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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 – 보통의 용도

알랭 드 보통은 지성의 이케아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일상 용품을 판다. 기능성과 디자인, 가격과 품질을 두루 아우른 ‘모두를 위한 디자인(democratic design)’을 추구한 제품들이다. 하지만 이 제품들은 구매자가 자기 집에 들여와 직접 조립을 하고 합이 딱 맞는 공간에 배치하는 공정을 통해 완성된다. 참여라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합리적인 가격으로 투자한 만큼 실질적인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보통의 원자재는 예술과 철학, 인류가 축적한 지적 자산이다. 그의 비즈니스 모델은 도서관과 미술관에 널부러져(?) 있는 예술과 철학을 들여와 구체적인 용도를 갖춘 고급진 일상 생활의 필수품으로 가공해 내다 파는 것이다. 높은 안목으로 선별한 고매한 지적, 예술적 자산은 벽에 못을 박거나 뜨거운 국을 담아 내는 것과 같은 꼭 필요한 삶의 도구가 된다.

보통 팩토리의 공정을 거친 지식들은 합리적 가격의 국그릇으로 활약하는 고급 자기와도 같다. 구체적인 용도를 갖추었으되 품위와 깊이를 갖춘 제품들은 만족감을 준다. 벽에 건 순간 더 나은 삶으로 바뀐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한 편의 액자처럼.

이번 저작의 재료는 철학이다. 보통은 커피 사업자들이 케냐나 콜롬비아의 오지를 탐색하여 발군의 커피 품종을 찾아내거나 가구업자가 보루네오 등지를 뒤져 희귀한 원목을 찾아내듯 철학의 도서관을 뒤져 우리 삶을 개선시킬 사고의 원자재들을 찾아냈다. 소크라테스부터 몽테뉴를 거쳐 쇼펜하우어와 니체까지. 이런 재료들을 내 삶에 들여 활용할 수 있다면…최고가 아닌가. 마치 고흐의 해바라기를 액자를 내 방에 걸어놓듯 나의 사고에 세네카와 몽테뉴를 들여놓을 수 있다면!

보통 팩토리의 공정은 입체적이다. 때로는 분석가로 때로는 이야기꾼으로서, 때로는 연사나 세일즈맨으로 우리를 이끌고 설득한다.

당대를 살아간 하나의 생활인으로서 철학가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기도 하고, 그들의 삶 속에서 그들이 주장한 철학적 명제가 어떻게 형성되고 배반되었는지를 그리기도 한다. 목적은 그들이 다다른 철학적 사고의 경지들을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보통의 문제들을 연결짓는 것이다. 그들이 위로하고자 했던 그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바로 오늘 비탄에 빠진에 빠진 나이고, 그들이 대립했던 적인 오늘 열쇠가 맞지 않는다고 열쇠에게 화를 내는 나의 문제로 연결하는 것이 보통 팩토리의 핵심 공정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회의 시간에 손을 들고 사전 합의라도 한 듯 내 의견에 반대하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소크라테스를 떠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반대한다고 해서 내 말이 잘못되어 위축될 일이 아니다. 내 주장이 탄탄한 논리의 사슬을 받치고 있다면 말이다.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일확천금을 벌지 못했더라도 에피쿠로스의 행복은 존재하며, 프로젝트 제안서든 프로포즈든 거부의 고통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인생은 고통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니체의 사상을 어처구니 없는 업무 지시를 받아들이게 된다.

세네카가 자식을 잃고 고통에 수 년째 몸부림치 어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며, 질문했다. 그래서 지금 그게 위로가 되는 거냐고. 공허하기도 하고, 온몸이 사슬로 옥죄어 벗어날 수 없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기분이 우아하게 떨쳐지는거냐고.

그렇지 않았다. 슬픔과 고통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한 편으로 계속 곰씹으며 생각한다. 그건 결국 나에게도 일어날 일이라고.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참으로 이상한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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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베를린에서 – Netflix 적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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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예술 영화인 줄 알았는데, 4편의 시리즈와 메이킹까지 다 보고 나서는 이런 것이 넷플릭스적인 게 아닐까 싶었다. 무료 1개월 가입으로 겨우 대표작 몇 편을 정주행했을 뿐이지만, 플레이하는 편마다 모두 넷플릭스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강렬한 세계였다. 시장 치킨을 먹다가 처음으로 KFC를 먹었을 때, 수퍼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베스킨 라빈스를 처음 맛보았을 때의 느낌.

