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H 3월호에 기고한 글. 매거진 타겟 대비 너무 튄다고 제목부터 내용까지 싹 워싱되어 나갔지만, 내 블로그니까 Blogger’s cut으로 실어본다.
간만의 원고청탁에 봄이란 오감으로 달려든다고 지지배배 울어봤는데, 어느덧 지애 데뷔전도, WBC도, 3월도 모두 지나갔구려.
그녀의 봄 불감증 탈출기

사진 출처 : http://www.flickr.com/photos/kuzdra/2313716023/
겨우내 붙여두었던 문풍지를 뜯고 창문을 여니 영장 발부 받고 대기 중이었다는 듯 따순 기운이 왈칵 덮쳐온다. 틀어놓았던 라디오에서 친숙한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전쟁의 종식을 선포하듯 봄의 도래를 일방적으로 공지하는 이 역사적인 순간, 내 머리 속에 떠오른 말.

사진 출처 : http://www.flickr.com/photos/shexbeer/2183020131/
어느 대학교 화장실의 낙서라던가? 그래, 바로 이거야. 아직 글로브도 끼지 않았는데 한 방 먹은 것 같은 이 느낌. 준비가 안 된 나 같은 사람은 어떡하라구? 겨울에서 봄으로 곧장 이어지는 이 극적인 비약에 적응하지 못하겠는 나 같은 사람은! 난 마치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한 세상에서 홀로이 고독한 광야의 초인처럼 절규했다.
“불감증이야.” 친구들의 진단은 명쾌했다. 기분이 나빴던 건 이어지는 A의 말이었다. “세밀한 진단을 받아봐야 하겠지만, 봄 불감증은 그리 치료가 어려운 병이 아니니까.” 뭐야, 지금 내가 치료가 필요한 상태라구?” 나이가 들수록 외부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는 신체 구조로 인해 일시적으로 세포의 감각이 무뎌지는 현상이지.” 친구 B가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걱정 마. 너에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니니까. 원인은 다양하대. 심지어 우리 모두가 사랑해 마지 않는 하이힐도 불감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잖아.” 나는 어느새 친구들이 짠 단단한 스크럼 안에 갇혀 있었고, 그녀들은 자청하여 나의 치료사로 나섰다. 그녀들 얼굴에 도는 화색은 왠지 만만한 먹이감을 만난 사자를 떠올리게 했지만, 애정을 앞세운 동시다발적 공세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우선 귀가 트여야 해. 봄은 소리를 타고 온다구.” 감각쟁이로 소문난 음악녀 A는 노래를 처방했다. “자고로 봄 노래라면 말이야, 봄 같아야 한다구. 하느작거리는 나비의 날개처럼 투명한 공기 속으로 휘발되어버릴 듯한 가벼움, 거품이 솟아오르는 스파클링 와인처럼 톡 쏘는 달콤함, 피어 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어질어질한 약간의 미열까지를 모두 동반해야 하는 법이지. 포트 오브 노츠의 More Than Paradise처럼. 키린지의 Alien처럼. 팻 메스니 그룹의 보이스를 담당했던 페드로 아즈나르의 Amor de Juventud처럼. 아모~~~오르 데 호벤투드! ‘청춘의 사랑’이라니 정말 딱 봄이라고 할 밖에. 이런 음악으로 귀를 열고 나면, 비로소 넌 벚꽃이 피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거야. ”
Pedro Aznar / Amor de Juventud [Aznar Lebon Vol.1//2007]
책 읽어주는녀 B는 자신의 검은 뿔테 안경을 끌어올렸다. “노노~ 선율만으로는 부족해. 따스하게 흐르는 봄날의 햇살, 그 아래서 가장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행위는 바로 독서! 영화 < 러브레터>봤니? 팔랑거리는 새하얀 커튼 사이에서 햇살을 가득 받으며 한 권의 책 속에 빠져있던 후지이 이츠키야 말로 청춘, 즉 봄의 완벽한 구현이야. 그가 들고 있는 책은 무엇이었을까? 하루키? 에쿠니 가오리? 요시다 슈이치? 아냐. 이 시대 젊음의 초상이라면 좀 더 모던하고 발랄할 필요가 있어. 대만작가 왕원화의 < 끝에서 두 번 째 여자친구>처럼.” 그녀는 수첩을 뒤적였다.
