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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예술 영화인 줄 알았는데, 4편의 시리즈와 메이킹까지 다 보고 나서는 이런 것이 넷플릭스적인 게 아닐까 싶었다. 무료 1개월 가입으로 겨우 대표작 몇 편을 정주행했을 뿐이지만, 플레이하는 편마다 모두 넷플릭스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강렬한 세계였다. 시장 치킨을 먹다가 처음으로 KFC를 먹었을 때, 수퍼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베스킨 라빈스를 처음 맛보았을 때의 느낌.

그리고 베를린에서

19살의 여주인공 에스티는 자신의 삶을 짓누르는 숨막히는 뉴욕의 유대교 하디시즘 공동체에서 걸어 나와 가방 하나 없이 입던 옷, 신발 그대로 미리 몰래 만들어둔 여권을 들고 비행기에 올라 베를린으로 탈출한다.

딱히 치밀한 계획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지만, 상황은 예상대로(?) 복잡하게 얽혀간다. 받아주리라 생각했던 엄마는 레즈비언 연인과 동거 중이고, 랍비의 명을 받은 남편과 조폭스런 남편의 사촌이 합세해 뒤를 쫓는다. 심지어 그녀는 임신 중이다. 순혈한 유대 핏줄의 새 생명을 품고 유대인 학살의 역사를 품은 도시를 떠돈다. 탈출이 부랑이 되고, 대학살의 장에서 새로운 삶, 새 생명의 터전을 찾는 역설.

하지만 결국 용기와 결단, 재능과 운의 대동단결 총결집으로 그녀는 베를린에서 간절히 원했던 새로운 인생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꽤 괜찮아 보이는 독일인 남친과 음악가 친구들, 카리스마 넘치는 교수님 스폰서까지 단박에 겟한 채. 행운의 여신이 짓는 미소는 그 어떤 인간의 계획보다 치밀하고 찬란하다. 아니면 죽을 힘을 다해 낸 용기란 이 정도의 행운을 불러들이는가…

구속의 사슬을 끊어낸 자유를 향한 한 여자의 여정에 감동과 자극을 받으며 하게 되었던 질문이다.

하디시즘 – 희귀종

넷플릭스는 희귀한 것들을 자극적으로 다룬다. 희귀하다는 것은 소재에 있고, 자극적이라는 것은 디테일에서 나온다. 희귀한 것을 매우 디테일하게 잡아낼 때 감각은 요동친다. 그렇게 넷플릭스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컨텐츠가 된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뉴욕 속 하디시즘 공동체같은 것을 들이밀며.

귀 옆에 대롱대롱 매달린 곱슬 머리부터 의상, 식사 예절, 종교 의식, 가족과 남녀 관계의 매너까지 이건 글로벌 시대의 위아더월드를 무색하게 만드는 철저히 폐쇄된 그들만의 세상이다. 제 3자가 보기엔 기기묘묘하지만 그들에게는 매일의 일상이고, 시대를 역류하고 문명화를 포기하면서까지도 지켜내야 할 전통이다.

이 희귀한 하디시즘 전통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철저한 고증으로 디테일로 그려냈다. 마치 다큐멘터를 보는 듯한 경험이었다. < 타이거킹> < 블라인드 데이트>을 봤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뭐 이런 인간들이 다 있나. 이런 경험을 넷플릭스에서 지속적으로 하게 된다. 몇 배로 쎈 19금 그알을 보는 듯한.

이 다큐멘터터리는 ‘난 남들과는 달라요’라고 말하는 한 여자의 침입으로 드라마가 된다. 제 3자임을 선언한 그녀는 그들의 이상함을 인지할 수 있는 존재이며, 전통이라는 미명 하에 짓밟히는 개인의 삶에 분노하는 관람자의 시선과 궤를 같이 한다.

그녀는 곧 결혼을 통해 그 남들의 본진 속에 던저져 온갖 모멸을 겪으며, 그 이상함을 수용하고 남들과 같게 살아갈지를 시험당하게 된다. 물론 주인공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대신 탈출을 선택한다. 실제 존재하는 볼거리에 대한 다큐적 흐름에서 삐져 나온 드라마의 시작이다.