그리고 베를린에서

19살의 여주인공 에스티는 자신의 삶을 짓누르는 숨막히는 뉴욕의 유대교 하디시즘 공동체에서 걸어 나와 가방 하나 없이 입던 옷, 신발 그대로 미리 몰래 만들어둔 여권을 들고 비행기에 올라 베를린으로 탈출한다.

딱히 치밀한 계획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지만, 상황은 예상대로(?) 복잡하게 얽혀간다. 받아주리라 생각했던 엄마는 레즈비언 연인과 동거 중이고, 랍비의 명을 받은 남편과 조폭스런 남편의 사촌이 합세해 뒤를 쫓는다. 심지어 그녀는 임신 중이다. 순혈한 유대 핏줄의 새 생명을 품고 유대인 학살의 역사를 품은 도시를 떠돈다. 탈출이 부랑이 되고, 대학살의 장에서 새로운 삶, 새 생명의 터전을 찾는 역설.

하지만 결국 용기와 결단, 재능과 운의 대동단결 총결집으로 그녀는 베를린에서 간절히 원했던 새로운 인생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꽤 괜찮아 보이는 독일인 남친과 음악가 친구들, 카리스마 넘치는 교수님 스폰서까지 단박에 겟한 채. 행운의 여신이 짓는 미소는 그 어떤 인간의 계획보다 치밀하고 찬란하다. 아니면 죽을 힘을 다해 낸 용기란 이 정도의 행운을 불러들이는가…

구속의 사슬을 끊어낸 자유를 향한 한 여자의 여정에 감동과 자극을 받으며 하게 되었던 질문이다.

하디시즘 – 희귀종

넷플릭스는 희귀한 것들을 자극적으로 다룬다. 희귀하다는 것은 소재에 있고, 자극적이라는 것은 디테일에서 나온다. 희귀한 것을 매우 디테일하게 잡아낼 때 감각은 요동친다. 그렇게 넷플릭스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컨텐츠가 된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뉴욕 속 하디시즘 공동체같은 것을 들이밀며.

귀 옆에 대롱대롱 매달린 곱슬 머리부터 의상, 식사 예절, 종교 의식, 가족과 남녀 관계의 매너까지 이건 글로벌 시대의 위아더월드를 무색하게 만드는 철저히 폐쇄된 그들만의 세상이다. 제 3자가 보기엔 기기묘묘하지만 그들에게는 매일의 일상이고, 시대를 역류하고 문명화를 포기하면서까지도 지켜내야 할 전통이다.

이 희귀한 하디시즘 전통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철저한 고증으로 디테일로 그려냈다. 마치 다큐멘터를 보는 듯한 경험이었다. < 타이거킹> < 블라인드 데이트>을 봤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뭐 이런 인간들이 다 있나. 이런 경험을 넷플릭스에서 지속적으로 하게 된다. 몇 배로 쎈 19금 그알을 보는 듯한.

이 다큐멘터터리는 ‘난 남들과는 달라요’라고 말하는 한 여자의 침입으로 드라마가 된다. 제 3자임을 선언한 그녀는 그들의 이상함을 인지할 수 있는 존재이며, 전통이라는 미명 하에 짓밟히는 개인의 삶에 분노하는 관람자의 시선과 궤를 같이 한다.

그녀는 곧 결혼을 통해 그 남들의 본진 속에 던저져 온갖 모멸을 겪으며, 그 이상함을 수용하고 남들과 같게 살아갈지를 시험당하게 된다. 물론 주인공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대신 탈출을 선택한다. 실제 존재하는 볼거리에 대한 다큐적 흐름에서 삐져 나온 드라마의 시작이다.

행운의 여신 – 웰메이드 반전 드라마

하디시즘 커뮤니티가 다큐스럽게 그려지듯, 드라마 파트는 또 매우 전형적인 드라마스럽다. 탈출 이 후의 메인 테마인 음악 아카데미 입학까지의 과정이 그렇다. 매 순간 시의 적절한 운명적 만남과 운이 함께 한다. 4부작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치밀한 개연성을 셋팅하고 지루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서울과 베를린은 얼마나 다르기에 저렇게 처음 간 커피숍에서 운명을 바꿀 남자를 만나고 그를 통해 우정과 무작정 일박으로 교수님 눈에 띄어 며칠만에 그 지역 사람들에게도 8%밖에 가능하지 않은 장학금 시험에서 저런 반응을 얻는지(최종 합격 여부는 미정이지만)…노숙이다 뭐다 운명을 헤쳐나가는 지난한 과정같지만 산책하던 다리 아래서의 의외의 발견이 대반전을 포함해 따지고보면 엄청난 세렌디피티의 축복이 가득한 여정이다.