“봄은 그녀가 사랑하는 계절/산들바람이 멋대로 그녀의 머리칼을 날릴 때/그녀는 세상의 소란함은 마음에 두지도 않고/자기 생이 바뀌는 것만 생각하지~어때, 멋지지 않아? 왕원화의 또 다른 작품 < 단백질 소녀>도 최고야. 만화같은 제목이지만, 뼈와 살로 충만해 일본 소설에서 허기진 2% 아니 20%를 채워주지. 예로부터 서사가 강한 중국 소설의 전통도 있겠지만, 그건 아마도 스탠퍼드 대학에서 MBA를 하고 타이완 MTV 부사장과 컬럼비아 영화사 마케팅 매니저를 하고 있는 작가의 이력 때문이기도 할거야. 거품을 쏙 뺀 이 시대 도시남녀들이 생생히 그려져 있거든. 게다가 정신적 불감증에 시달리는 인물들도 꽤 나오니 말이야…” 마지막 문장을 내뱉으며 그녀는 슬쩍 내 눈치를 봤다. .
“약해.” 스포츠녀 C는 단호히 B의 말을 끊었다. “지금 얘의 상태는 그 정도로 치유가 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야. 중증이라구. 좀 더 다이내믹하고 강렬한 뭔가가 필요해.” 그녀는 카페 테이블에 놓여져 있는 화분의 초록색 잎사귀를 가리켰다. “그린. 푸른 잔디. 눈이 시릴 정도로 초록색 위에서 펼쳐지는 스포츠의 들끓는 에너지만이 봄 불감증을 치유할 수 있어. 작년 올림픽에서 이승엽이 친 홈런 기억나니? 삼진과 병살 행진으로 이어진 지독한 부진 속에서도 김경문 감독의 신뢰 야구가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역전 홈런을 불렀잖아. 지금도 그 생각을 하니 온 몸에 소름이 돋는군. 마침 3월엔 WBC가 벌어져. 한국, 일본, 쿠바, 미국…전 세계 16개국 영웅 호걸들의 대전이지. 이 봄, 대한민국은 야구로 또 한 번 들썩일거야.
유럽에서는 축구가 불붙어. 시즌 막바지로 치달으며 매 년 영국 프리미어리그는 봄에 최고의 절정에 달하거든. 유럽의 월드컵, 챔피언스 리그는 어떻구. 마침 우리의 히딩크 감독님께서 첼시의 감독으로 긴급 투입되셨잖니. 부진에 빠진 부자구단 첼시에 히감독님의 매직이 다시 한 번 발휘될까? 히감독님이 이끄는 첼시와 지성이가 뛰는 맨유가 붙는다면 어떨까?” 그녀는 정말로 잠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골프는 또 어떻구? 천사의 미소와 악마의 멘탈을 지닌 신지애와 밑바닥에서 재기한 천재 미녀골퍼 미쉘 위의 LPGA 격돌. 물론 난 지애가 단군 이래 가장 유명한 한국 여성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아, 이처럼 흥분되는 봄 시즌이 또 있을까?”
