 ‘ 대체’라는 옵션의 기로에서 ‘병합’을 선택한 결과 결국 제일 많은 곡을 담아뒀던 제일 소중한 리스트는 날라갔고, 파일 다운로드는 모두 다 새로 해야 했다.

덕분에 음악 제목 A부터 다시 한 번 찬찬히 들으며 음악을 솎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오늘 아침 C까지 마쳤고 이건 하면 그냥 언젠가는 끝나는 종류의 일이다. 최소한 만나자마자 이별같은 어이없는 상실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리스트를 다시 다운로드를 받는다 해도 언제 이 리스트가 날아갈지, 음원의 접근이 언제 막힐지, 언제 다시 계정이 튕겨나갈지는 알 수 없다.

음악에 있어서 난 집을 찾았고, 여기가 끝(이자 많은 것들의 시작)이라고 감을 잡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미국인이 아닌 내가 개구멍으로 몰래 들어와 애플 뮤직을 듣는다는 것. 그것은 근사한 최고급 남의 집에 부실한 계약 관계로 몰래 들어와 얹혀 사는 난민이라는 의미였다. 내가 아무리 여기서 진심의 아이러브유를 외치며 열심히 채우고 꾸며도, 언제 쫓겨날 지 모른다.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집, 닫혀버린 문 앞에서 내 처지를 실감했다.

하지만, 난 지금 무슨 노래 가사가 지목한 바로 그 시점이다. 멈출 수가 없었어~~ 그땐~~ 아무리 그래도 다시 네이버 뮤직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다시 파일들을 받기 시작한다. 이어폰과 스피커도 새로 알아보고 있다. Vifa 코펜하겐이 맘에 딱 차는데, 가격이 하늘에 매달려 있다. Vifa를 보고 나니, B&O도, B&W, Boss도 다 눈에 안 들어온다. 돌아와 보면 난 그냥 에어플레이 되는 Tivoli model one이 필요한 것일 뿐인데, 그런 건 또 없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것. 애플 카플레이는 어떻게 다는 걸까. 난 정말루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고 기가 막힌 음악의 성이라도 쌓을 기세다.

한국 앱스토어에만 있는 앱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기존에 한국 계정으로 받은 앱들 업뎃은 어떡하지? 기기가 초기화되거나 OS를 업그레이드를 하면 어떻게 되려나…폭풍 검색이 답해 주지 않는 문제들. 애플 뮤직을 지키려면 난 계속 이 낯선 계정 안에만 갇혀있어야 할 지도 모른다. 단 한 걸음도 밖으로 내딛지 못하고.

그런데도 계속해서 음원들을 받고 리스트를 추가한다. 모든 게 한 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헛수고가 될지도 모를 일을 밤을 세워가며 또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멈출 수가 없다.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는 때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가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것을 멈추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난 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

어떤 이별

갑작스런 이별 통보를 받았다.
’8월 31일까지만 영업’

1주 일의 살벌했던 강행군동안 가장 많이 떠올랐던 숯느님을 마침내 영접하러 청계산에 갔는데, 입구에 붙어 있던 안내문.

그래도 찜복을 입고 서성이는 몇 분이 계시기에 카운터에 물어보니 다행히 오늘까지는 불와 꽃탕을 빼고 저,중,고온 가마로만 마지막 운영을 한다고 한다. 메르스 때문에 운영이 많이 힘들었고, 그 후로도 회복이 아니 되어 불은 화목토일만 나오고 12시까지만 운영하는 특단의 조치까지 나왔지만, 설마 문을 닫을 줄이야. 상상초월의 사태. 제대로 맞은 뒷통수였다.

10년은 안되도 족히 다니시 시작한 걸로 따지면 7,8년은 될 것이다. 특히 지난 몇 년간 매주 한 번의 숯느님 영접은 고정 스케줄이었고, 기나긴 한 주를 끊어내는 힐링의 분기점이었다.

벌써 찜을 마치고 떠나는 사람들은 삼삼 오오 모여서 이별의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어디선가 다시 보겠지요. 그래 여기는 이런 곳이었다.

내가 이 사업을 하면서도 여기 오는 손님들이 그렇게 싫었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어. 야간 취로 알바생으로 생각했던 그 분이 바로 숯가마 사장님이셨다. 머리는 하얬지만 제법 깔끔한 외모에 잔잔한 근육으로 흰 난닝구 바람으로 열쇠를 내어주곤하셨다. 이별의 말을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장님은 저렇게 말씀하셨다. 아주 지긋지긋했다는 듯이. 나도 그 중에 하나였을까.