여기에 화룡점정인 엄마까지. 독일 시민권 서류는 몇 년 후를 내다본 엄마의 빅픽처, 신의 한 수 였다.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는 있지만, 자식의 미래를 예견하고 그때 짠하고 꺼내들 결정적 비기 하나를 던져주고 가는 엄마는 별로 없다. 계획이 있는 넷플릭스적 엄마였다.

한 소녀에게 전부였던 19년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길고 기나긴 터널을 지나는 것 아닐까. 아무리 걸어도 짧아지지 않는 터널 같은 것…이건 < 프리티 우먼>과도 같은 게 아닐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헐리우드 드림처럼 탈출에의 동경을 부추키는 무책임한 환상같은 게 아닐까.

이런 딴지조차 미리 예상한 듯 오프닝 타이틀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텍스트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 실화는 넷플릭스라는 채널에서 치밀한 기승전결과 놀라운 반전을 숨겨둔 웰메이드 드라마로 다가온다.

<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희귀한 소재의 다큐멘터리로 접근한 뉴욕편과 전형적인 넷플 여주의 고난극복기처럼 보이는 베를린편의 이중주로 다가왔다. 양쪽 모두 넷플릭스적이다.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시라 하스. 커다란 눈코입, 가늘고 밋밋한 어린이 몸매는 일반적인 미인의 기준과는 많이 달랐지만, 연기는 잊혀지지 않았다.

이렇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넷플릭스에서는 가능하다.

희귀종의 딜레마 – 무경계
하디시즘 공동체는 악인가? 하지만, 드라마는 그들을 단순히 여인들의 삶을 짓밟는 소시오패스 집단 범죄자로 그리지는 않는다. 왜 그들은 그렇게 사는가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는 설명들이 군데 군데 힌트로 주어진다.

무엇보다 그들이 그런 문화를 유지하게 된 배경에는 잔인한 대학살의 집단적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다. 생존이라는 명분으로 출발했지만 이제 그저 받아들여야 할 일상을 의지로 지탱하는 집단이다.

그들이 그들이 사랑하는 아내와 딸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억압은 무엇인가. 그것은 떨쳐내야 할 미개함인가 아니면 종족 보존의 기재인가. 에스티는 남다른 자각과 개인기를 발휘해 벗어난다. 하지만, 집단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여전히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을 선택한 여인들의 삶은 무엇일까.

어쩌면 무개념 신천지 같기도 하고, 어쩌면 스페인에 맞서 자신의 영토를 지키고 있는 올곧은 인디언 부족같기도 하다. 그들을 미개로 규정하는 것이 오히려 폭력같기도 하다. 드라마는 답을 주지 않은 채 그 두 집단 사이의 어디쯤인가를 오간다. 이런 선악에 경계를 짓지 않는 수용성을 넷플릭스에서는 자주 접하게 된다. 희귀한 소재에 대한 판단보류의 시선이다.

이런 모호한 지점들은 결국 나의 삶에 대해 같은 질문을 던진다. 무엇에 구속받고 있는가. 그것은 구속인가 생존인가. 왜 용기를 내지 못하는가.

차라리 명백한 선과 악이었으면 좋겠다. 용기는 낼 수 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에서 벗어나야 하는가이다. 에스티는 자신도 알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음악을 찾아가고 있었다. 넷플릭스 속으로 들어가 드라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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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 & Glory – 가장 사적인 당신

결국 해냈네요…감독님.

영화의 마지막 10초, 반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감정이 한 템포 뒤에 밀려왔다. 오래간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철들고 제 인생의 한 켠은 늘 감독님의 영화를 기다리고 보는 것이었어요. 속도계를 부숴버리고 폭주하는 인간들 때문이었어요. 모순되고 잔인한 인간의 본성이 빚어낸 난장판때문이었어요.

그런데 희망이라니요. 이렇게 분명하게 빛나는 희망이라니요. 그것이 이 기나긴 여정의 끝이었다니요. 이건 그 영화 속 결말들보다도 더 어처구니가 없잖아요. 감독님…그런데…

살바도르는 결국 해냈네요.

머나먼 마드리드의 어느 극장, 옛 연인이 무대에 올린 이야기를 지켜보던 남자가 흘린 것과 같은 색깔의 눈물이 내 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프닝 – 우리는 이제 공식적으로 늙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푸른 빛. 반데라스는 수영장 물속에 미동도 없이 사지를 늘어뜨린 채 가라앉아 있다.

부력이 의지를 대신해 그를 떠받치고 있을 뿐. 영화는 불길한 사체의 냄새로 가득하다.

