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해냈네요…감독님.
영화의 마지막 10초, 반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감정이 한 템포 뒤에 밀려왔다. 오래간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철들고 제 인생의 한 켠은 늘 감독님의 영화를 기다리고 보는 것이었어요. 속도계를 부숴버리고 폭주하는 인간들 때문이었어요. 모순되고 잔인한 인간의 본성이 빚어낸 난장판때문이었어요.
그런데 희망이라니요. 이렇게 분명하게 빛나는 희망이라니요. 그것이 이 기나긴 여정의 끝이었다니요. 이건 그 영화 속 결말들보다도 더 어처구니가 없잖아요. 감독님…그런데…
살바도르는 결국 해냈네요.
머나먼 마드리드의 어느 극장, 옛 연인이 무대에 올린 이야기를 지켜보던 남자가 흘린 것과 같은 색깔의 눈물이 운전대를 잡은 내 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라이트로 가득한 강남대로의 한 복판에서.
오프닝 – 우리는 이제 공식적으로 늙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푸른 빛. 반데라스는 수영장 물속에 미동도 없이 사지를 늘어뜨린 채 가라앉아 있다.
부력이 의지를 대신해 그를 떠받치고 있을 뿐. 영화는 불길한 사체의 냄새로 가득하다.
육체의 화신으로 각인된 반데라스가 다짜고짜 눈에 들이미는 육신의 쇠락. 하지만 놀란 건 백발과 흰수염, 근육이 빠져 나간 쭈글한 몸 때문이 아니다. 마침내 그가 수면 위로 떠올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그 안을 가득 채운 것. 비어 있음. 한때 모든 여자의 심장을 꿰 뚫었을 라틴 종마의 찬란한 빛이 공허로 꺼져 있었다.
영화도 안 만들고 뭐하고 사냐는 지인의 안부에 그냥 산다고 말하지만, 그냥 살아있다고 말할 때 그 삶은 이미 죽음을 가리킨다. 입으로 산다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의 눈빛은 정확히 죽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피끓던 젊은 날 열광했던 아이콘의 쇠락은 정확히 그와 함께 당도한 나의 삶의 같은 지점을 겨눈다. 알모도바르의 버스에 함께 실려 온 지난 이십년의 시간 뒤 맞이한 이 순간을.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얼마만큼 죽어있는가.
우리는 한 버스를 타고 있어. 알모도바르의 버스에…감염은 시작되었고, 너도 곧 저렇게 될거야. 아니 이미…
우리는 이제 공식적으로 늙었다. 반데라스가 선언한 공지사항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 후의 이야기는 나에게 그 버스를 타고 들렀던 정류장과도 같은 세 편의 영화에 대한 기억을 소환시켰다. 시간이 더해져 함께 나이 먹은 세 이야기. 나에게 이 영화는 매우 애정했던 세 영화의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져 도착한 공동의 종착지였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너무나 밝은 빛이었다. 어이없게시리. 늙은 몸으로 뒷덜미에 내리꽂은 알모도바르의 완벽한 배신이었다.
내가 사는 피부 – 육체
영화의 시작. 살바도르의 고통(pain)의 면면은 속속들이 육체적인 것이다. 인간을 죽음으로 이르게 만드는 온갖 병증이 나열된다. 육신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만드는 환각의 순간은 자신의 전 여생을 돌아보는 기나긴 기억의 여정이 된다.
육체는 < 내가 사는 피부>의 주요 테마다. 한 인간을 완벽하게 소유하기 위한 육체의 해체와 변형. 하지만, 여기서의 육체는 겉면, 즉 피부였다. 해체의 대상과 주체가 있었고, 들끓는 욕망이 드라이브한 인위적인 해체였다. 그렇기 때문이 거기서 피부를 벗겨낼 때는, 고통스럽고 기괴한 풍경 속에서도 깊은 탐욕의 단 맛이 전해져 왔었다.
이 영화에서의 고통은 육체의 속, 장기의 변형으로 깊어졌다. 욕망이 아닌, 욕망이 거세된 몸에 들어닥친 사고. 그 누구의 욕망도 개입되지 않는 육신의 속절없는 쇠락이다.
이 몸 속의 변형은 더 이상 실사로 그릴 수 없어, CG가 등장한다. 그래픽을 사랑하시고 기가 막히게 쓰시는 알모도바르 감독님 영화 속에서 그래픽 같은 장면은 아니지만, 이렇게 기나긴 진짜 그래픽은 처음이었다. 그게 신체의 장기에 관한 것일 줄이야. 감독님이 추구해 온 존재의 해부학은 이렇게 생 몸에 카메라를 들이미는 깊이에 이른다.
늘 감독님의 집요한 육체의 현미경이 어디까지 파고들까 궁금했고, < 내가 사는 피부>를 보고 나서 여기가 그 종결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장기가 남아있었다. 한 인간을 파헤쳐 눈 앞에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마지막 레벨. 뭐, 이 다음은 세포와 바이러스를 들고 오시려나.
