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이 히(치콕) 감독님이 꿈에 나오셨다. 팩토리 27층에서 영화 워크샵 같은 걸 하고 있는데, 직접 오셔서 8mm로 시범을 보여주셨다. 캠을 들고, 창밖을 촬영하시는데 낮게 천천히 찍다가 갑자기 캠을 하늘로 들어올리시며 건물 아래쪽으로 렌즈 방향을 트셨다. 카메라에 연결된 화면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던 나는, 화면에서 느껴지는 갑작스런 높이감에 현기증을 느끼며 뒤로 물러서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야. 역시 히감독님은 화면으로 모든 걸 보여주시는구나. 꿈속에서도 히감독님의 촬영에 연신 감탄을 했다. 어제 본 <39계단>이 너무 재미있었던거다.

EBS < 세계의 명화> 7월 히치콕 특집. 나에게는 하늘에서 보석들이 막 떨어지는 것 같은 시간이다. 토요일 밤마다 죽이 딱 맞는 누군가와의 데이트가 잡혀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스크린에서 보고 싶은 것들을 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데, 그게 내 취향의 문제인지 세상의 문제인지 영화의 문제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특히나 여름이면 더더욱 극장에서 볼 영화가 없어지면서 왠지 모를 소외감도 깊어지는데, 이런 때 히감독님의 영화는 큰 위안이 된다. You’re not alone~ I’m here with you~
선배 생일 챙겨주느라 < 이창>은 반절 밖에 못 봤다. 사실, 피핑 톰질하는 앞부분이 재밌는데. 그래도, 코넬 울리히의 원작
문장과 영상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원작에서 히감독님이 더한 캐릭터들의 맛을 확인하게 되어 기뻤다. 능글맞은 제임스 스튜어트와 공주님 그레이스 캘리. 하지만, 사건이 진전되면서 그레이스 캘리는 누구보다도 더 깊게 사건 속으로 빠져들고,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위험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재치넘치게~임기응변. 반전 금발미녀랄까. 이런 캐릭터들을 더해 원작의 의도를 명확히 표현하면서도, 자신의 세계를 명확하게 만들어내신 솜씨가 대단하다. 여력이 뻗쳤다면, 코넬 울리히의 문장과 히감독님의 영상 캡쳐를 교차 편집해서 올려보고 싶으나…여력이 안 뻗친다. 누가 해 주면 좋겠다만 ㅠ
< 현기증>에서는 킴 노박의 아름다움이 새삼스러웠다. 이상한 여자다. 두 가슴을 봉곳이 세우고, 개미 허리를 있는대로 조여맨 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걷는 금발 미녀. 우아하면서도 천박하고, 지적이면서도 육감적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피카소 그림 속 여자같은 신비감을 준다. 영화의 이중 캐릭터에도 딱이지만, 제목에도 딱 맞는 참으로 적절한 캐스팅이지 싶다. 여자인 내가 보기에도 현기증이 나는데, 남자들이 보면 어떨까? 그냥 스토리와 관계없이 현기증, 그 자체다.
< 현기증>은 어두운 영화다. 한 여자에게 천착하지 못하고, 지 좋다는 여자에게 농담따먹기 밖에 안되는 느물느물한 퇴직 형사 제임스 스튜어트. 트라우마에 발목잡혀 누구에게도 진심을 주지않았던 잔머리 뺀질남이 한 여자에게 있는대로 진지해져 미쳐가고 결국 정신 병원에 갇히기까지의 과정은 서스펜스 이상의 서늘함을 던진다. 하지만, 이 조차 끝이 아니다. 전반부에 가득한 농기는 점점 물이 빠지고, 영화는 점점 이상한 심연으로 관객들을 데려간다. < 현기증>은 히치콕의 어두움이 가장 여과없이 날을 세운 영화 같다. 하지만, 희망 한 가닥 남기지 않는 비극에서조차 히감독님은 오바하는 법이 없으시니…..그저 납죽. 개인적으로 제임스 스튜어트 짝사랑하는 여자 캐릭터. 이런 게 히감독님만의 묘미일거다.
