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상의 그대 – You will meet a tall dark stranger (2010)
런던 외곽, 한 할머니가 택시에서 내려 불안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다 허름한 뒷골목으로 스며든다. 40년간 같이 살던 남편에게 이혼 ‘당’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다 지쳐 마침내 점쟁이를 찾아 간 헬레나(젬마 존스). 오갈 데 없는 그녀가 자신에게 남은 한 가지, ‘돈지갑’을 들고 막장으로 향하는 모습 위로 나레이션이 흐른다. “인생은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차 있고,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다.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그녀 주변에는 어느밤 갑자기 ‘영원’을 보게 되어, 조강지처 버리고 새인생 출발해 보겠다 발버둥치는 전남편 알피(안소니 홉킨스)와 갤러리 운영이 꿈이지만 팔리지도 않는 소설이나 쓰고 있는 남편 덕(?)에 갤러리 어시스트 해야 하는 딸 샐리(나오미 와츠), 의대 나와서 안정된 길 버리고 소설 쓰다가 재능의 한계로 이제 리무진 운전수를 해야 할 처지에 놓인 샐리의 남편 로이(조시 브롤린)이 있다.
모두 미래니 전생이니 하는 점쟁이 헛소리에 놀아나는 샐리를 보며 비웃고 짜증내지만 정작 다들 제 꾀에 넘어가 파국을 맞고, 가지를 늘어뜨린 빼곡한 수목, 풍성한 초록의 나뭇잎들 사이에서 벤치에 둘이 앉아 해피엔딩의 키스신을 맞이하는 것은 오직 헬레나 뿐이다. 하지만, 이조차 ‘해피엔딩’이라 부르기엔 뭔가 어색하다. 정신줄 놓은 이들의 ‘그들만의 연대’가 주는 불편함 때문이다. 동의할 수 없는 전제에서 꽃 핀 행복을 지켜봐야하는 자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디 알렌씨는 이런 말도 안되는 전제라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인생은 무의미하고 엉망징창이라는 사실을 아름다운 런던의 구석구석에서 밝혀내며, 관객을 항복시킨다. 너의 그 대단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전제가 정작 너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할 때, 어떻게 할거냐고 질문하며.
이 영화는 집 안에서 행복하지 않은 이들이 집 밖으로 나가 행복을 찾다 병신되는 이야기다. 그래서, 영화는 집 안의 이야기와 집 밖의 이야기로 나뉜다. 집 안에서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다른 것을 바라고, 말을 하지만 내용은 상대방에게 닿지 않는다. 이 엇갈림을 표현하는 것은 샐리의 집 구조다. 서로 분리된 작은 공간들이 복도와 같은 좁은 통로로 연결된 이 집에서, 각자의 공간과 욕망은 이미 분리되어 있다. 그 공간은 이야기하다 불리해지면 도피하는 곳이기도 하고, 양해도 없이 불쑥 침범해 히스테리를 자아내는 곳이기도 하고, 아내의 눈치를 보며 건너집 여자를 관음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들이 대화라는 것을 시도할 때, 카메라는 이들을 편안하게 안정된 고정 프레임으로 잡지 못하고, 이들이 움직는 공간과 공간 사이를 분주히 따라다니며 불쑥 끼어들거나 불쑥 도망친 사람들을 쫓아가며, 커트없이 원숏-투숏-쓰리숏이 연속해서 교체되는 역동적인 변화를 만든다. 두 사람이 소리칠 때,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쓰리숏을 만들었다가, 좌절한 사람이 빠져나가 투숏을 만들고, 갑자기 모두 사라져 보이스만 남겨지는 등 가족이 집 안에서 서로에게 가지는 복잡한 속내와 소통의 난해함을 카메라워크로 보여준다. 숏트가 바뀔때마다 화면에 남겨진 이들은 프레임을 바톤터치 받고, 절망적으로 갈등을 이어달린다. 특히, 로이의 책이 거절당하고 샐리가 상사와 친구의 진실을 확인한 후, 신경쇠약직전의 샐리-로이-헬레나가 서로에게 퍼붓는 3분여 간의 롱테이크는 이들이 직면한 감정적 붕괴를 탁월하게 그려낸 것 같다. 쇼트를 못 보는 내가 쇼트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으니.
집에서 불행한 그들은 시선은 자연스럽게 밖을 향한다. 샐리는 갤러리 오너 그렉(안토니오 반데라스)을 바라보고, 로이는 건너 편 집 창문으로 넘겨다 보이는 빨간 옷의 여인을 욕망한다(이창적 상황!! 히치콕 만세~) 심지어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다른 집을 만든다. 밖은 런던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우디 알렌의 공간이다. 뉴욕에 대해 그러했듯, 우디 알렌은 런던의 아름다움을 속속들이 끄집어내 펼쳐보인다. 그냥 보기 좋은 풍경 말구…그 도시의 진가를 알고 소중히 하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꽃가게, 공원, 거리…런던에 가본 적 없지만, 런던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공간에서 펼쳐지는 비극이라니.
이 비극은 아비를 살해하고, 총기가 난사하고, 출생의 비밀이나 거대한 정치적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일상의 순간 순간 겪게 되는 ‘불안’ 젊은 와이프 몰래 비아그라를 먹고 약기운이 돌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하는 노인네의 ‘불안’ 친구의 귀에서 마음에 둔 남자와 예전에 골랐던 귀걸이를 발견하게 된 순간의 ‘불안’ 홀딱 빠져버린 여자가 멋드러진 약혼자와 팔장 끼고 걸어가는 것을 목격할 때의 ‘불안’ 영혼을 잠식하는 깨알같은 불안의 순간들이 집 밖의 멋진 삶을 찾아 헤매이는 불안한 영혼들의 뒷통수에 끔찍한 비극의 칼날을 꼽는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이들이 당면하게 된 망연자실은 한 번쯤 새 삶을 찾아본 댓가라기엔 너무 과하다. 그리고, 평화의 한 순간은 욕망의 가해자로 가득한 이 스토리에서 우스꽝스러운 ‘환상’에 기댄 유일한 피해자에게 잠시 드리운다.
제 정신 가지고는 살 수 없는 세상, delusion은 일용품일까?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고 다시 돌아오고 싶지만, 집은 무너지고 없다. 너무 과한 댓가를 요구했던 risk-taking. 저 위에서 인생을 부감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우디 선생이 위트를 당의삼아 그린 잔인한 인생 지형도. 가장 어둡고 비극적으로 느껴졌던 내 27번째 a tall dark 우디 알렌.
PS.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에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