육체의 화신으로 각인된 반데라스가 다짜고짜 눈에 들이미는 육신의 쇠락. 하지만 놀란 건 백발과 흰수염, 근육이 빠져 나간 쭈글한 몸 때문이 아니다. 마침내 그가 수면 위로 떠올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그 안을 가득 채운 것. 비어 있음. 한때 모든 여자의 심장을 꿰 뚫었을 라틴 종마의 찬란한 빛이 공허로 꺼져 있었다.

영화도 안 만들고 뭐하고 사냐는 지인의 안부에 그냥 산다고 말하지만, 그냥 살아있다고 말할 때 그 삶은 이미 죽음을 가리킨다. 입으로 산다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의 눈빛은 정확히 죽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피끓던 젊은 날 열광했던 아이콘의 쇠락은 정확히 그와 함께 당도한 나의 삶의 같은 지점을 겨눈다. 알모도바르의 버스에 함께 실려 온 지난 이십년의 시간 뒤 맞이한 이 순간을.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얼마만큼 죽어있는가.

우리는 한 버스를 타고 있어. 알모도바르의 버스에…감염은 시작되었고, 너도 곧 저렇게 될거야. 아니 이미…

우리는 이제 공식적으로 늙었다. 반데라스가 선언한 공지사항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 후의 이야기는 나에게 그 버스를 타고 들렀던 정류장과도 같은 세 편의 영화에 대한 기억을 소환시켰다. 시간이 더해져 함께 나이 먹은 세 이야기. 나에게 이 영화는 매우 애정했던 세 영화의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져 도착한 공동의 종착지였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너무나 밝은 빛이었다. 어이없게시리. 늙은 몸으로 뒷덜미에 내리꽂은 알모도바르의 완벽한 배신이었다.

내가 사는 피부 – 육체

영화의 시작. 살바도르의 고통(pain)의 면면은 속속들이 육체적인 것이다. 인간을 죽음으로 이르게 만드는 온갖 병증이 나열된다. 육신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만드는 환각의 순간은 자신의 전 여생을 돌아보는 기나긴 기억의 여정이 된다.

육체는 < 내가 사는 피부>의 주요 테마다. 한 인간을 완벽하게 소유하기 위한 육체의 해체와 변형. 하지만, 여기서의 육체는 겉면, 즉 피부였다. 해체의 대상과 주체가 있었고, 들끓는 욕망이 드라이브한 인위적인 해체였다. 그렇기 때문이 거기서 피부를 벗겨낼 때는, 고통스럽고 기괴한 풍경 속에서도 깊은 탐욕의 단 맛이 전해져 왔었다.

이 영화에서의 고통은 육체의 속, 장기의 변형으로 깊어졌다. 욕망이 아닌, 욕망이 거세된 몸에 들어닥친 사고. 그 누구의 욕망도 개입되지 않는 육신의 속절없는 쇠락이다.

이 몸 속의 변형은 더 이상 실사로 그릴 수 없어, CG가 등장한다. 그래픽을 사랑하시고 기가 막히게 쓰시는 알모도바르 감독님 영화 속에서 그래픽 같은 장면은 아니지만, 이렇게 기나긴 진짜 그래픽은 처음이었다. 그게 신체의 장기에 관한 것일 줄이야. 감독님이 추구해 온 존재의 해부학은 이렇게 생 몸에 카메라를 들이미는 깊이에 이른다.

늘 감독님의 집요한 육체의 현미경이 어디까지 파고들까 궁금했고, < 내가 사는 피부>를 보고 나서 여기가 그 종결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장기가 남아있었다. 한 인간을 파헤쳐 눈 앞에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마지막 레벨. 뭐, 이 다음은 세포와 바이러스를 들고 오시려나.

귀향 – 엄마

중독은 잠시나마 현재를 잊게 만들고, 육신의 고통이 잠시 자리를 내어준 사이 환각과 기억 사이의 시간은 어린 시절을 소환해낸다. 곧 소멸할 존재에게는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치유의 순간같다. 햇빛이 부서져 내리고, 노랫 소리가 들려 오고, 거기에 엄마가 있다. 알모도바르의 엄마가. 우리 인생의, 아니 최소한 알모도바르가 심어준 세계의 지분 속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빨래터의 찬란한 빛과 강인한 여인들의 노래…자연스럽게 영화는 < 귀향>을 소환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여인들. 씩씩하게 노래를 부르며 시냇물에 빨래를 하는 여인들. 역사에 담요를 깔고 자고, 초콜렛을 잘라 넣은 빵으로 끼니를 떼워도 무너지지 않았던 엄마들. 비가 새는 토굴을 아름다운 갤러리로 가꾸어 내고야 마는 너무나 익숙한 존재들이다.