그리고 어제의 <39계단>. 예~전에 봤는데, 스토리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서 다행이었다. 순간순간이 촌철살인이고, 모든 기대를 한치의 주저도 없이 뒤엎어 버리는 반전의 연속이다. 35년도 작품이니 36세 때 감독하신 거지만, 아직 히감독님의 진짜 전성시대가 오기 전인 ‘영국 시대’ 끝물의 작품이다. 흑백의 철지난 영상이지만, 그때 이미 히감독님이 히치콕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면이나 촬영이 좀 촌스럽다 뿐이지, 캐릭터는 왠만한 요즘 영화/드라마보다 훨씬 더 모던하다. 보다가 너무 많이 웃고, 놀래고… 왠만한 기대는 칼처럼 잘라버리는데, 아…진짜 재미가 뭔지 아는 감독님이시다. 그리고 이 현란한 캐릭터들의 향연. *살아있는* 인간들. 핵심작렬의 대사들. 한 순간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악마적 디테일들. 유머감각까지도. 사실 히감독님 영화는 분석보다도 명장면을 꼽으며 낄낄거려야 제 맛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거의 모든 장면이 명장면이라서, 정리를 할 수가 없다. 그래도 빼놓을 수 없는 것. 직업 의식! 직업 의식…ㅎㅎ 영화 전체를 풍미하다가 결국 반전의 포인트로 승화되는 캐릭터들의 직업 의식이 너무 웃기고 재미있다.
거장의 초기 작품처럼 재미있는 게 없다. 다소 어설프기도 하고 허술할 수도 있지만, 그를 그답게 만들어 주는 것, 그래서 내가 그에게 열광하는 모든 것들은 이미 초기 작품에 다 들어가 있다. 형태의 촌스러움이나 다소 거친 표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앞으로 펼쳐나갈 ‘세계’의 증명이다. 오히려, 그런 세계는 초기 작품이 더 생생하게 나타난다.
나는 이상한 영화를 만들다가 경험을 쌓고 성장해서 갑자기 멋진 영화를 만든 감독을 본 적이 별로 없다. (반대의 경우는 종종 있지만) 물론 내가 영화를 많이 보는 건 아닌지라, 그냥 철저한 나만의 편식성 통계치일 뿐이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의 영화는 처음부터 다 ‘그들’의 영화였다. 코헨은 < 블러드 심플>부터 딱 그냥 씨네필 영화쟁이였고, 우디 알렌은 < 돈을 갖고 튀어라>같은 데서부터 자학피학 인간 코메디였고, 알모도바르는 < 페피, 루시, 봄>에서부터 미친 열정이었다. 막 시작된 ‘한 세계’가 숙성되고, 세련되어지고, 깊어져 또 다른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본다는 것은 행운이다. 하지만, 거장이 된 후에 접해서 거꾸로 그의 초기 작품을 다시 거슬러 보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인 것 같다. 내가 열광하게 될 세계의 ‘어린 싹’을 발견하는 즐거움.
<39계단>에서도 내가 거장이 된 후 히감독님 영화에서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다 느낄 수 있었다. 어떨 땐, 그냥 나란 사람을 분석해서 나 재미있으라고 만든 영화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히감독님의 영화가 가장 아름다운가? 가장 화려한가? 가장 감동적인가? 그런 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히감독님은 가장 영화같은 영화를 만드셨던 감독님이었던 것 같다. 문학도 연극도 아닌, 영화라는 방식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씬들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영화든 문학이든 언론이든 뭐가 됐든 한 분야의 가장 깊은 정수를 다다른 이들이 멋있어 보인다^^
어쨌든 기대 많이 했던 특집이었는데, 어느덧 7월도 다 가고 ….이제 히감독님 특집도 한 주 남았다. < 싸이코> ㅋㅋ 문제적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