나는 샤워를 하고 뜨거운 탕에 들어가 몸을 덥힌 후,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찜질을 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고온 가마에 들어가서 숯느님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물론 가마에 들어가 타월을 뒤집어 쓰고 있는 일이 그렇게 애로틱한 행위는 아니다. 하지만 송글송글 솟아나는 땀에는 분명 내 몸에 침투한 숯느님의 에너지와 내 속에 있던 무언가가 진하게 결합되고 뒤섞여 나온 에로틱한 결과였다.

뜨거운 열기에 가마 천장에 발라놓은 흙더미 몇 개가 후드득 떨어졌다. 마치 마지막 날의 맞춤형 세러모니이기라도 한 양.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다가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계곡 위에 펼쳐진 평상에 타월을 펼쳐놓고 대자로 눕는다. 평상 옆 나무에 두 발을 올려놓기도 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드리워진 나뭇가지 사이로 밤하늘을 보면서, 밤의 공기로 내 몸에 가득한 숯의 열기를 식히는 시간. 아무도 없고, 가끔씩 저 편 도로에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에도 무심해진다. 난 여기서 듣는 계곡의 물소리를 또 사랑했다.

고루고루 속까지 익혀진 내 몸에서 뜨거운 김이 솟아오른다. 토해내는 숨으로는 내 몸의 나쁜 것들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다. 특히, 공기가 차가워지는 10월 이후에는 급격한 온도차에 나만의 무아지경은 더 깊어진다.

언제가 무척 힘이 들었을 때, 여기에와 대자로 누워 뜨거운 몸을 눕히고 검은 하늘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래, 무슨 일이 생겨도 여기에 와서 이럴 수만 있다면, 난 괜찮을 거야.

실제로 그렇다. 숯을 쬔 다음 날은 나쁜 기운은 쏙 빠지고 뭔가 다른 에너지로 꽉 채워진 맑은 느낌. 그게 하루 이틀은 갔다. 아픈 목도, 배탈도, 감기도 다 숯가마에 가서 나았다. 그래서 아무리 피곤해도 힘들어도 숯가마를 믿고 있었다.

업무도 참 많이 했다. 그렇게 텅 빈 마음으로 어둠 속에 누어있으면 어느새 복잡했던 문제들이 단순하고 또렷하게 다가왔다. 생각하고자 하지 않았던 아이디어들, 그려볼 기획들, 써 볼 특허들, 연결하면 좋을 사람들, 시도해 보고 싶은 일들이 몽글몽글 솟아나서 여기 청계산에서 난 참 많은 메모를 해가서 실행했다. 메모는 오타투성이였지만, 여기서 시작된 아이디어는 허튼 것이 없었다.

숯을 쬐며 이어폰을 꼽고 신형철의 문학 이야기 팟캐스팅을 듣는 시작도 사랑했다. 열기와 땀과 몽롱한 졸음 사이를 가로지르는 신형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 그 명징한 논리를 그렇게 나른한 상태로 듣고 있는 게 좋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를 한 꺼번에 누리는 보석같은 시간이었다. 이제는 신형철도 팟캐스팅을 멈췄고, 청계산 숯가마도 문을 닫는다.

차가 없었을 때는 복잡하게 분당서 신분당선을 타고 계단이 유난히도 높은 청계산역에 내려 잘 오지도 않는 버스를 갈아타고 또 한 참을 걸어서도 꼭 왔다. 갈 때는 더 문제였다. 아슬아슬하게 몇 대 안 남은 버스를 잡기 위해 뛰어가곤했다. 갑자기 폭설이 내렸던 어떤 금요일밤이 기억이 난다. 그런 날에 왜 집에 안가고 또 숯가마에 왔을까. 눈이 내리는 조용한 풍경을 뚫고 버스에서 내려 소복소복 눈을 맞으며 간 숯가마.

근데 그 날 유난히 불이 좋았다. 불의 상태가 말이다. 아주 빨갛고 세차게 활활 타올랐다. 게다가 사람은 세 네명이 될까 말까. 아줌마들 틈에서 매번 자리 확보 신경전을 해가며 전투찜질을 하던 나로선 그 날의 기억은 천국이다. 밖에서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난 조용히 뜨거운 숯을 쬐고 앉아있다. 그리고 가끔씩 밖에 나가 내리는 밤눈을 바라보며 몸의 열을 식혔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떠올리면서.

반대로 촐촐히 봄비 내렸던 지난 어느 봄날엔 나무 바닥에 누워 그대로 내리는 비를 맞고 누워있기도 했다. 해방의 클리쉐한 비주얼. 근데 클리쉐건 뭐건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톡톡톡 살갗을 두드리는 봄비가.