잠시 엄마는 너는 좋은 아들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곧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엄마는 죽음으로조차 아들을 구한다. 영화는 기억의 환각 속 엄마를 불러 내 현재의 영화로 환생시키는 마법으로 끝난다. 그는 그렇게 구원 받았다.

나쁜 교육 – 사랑

시작은 아이맥 바탕화면에 저장되어 있던 파일 하나. 그 파일의 이름인 Addicion(중독)은 중독되었던 과거를 무대 위에 올리고 시간과 장소를 거슬러 다시 그 중독의 대상을 만나게 한다. 그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 쓴 자신의 이야기를 듣게 만들 수도 있다.

전화를 받았던 밤, 살바도르의 떨리는 목소리. 설레임만을 증폭시키는 어설픈 밀땅 코스프레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마지막 키스와 참지 못한 눈물…이 순간에도, 말을 하는 것은 반데라스의 대사가 아니라 눈빛이다.

중독자였던 연인은 중독을 벗어나 정상적인 삶의 괘도를 찾았고, 중독된 그를 감당하지 못해 떠난 내가 오히려 중독자 신세가 되어버렸다. 완벽하게 뒤바뀐 처지가 그를 실감하게 했을까?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갈까?
그러고 싶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아…살바도르는 이 순간 이미 해냈다. 감독님의 대놓고 던진 힌트를 내가 못 알아차린 것일 뿐. 가장 큰 중독, 사랑. 그 중독의 대상을 끊을 수 있는 그는 더 이상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마약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육체를 회복하려한다.

이 순간 난 이미 나쁜 교육의 결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지막 대사. 사랑하는 엔리께…난 해냈어. 그 비극성을. 그래야 알모도바르지. 진정한 불행이란 이렇게 가장 희망적인 순간에 아무 것도 아닌 것만 같은 사래들림같은 것이 덮쳐오는 거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순간에 뚱보신부가 들어와 목을 비틀어버리는 것처럼.

하지만 아니었다. 나쁜 교육에서의 그 비극이 뒤집혔다. 정말 해냈네요. 감독님. 그 사람을 문 앞에서 보내고, 약을 끊고, 현대 의학으로 육체의 겁박에 이겨냈어요. 그리고 페네로페 크루즈가 그 순간을 완성시켰다.

구원은 사랑으로부터…
사랑하는 그 사람들으로부터.

아 이 뻔하디 뻔한 결론을…
알모도바르에게서……………….

오스카

기생충 신드롬에 소름돋으면서도, 외국어 영화상 후보의 한 칸을 차지했다 조용히 지나간 < 페인 앤 글로리>가 내내 가슴이 남았있었다. 한 시대 앞서 오스카란 로컬에 그 누구보다 가장 사적인 것으로 인터내셔널의 아스팔트를 깔았던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부탁했었다. 다시 뜨거워져 달라고 그렇게 어처구니 없고 광기어린 알모도바르로 돌아가 달라고. 그게 아니었다. 삶의 날 것을 있는 그대로…식어버린 육체는 식어버린 그대로 스크린 위에 바치는 것이 알모도바르였다.

오스카의 최대 유행어를 조금 응용해 본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다. 알모도바르, 당신 삶을 산 채로 도려내 스크린 위에 바친 사람. 뜨겁디 뜨겁던 아름다운 젊은 육체 뿐만 아니라 거의 사체가 되어버린, 그래서 이젠 김도 더 이상 나지 않는 노인 냄새 진동하는 육체조차 날 것 그대로 영화의 제단에 올려놓은 사람.이 보다 더한 사의 경지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감독님에 대한 나의 애정의 오해를 바로잡는다. 그저 대책없이 날뛰어서가 아니었다고. 그의 체온이 아니라 가공하지 않음을 사랑한 거라고.

각자의 온도로 뜨거웠던 세 영화가 이렇게 하나로 만났다. 누구도 데이게 하지 못할 미적지근한 온도로…그 사람에게조차 하룻밤을 허락하지 않고 문 앞에서 그냥 돌려보낼 정도로. 하지만, 격하게 부둥켜 침대 위를 뒹구는 것보다 더 깊어진 마음으로. 그리고, 영화는 계속된다. 초상화 뒤에 쓰여진 편지가 도착하듯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알모보바르의 영화가 나에게 도착했다.

내 인생의 오스카를 당신에게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