행운의 여신 – 웰메이드 반전 드라마

하디시즘 커뮤니티가 다큐스럽게 그려지듯, 드라마 파트는 또 매우 전형적인 드라마스럽다. 탈출 이 후의 메인 테마인 음악 아카데미 입학까지의 과정이 그렇다. 매 순간 시의 적절한 운명적 만남과 운이 함께 한다. 4부작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치밀한 개연성을 셋팅하고 지루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서울과 베를린은 얼마나 다르기에 저렇게 처음 간 커피숍에서 운명을 바꿀 남자를 만나고 그를 통해 우정과 무작정 일박으로 교수님 눈에 띄어 며칠만에 그 지역 사람들에게도 8%밖에 가능하지 않은 장학금 시험에서 저런 반응을 얻는지(최종 합격 여부는 미정이지만)…노숙이다 뭐다 운명을 헤쳐나가는 지난한 과정같지만 산책하던 다리 아래서의 의외의 발견이 대반전을 포함해 따지고보면 엄청난 세렌디피티의 축복이 가득한 여정이다.

여기에 화룡점정인 엄마까지. 독일 시민권 서류는 몇 년 후를 내다본 엄마의 빅픽처, 신의 한 수 였다.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는 있지만, 자식의 미래를 예견하고 그때 짠하고 꺼내들 결정적 비기 하나를 던져주고 가는 엄마는 별로 없다. 계획이 있는 넷플릭스적 엄마였다.

한 소녀에게 전부였던 19년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길고 기나긴 터널을 지나는 것 아닐까. 아무리 걸어도 짧아지지 않는 터널 같은 것…이건 < 프리티 우먼>과도 같은 게 아닐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헐리우드 드림처럼 탈출에의 동경을 부추키는 무책임한 환상같은 게 아닐까.

이런 딴지조차 미리 예상한 듯 오프닝 타이틀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텍스트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 실화는 넷플릭스라는 채널에서 치밀한 기승전결과 놀라운 반전을 숨겨둔 웰메이드 드라마로 다가온다.

<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희귀한 소재의 다큐멘터리로 접근한 뉴욕편과 전형적인 넷플 여주의 고난극복기처럼 보이는 베를린편의 이중주로 다가왔다. 양쪽 모두 넷플릭스적이다.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시라 하스. 커다란 눈코입, 가늘고 밋밋한 어린이 몸매는 일반적인 미인의 기준과는 많이 달랐지만, 연기는 잊혀지지 않았다.

이렇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넷플릭스에서는 가능하다.

희귀종의 딜레마 – 무경계
하디시즘 공동체는 악인가? 하지만, 드라마는 그들을 단순히 여인들의 삶을 짓밟는 소시오패스 집단 범죄자로 그리지는 않는다. 왜 그들은 그렇게 사는가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는 설명들이 군데 군데 힌트로 주어진다.

무엇보다 그들이 그런 문화를 유지하게 된 배경에는 잔인한 대학살의 집단적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다. 생존이라는 명분으로 출발했지만 이제 그저 받아들여야 할 일상을 의지로 지탱하는 집단이다.

그들이 그들이 사랑하는 아내와 딸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억압은 무엇인가. 그것은 떨쳐내야 할 미개함인가 아니면 종족 보존의 기재인가. 에스티는 남다른 자각과 개인기를 발휘해 벗어난다. 하지만, 집단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여전히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을 선택한 여인들의 삶은 무엇일까.

어쩌면 무개념 신천지 같기도 하고, 어쩌면 스페인에 맞서 자신의 영토를 지키고 있는 올곧은 인디언 부족같기도 하다. 그들을 미개로 규정하는 것이 오히려 폭력같기도 하다. 드라마는 답을 주지 않은 채 그 두 집단 사이의 어디쯤인가를 오간다. 이런 선악에 경계를 짓지 않는 수용성을 넷플릭스에서는 자주 접하게 된다. 희귀한 소재에 대한 판단보류의 시선이다.

이런 모호한 지점들은 결국 나의 삶에 대해 같은 질문을 던진다. 무엇에 구속받고 있는가. 그것은 구속인가 생존인가. 왜 용기를 내지 못하는가.

차라리 명백한 선과 악이었으면 좋겠다. 용기는 낼 수 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에서 벗어나야 하는가이다. 에스티는 자신도 알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음악을 찾아가고 있었다. 넷플릭스 속으로 들어가 드라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