열정적인 C의 웅변 앞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나를 흔들어 깨운 것은 영화 매니아 D였다. “춘.곤.증! 너무나도 달콤하고 유혹적인 봄날의 단꿈. 이 신체 현상과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는 미쉘 공드리의 < 수면의 과학>이지. 제목과는 달리 절대 졸립지도 않고, 과학적이지도 않아. 쇼 윈도우에 마네킹, 거리의 간판들, 길가의 비둘기…회춘한 마음에 세상 모든 것들이 다 달콤하게 말을 걸어 오지. 오색찬란한 화면 위로 펼쳐지는 한 편의 동화같은 깜찍한 태국 영화 < 시티즌 독>은 어떨까? 대도시 방콕으로 올라와 한 눈에 진에게 반한 시골총각 주인공은 이렇게 말해 “진, 너의 모든 행동들이 내겐 마법같아” 무감각하게 굳어 버린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건 봄날보다 더 신비로운 스크린의 마법이라구.”
영화 < 시티즌 독>
그 순간 우리가 주문한 특선 봄나물 샐러드를 포크로 집어 내 코 앞에서 살짝 흔들었다 입 안에 넣어준 것은 맛집 블로그를 운영하는 E였다. “뭐니뭐니해도 봄은 맛과 향기로 느끼는 거야. 혀와 코가 느끼지 못하는 봄을 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녀의 두른 스카프에는 하얀 바탕에 새빨간 딸기들이 먹음직스럽게 프린트되어 있었다. “봄 딸기의 매혹적인 향기는 마취제를 맞은 무딘 영혼도 깨울 수 있어. 생크림에 찍어 한입 베어 물고, 모엣 샹동이나 무스카토 다스티처럼 달달한 샴페인이나 와인을 곁들이면~왜 사람들이 천국은 매일 봄이라고 하는지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봄 속으로 빠져들지 못한다면, 무창포로 가서 제철 맞은 알이 꽉 찬 쭈꾸미를 먹자. 씹으면 씹을 수록 쫄깃쫄깃 감칠맛 우러나 봄바람 난 바다의 속내음을 그대의 우울한 혈관 속으로 침투시켜 봄 바이러스를 퍼트릴 테니.”

그녀들의 열기는 100분 토론처럼 후끈 달아올랐고, 또 그만큼 결론을 합의하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명쾌하게 정리해 줄 손석희도 없지 않은가. 게걸스러운 난상 토론장이 되어버린 친구 모임에서 차가운 국처럼 식어버린 사람은 나 뿐이었다.
각자의 저녁 2부를 향해 뿔뿔히 흩어진 그녀들이 떠난 자리, 홀로 앉은 나는 하얗게 올라오는 손바닥 각질을 뜯어내고 있었다. 긴 겨울잠을 끝내고 털갈이를 하는 동물들처럼 봄마다 내 손바닥에는 뜯어내야 하는 하얀 각질들이 솟아났다. 그 무엇보다 강력하게 봄이 왔음을 알리는 내 몸의 시그널. 확실히 봄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증거였다. 이 때 문자 한 통이 날라왔다.
아아, 이 번호는…바로 그였다. 심장에 휘몰아치는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 따순 기운 하나가 훅~하고 솟아올랐다. 이 봄도 맨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 아닐까? 어느 심심한 저녁에 보낸 문자 한 줄만큼이나 작고 사소하게. 그녀는 답장을 찍기 시작했다. “”간신히 승선했어요. 아직은 도착을 못 했네요~” 어쩌면 우리는 한 배를 타고 있을까? 우리는 함께 이 봄을 보게 될까? 함께 키린지를 들으며, 단백질 소녀를 펼쳐 놓고, 한국 야구 대표팀을 응원하고, 서로의 입가에 생크림을 묻히며 산딸기를 먹여주며 수면의 과학 혹은 혼곤한 봄날의 수면 속으로 빠져들게 될까? 핸드폰의 확인 버튼을 누르자, 저 멀리 신기루처럼 뿌옇던 봄의 라인이 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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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
< 정유진의 웹 기획론> < 정유진의 웹 2.0 기획론>의 저자.
낮에는 기술혁신팀 차장, 밤에는 유진닷컴(www.youzin.com) 운영자. 평일에는 프로 직딩, 주말에는 초보 골퍼.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에 약하고, 이중생활이 즐거운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