물론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다. 내놓은 안경이 없어져서 주인을 대동하고 난리치고 다 숯가마를 다 뒤집어 엎은 적도 있다. 30분 쯤 후에 어떤 아줌마가 와서 다른 안경을 가져갔다며 바꿔줬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다음 날, 너무 잘 된 일이라며 기쁨을 나누는 그 분들 사이에 끼어있는 게 무척 힘들었다. 그래도 나는 조용히 앉아서 끝까지 숯느님 영접을 마쳤다. 그 후 몇 달은 그 분들 대화가 들려오는 것이 계속 힘들었다.

숯의 효능에 대한 간증은 지난 몇 년간의 에버그린 토픽이었다. 숯으로 암치료하신 분, 갱년기를 이겨낸 분, 교통사고 후유증을 고치신 분 등등. 실제로 빡빡 머리 민 깡마른 암환자분들도 꽤 뵈었다. 직장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숯가마로 출퇴근하시는 분들.

숯의 최고의 경지는 이런 거다. 숯을 많이 쬐면 피부가 다 타고 일그러는데 그래도 계속 쬐면 거기서 새살이 돋고 아픈게 싹 낫는다고 한다. 하지만 아픈게 없으면 그렇게 까맣게 올라오지 않는단다. 숯은 이걸 해본 사람과 안 해본 사람으로 나뉜다. 난 그 경지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다 타서 새까매진 다리며 등에 불 쪼이시는 고수 분들은 꽤 많이 봤다. 그 분들 새살은 다 올라오셨을까. 아픈 것도 싹 다 낫고. 여하튼 이건 숯가마에선 사순설과 부활절과 비슷한 바이블 프로세스다.

특히나 힘들었던 건 자리싸움이었다. 골수 아줌마들이 서로 패를 지어 자리를 맡아주고 나같은 독립군에게는 좋은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 분들과 싸울 엄두따위는 내지도 못하는 나는 항상 가마 끝자락에 행여나 남의 자리 침범할까 쭈그리고 앉아서 간신히 불을 쬐었다. 그러고 있으면 가끔씩 인심쓰듯 가면서 자기 자리를 내 주는 분들도 있었고, 좋은 자리가 나서 앉으려고 하면 쫓아내는 분들도 있었다. 기가 약한 나로선 당하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도 옛날 일이다. 작년 부터는 사람들이 줄기 시작하더니, 메르스때는 나도 발을 끊었고 다시 가기 시작할 때는 사람이 확 줄어 있었다. 난 쾌재를 불렀지만, 불 나오는 요일이 따로 생기고 영업시간이 줄고 그러니 사람들이 더 빠지는 걸 매주 체감하다 보니 호황이라 자리 싸움했던 때가 그립기도 했었다. 그러다 이제는 문을 닫는다니…

마지막 날이라 그런가. 사람들은 거의 다 빠지고, 사장님은 대자로 누워 핸드폰에서 음악을 트셨다. 그런데 이게 왠걸. 플레이리스트가 예술이다. 씨네마 파라디소 느낌의 귀에 익지만 이름 모를 고급진 감성 팝들이 이어진다. 가을에 딱 이런 음악이 어울리지 않아? 사장님 말씀. 네네 맘 속으로만 대답. 왜 여기 오는 손님들이 그렇게 싫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숯을 떠나기가 더더욱 싫어졌다. 나도 대자로 누워 하염없이 음악을 들었다. 다 말로 할 수 없는 무수한 추억들이 스쳐지나갔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시간들. 와이파이도 전화 안되는 고립의 순간. 추억의 모서리가 조금 무너진 느낌이었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리운 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문득 들려오는 …Oh thinking about our younger years. There’s only you and me. We’re young, wild and free….브라이언 아담스는 아니었지만.

그 풍경을 담았다. 사장님이 나즈막히 노래를 따라 부르신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액정 속의 풍경은 어디 살벌한 러시아 수용소 분위기다. 이런 곳에 나는 수 년을 묻었다. 조금 전까지는 몰랐는데, 아마 정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떠날 줄을 몰라서 정든 줄로 몰랐던 것일 뿐.

평소와 같이 11시가 조금 넘어 난 짐을 싸서 나왔다. 평소와 같이 신발장 열쇠를 내어주는 사장님의 얼굴을 외면하고 돌아서는 나에게 사장님이 말했다.

오늘 여기 마지막인 거 아시죠?