귀향 – 엄마
중독은 잠시나마 현재를 잊게 만들고, 육신의 고통이 잠시 자리를 내어준 사이 환각과 기억 사이의 시간은 어린 시절을 소환해낸다. 곧 소멸할 존재에게는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치유의 순간같다. 햇빛이 부서져 내리고, 노랫 소리가 들려 오고, 거기에 엄마가 있다. 알모도바르의 엄마가. 우리 인생의, 아니 최소한 알모도바르가 심어준 세계의 지분 속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빨래터의 찬란한 빛과 강인한 여인들의 노래…자연스럽게 영화는 < 귀향>을 소환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여인들. 씩씩하게 노래를 부르며 시냇물에 빨래를 하는 여인들. 역사에 담요를 깔고 자고, 초콜렛을 잘라 넣은 빵으로 끼니를 떼워도 무너지지 않았던 엄마들. 비가 새는 토굴을 아름다운 갤러리로 가꾸어 내고야 마는 너무나 익숙한 존재들이다.
잠시 엄마는 너는 좋은 아들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곧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엄마는 죽음으로조차 아들을 구한다. 영화는 기억의 환각 속 엄마를 불러 내 현재의 영화로 환생시키는 마법으로 끝난다. 그는 그렇게 구원 받았다.
나쁜 교육 – 사랑
시작은 아이맥 바탕화면에 저장되어 있던 파일 하나. 그 파일의 이름인 Addicion(중독)은 중독되었던 과거를 무대 위에 올리고 시간과 장소를 거슬러 다시 그 중독의 대상을 만나게 한다. 그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 쓴 자신의 이야기를 듣게 만들 수도 있다.
전화를 받았던 밤, 살바도르의 떨리는 목소리. 설레임만을 증폭시키는 어설픈 밀땅 코스프레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마지막 키스와 참지 못한 눈물…이 순간에도, 말을 하는 것은 반데라스의 대사가 아니라 눈빛이다.
중독자였던 연인은 중독을 벗어나 정상적인 삶의 괘도를 찾았고, 중독된 그를 감당하지 못해 떠난 내가 오히려 중독자 신세가 되어버렸다. 완벽하게 뒤바뀐 처지가 그를 실감하게 했을까?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갈까?
그러고 싶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아…살바도르는 이 순간 이미 해냈다. 감독님의 대놓고 던진 힌트를 내가 못 알아차린 것일 뿐. 가장 큰 중독, 사랑. 그 중독의 대상을 끊을 수 있는 그는 더 이상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마약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육체를 회복하려한다.
이 순간 난 이미 나쁜 교육의 결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지막 대사. 사랑하는 엔리께…난 해냈어. 그 비극성을. 그래야 알모도바르지. 진정한 불행이란 이렇게 가장 희망적인 순간에 아무 것도 아닌 것만 같은 사래들림같은 것이 덮쳐오는 거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순간에 뚱보신부가 들어와 목을 비틀어버리는 것처럼.
하지만 아니었다. 나쁜 교육에서의 그 비극이 뒤집혔다. 정말 해냈네요. 감독님. 그 사람을 문 앞에서 보내고, 약을 끊고, 현대 의학으로 육체의 겁박에 이겨냈어요. 그리고 페네로페 크루즈가 그 순간을 완성시켰다.
구원은 사랑으로부터…
사랑하는 그 사람들으로부터.
아 이 뻔하디 뻔한 결론을…
알모도바르에게서……………….
오스카
기생충 신드롬에 소름돋으면서도, 외국어 영화상 후보의 한 칸을 차지했다 조용히 지나간 < 페인 앤 글로리>가 내내 가슴이 남았있었다. 한 시대 앞서 오스카란 로컬에 그 누구보다 가장 사적인 것으로 인터내셔널의 아스팔트를 깔았던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부탁했었다. 다시 뜨거워져 달라고 그렇게 어처구니 없고 광기어린 알모도바르로 돌아가 달라고. 그게 아니었다. 삶의 날 것을 있는 그대로…식어버린 육체는 식어버린 그대로 스크린 위에 바치는 것이 알모도바르였다.
오스카의 최대 유행어를 조금 응용해 본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다. 알모도바르, 당신 삶을 산 채로 도려내 스크린 위에 바친 사람. 뜨겁디 뜨겁던 아름다운 젊은 육체 뿐만 아니라 거의 사체가 되어버린, 그래서 이젠 김도 더 이상 나지 않는 노인 냄새 진동하는 육체조차 날 것 그대로 영화의 제단에 올려놓은 사람.이 보다 더한 사의 경지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감독님에 대한 나의 애정의 오해를 바로잡는다. 그저 대책없이 날뛰어서가 아니었다고. 그 체온이 아니라 절대 가공하지 않음을 사랑한 거라고.
각자의 온도로 뜨거웠던 세 영화가 이렇게 하나로 만났다. 누구도 데이게 하지 못할 미적지근한 온도로…그 사람에게조차 하룻밤을 허락하지 않고 문 앞에서 그냥 돌려보낼 정도로. 하지만, 격하게 부둥켜 침대 위를 뒹구는 것보다 더 깊어진 마음으로.
그리고, 영화는 계속된다. 초상화 뒤에 쓰여진 편지가 도착하듯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알모보바르의 영화가 나에게 도착했다.
내 인생의 오스카를 당신에게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