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에 죽은 아들이 영매의 몸을 빌어 꺼이꺼이 통곡으로 세상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한다.
“내가 혼이란 말여…내가 혼이라는 게 말이여…어쩌다가 나 날아가야돼…
보고 싶은 것도 많고…하고 싶은 것도 많고… 너희는 살았으니까만은
난 억울해요..섭섭해요..
내 아버지 나하고 같이 묻어놔줘요…내 아버지하고…”
이승을 떠나는 서러움은 저토록 깊은가. 정말로 그런가?
…나도 저렇게 서러울까?
다큐멘터리를 보는 이유. 소재가 새롭든가 기존의 소재를 해석하는 시각이 새롭든가.
영화는 두 가지 점에서 모두 흡족하지 않다. 소재면에서 보면 그나마 ‘영매’라고 했으니까 조금이나마 매력이 있었지, 포스터의 영문 표기 그대로 ‘Mudang’이라고 했다면 아마 관객이 반으로 줄었을 것이다. 그만큼 무당은 많이 봐온 소재다. 영화는 작가의 주관이나 시선을 가급적 배제하고 “~ 했다고 한다”는 식의 문장을 반복하며, 이 진부한 소재의 언저리를 빙빙 돈다. 너무 fact를 따라가기만 한다는 느낌이다. ‘기록’이라는 측면의 사료적 가치로서 인정하기엔 드라마가 너무 많이 개입되었고, 드라마를 이어가며 보기엔 각각의 내용들 간 일관성이 떨어진다. 너무 오래 찍었고, 너무 많은 것을 찍었고, 결정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영매는 의외의 지점에서 대박을 터트린다. 죽은 아들이 영매의 몸을 빌어 가족과 이별하는 장면같은 것. 어린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슬픔과 해 보고 싶은 많은 것을 놔두고 이승을 떠나야 하는 어린 영혼의 서러움이 곡소리와 함께 스크린을 가득 메울 때, 전혀 가공, 연출되지 않은 다큐의 호소력은 정점에 이르러 관객들의 감정을 영화의 저 상황 속에 함께하게 한다. 이 때 머리는 완전히 판단 중지다. 다큐적 완성도야 어떻건 말건간에 나 역시 숨이 가쁘도록 헉헉헉 흐느끼며 무진장 눈물을 빼고 나왔다.
이렇듯 영화는 치열한 문제 의식이나 논리적/드라마적 완결성 대신, 그 소재에 깊이 천착한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몇몇 빛나는 수확들을 보여준다. 참 감독이 수고 및 고생 많이 한 것 같다. 박기복이란 분. 잘은 모르지만, 아주 순수하거나 고집 센 사람일 것 같다는…써니 언니한테 자문을 구했더라면 훨씬 더 결과가 나아졌을텐데… (언니라면 아주 잔인하게 그리고 세련되게 몇몇 포인트들을 잘라냈을 거야) 나오면서 그런 생각 쬐끔 해봤다. ^______^
언제나, ‘죽어 있다’라는 상태가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그 상태란 상상 속에서조차 어떤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나라는 존재의 무화일지도 모르고 이승의 업을 벗어던진 가벼운 영혼으로서의 나일지도 모른다. 뭔지 알 수 없지만 어떤 쪽이든 한 가지, 그 상태는 아주 편안할 거라고 믿어왔다.
두려움은 언제나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넘어가는 변화 과정, transformation 에 대한 것이었다.
손목을 끊는다든지,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린다든지, 교통사고나 암이 개입한다든지, 여튼 괴로운 건 여기서 저기로 가는 데 끼어있는 거추장스러운 중간 과정이다. 몸 어딘가에 붙은 버튼 하나를 클릭하는 것 정도만으로 저 쪽으로 갈 수 있다면, 죽음이 이만큼 인간을 압박하진 않으리라. 그리고 그 버튼이 존재하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었다…
그런데 저 22살짜리 영혼의 서러움은….아무리 편해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그는 죽는 과정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가 서러워 울고 있다. 이승을 떠나기 싫어 발버둥치고 있다. 그게 새삼스런 충격이었다.
어떻게 내 주변에는 죽음은 두렵지 않으며, 이 생에 아무런 미련 없다는 인간들 투성이다. 정작 살고 싶다고,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노라고, 살아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고 애원했던 이들은 무력하게 이 생을 뜨는데, 생에 미련없단 인간들은 여전히 눈부실 듯 푸른 하늘 아래서 오늘 하루를 잘~~ 누리고 있다. 두고 보라고? 에잇, 꿀밤 부터 먼저 한 대 맞아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