갑자기 마음이 확 풀어졌다.
네, 너무 …너무 아쉬워요. 저 여기 정말 몇 년을 다녔어요. 여기서 몸이 많이 좋아졌어요. 저 여기 정말 좋아했어요.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렇게 난 청계산 숯가마의 맨 마지막 손님이 되었다.

노안?

최근 또 한 번의 희한한 경험을 했다. 하나의 대상이 두 개로 보이는 것이었다. 음…정확히는 반대다. 하나의 상이 있었고, 그 앞일지 뒤일지에 그와 유사한 하지만 같지는 않은 또 하나의 상이 겹쳐 보였다. 분명히 한 쪽은 환각일텐데 눈으로 보듯 분명히 보여서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눈만 그런게 아니었다. 귀도 그랬다. 그 대상이 내는 소리도 두 개로 겹쳐서 스테레오로 들려온 것이다. 각각의 상이 각각의 다른 소리를 내고 있었고 내 귀를 타고 들려왔다.

아무리 포커스를 맞추고 한 쪽의 소리에 집중하려 애써도 소용없었다. 그런 식의 무기력함은 처음이었다. 둘 다 너무나 생생하고 구체적이어서 도저히 한 쪽으로 합쳐지지가 않았다.

어느 쪽에 반응해야 할 지 몰라 약간 혼미해졌지만 곧 내 쪽의 감각도 (내 의지와 무관하게) 두 개의 채널로 분리되어 서로 다른 대상을 인지하며 전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말이란 것이 한 쪽에선 공장에서처럼 기획, 제조되고 있었고, 동시에 또 한 쪽에서는 개천에 흘려보내는 공장 오염수처럼 겉잡을 수 없이 마구 흘러나왔다. 그런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동시 두 채널을 통한 입력과 출력. 인간의 놀라운 멀티 태스킹 능력을 찬양해야겠건만, 실제로 그것은 의지라기 보단 원혼에 빙의되듯 당한 것에 가까워서 세상에 이런 일이…뭐 이런 탄식을 하는 또 하나의 채널이 분리될 뿐이었다. 헐~

그 때 나는 하나였을까 둘이었을까 아니면 셋이었을까. 그 중 어느 쪽이 진짜 나였을까. 또한 내 앞에 있었던 것의 실체는 뭐였을까. 이런 걸 누구에게 물어볼 수는 없다. 그것은 내가 선택해야 했던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새벽 나를 깨운 그 조용하고도 맑은 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내 눈의 포커스는 하나로 합쳐졌다. 그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개취 movies – 네 편의 뫼르소 프리퀄

2015 2Q를 함께 한 영화들.
강을 건너지 못한 채 부조리의 현실 앞에서 질문하고, 좌절하고, 방황하는 네 편의 이방인 프리퀄

Serious man

1월 1일 르윈의 저주에 그토록 몸부림쳤음에도 2/4분기 첫 번째로 본 영화가 < 시리어스맨>이었던 걸 보니 나도 참 애지간한 코헨쓰의 노예다. 시리어스맨의 다크포스 앞에서는 르윈마저 달달했으니…하지만, 그럴 줄 알면서도 열어봐야 했던 코헨쓰의 판도라 상자.

영화 보는 내내 까뮈를 떠올렸다. “인생의 모든 걸 심플하게 받아들여라.” 유명 자기 계발서의 한 페이지에서 오려낸 것만 같은 아포리즘은 실은 부조리한 인생을 거짓없이 성실하게 관찰한 결과로 갖추게 되는 잔인한 객관성이다. 신에게서 답을 갈구하는 래리에게서 이방인이 되기 이전의 뫼르소가 보였다. 뫼르소도 한 때는 어떤 일의 의미를 찾고 싶어했을 지도 모르지.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스크린을 가운데 두고 접힌 데칼코마니처럼 다시 래리에게 겹쳐진 나를 보았고, 나는 코헨의 영화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분명히 뭔가를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매달리듯 코헨을 튼 나와 랍비를 찾아가는 래리가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랍비의 장광설처럼 코헨도 나를 낯설디 낯선 1960년 후반,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결국엔 토네이도 앞에 내던진다. 그리고 바로 여기로 랍비의 조언을 찾아다니던 래리와 코헨의 이야기를 따라가던 내가 거울 앞에 선 듯 서로 만난다.

몰아치는 검은 토네이도 앞에서 참수대의 칼날처럼 내려꽂히는 블랙 스크린. 비로소 프롤로그의 경구가 명징해진다. 슈레딩거의 고양이는 죽었으니, 뫼르소가 되라는 얘기였구나. 하지만 가장 큰 비극은 인식 이후에도 뫼르소따윈 될 수 없는 채, 눈 앞에 몰려오는 토네이도를 바라보는 삶이로구나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Detachment

어떤 사람은 이 영화를 보지 않고 제목만으로도 뭔가 뜨끔하지 않았을까. 은밀히 품고 있던 키워드 하나가 까발려진 것 같은? 영화를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뭘 말하고 싶은지, 주인공이 어떤 마음인지, 왜 저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별 설명 없이도, 몇 장면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놀랐다. 그닥 드라마적이지 않은 제목이며, 그딴 식으로 살고 있는 주인공하며…

하지만 부조리 머신이 되어버린 뫼르소와는 다르게(부조리에 대응하는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태도인) 주인공 헨리는 여전히 갈등하고 절망하는 인간계의 고뇌를 담고 있다. 희망은 버렸으되, 절망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한 발아 상태의 뫼르소. 그에게 드리워진 죄의식의 아우라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인간적인 감정의 굴레의 그림자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레지스탕스처럼 행복이 만발한 이 세상이 드리운 그늘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생존하고 있다. 그들은 외출할 때는 동시대인의 외투를 입지만, 안전한 곳에 혼자 있을 때는 이런 영화를 보며 현란한 화면 뒤에 전송된 코드를 해석해 낼 것이다.

Shame

삶의 공허함을 전면에 드러내고 허무의 돌직구를 영화는 솔직히 유치해 보인다. 그 탈출구가 섹스라는 것도, 그 클라이맥스가 하필이면 화장실에서 손목을 그어댄 여주의 피범벅이라는 것까지도 차고 넘치는 클리쉐다. 이 순간 < 모텔 선인장>을 비롯 무수한 영화들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든 끝까지 밀어부치는 것에는 힘이 있나보다. 알면서도 당하는 뭐 그런. 한 두 컷 맛만 보여주며 밀땅하고 약올리고 상상하게 만드게 아니라 아주 대놓고 덜렁거리며 왔다리 갔다리….블러 처리된 영상이었음에도, 당혹스러웠다. 색스러움이라곤 냄새도 안나서 더욱 그랬다. 이 화면 앞에서는 난 대체 뭘 느껴야 하는 걸까.

직면. 그런 걸 들이밀면서 니 삶의 속껍질을 한 번 까봐라 그러는데, 오케이 갈 데까지 한 번 가 보세요 이런 심정이 된다. 당연히 절망도 깊어지고 단절은 명확해지고 그에 따라 각종 수위도 높아진다. 그럴 줄 몰랐던 전개는 하나도 없는데다, 또 하필이면 빗속에서의 눈물 피날레는 좀 심했다 싶기도 하다.

하기야 저런 실감 앞에서조차 인간의 선택지란 것은 참으로 별 게 없긴 하지… 나도 어쩌면 저렇게 통속적으로 빗속에서 울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감정 불능자를 다룬 영화가 오히려 심하게 감정적으로만 몰아부치는 듯한 역설. 관계 불능자를 다룬 영화 속에서 가장 강조된 것이 바로 관계였다. 쩝. 요러한 구리구리함 대비 햇빛이 너무 뜨겁다는 이유는 지금 봐도 너무 모던하군.

감독보다는 마이클 파스빈더를 watchlist에 올린다. 심지어 까뮈 분위기 도 좀 나지 않음? 파스빈더가 연기하는 잡스가 기대된다. 파스빈더라면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천재 또라이 잡스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그려내줄 것 같다. 커쳐는 솔직히 좀 …그랬잖음?

Mad Max – Fury Road

쓰기 시작할 땐 뫼르소에 끼워맞춰 볼려고 했는데, 지금 쓰다보니 맥스에서 뫼르소까지는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든다; 둘 다 희망이 섞이지 않은 뜨거운 햇빛 아래서 살인을 한다는 공통점이 있구랴. 하지만 맥스는 살아남기 위해서, 뫼르소는 정오의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그 차이는 어떻게 극복이 안되네. 맥스는 너무나 에너제틱해. 하트 뿅뿅 하디..

그런데, 희망이 없는데서 왜 살아남으려는걸까? 영화의 클로징 자막은 까뮈의 마지막 작품 < 최초의 인간>에서 따온거래는데, 기억이 깜깜해.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도. 그렇담 맥스는 정력맨 버전의 뫼르손가?

“Where must we go? He who wander this wasteland, in search of our better selves.”

액션엔 취미 없지만, 올해 최고의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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