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발 : 5월 17일(월) 아침
어디로든 가야 한다는 당위.
어디로도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리고 눈을 뜨자 내 머리 속에 문득 떠오른 단어, 남도
떠난다~!

급하게 대충 짐을 꾸리고
오전 9시 10분, 간신히 목포행 기차에 오른다.
오늘 나의 목표는 땅끝에서의 낙조.
이 외에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날이 흐리다. 낙조를 볼 수 있으려나?
내 머리 속에 그려지는 땅끝의 이미지는 Happy Together의 한 장면.
장은 세상의 끝, 우슈아야의 등대에 서서
아휘,,양조위가 쓰리 아미고에서 녹음한 고독한 흐느낌을 바다에 던진다.
난 아무 것도 녹음해 가지 않고 있지만
버려야 할 녹슨 마음들이라면 가슴 속에 잔뜩 담고 있다.

땅끝에서 버린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이 여행의 시작.
하지만 할 수 있을까?
남도의 푸른 바다는 버린 뒤, 그 허한 먹먹함을 달래줄 수 있을까?
난 너무 무리한 기대를 가지고 출발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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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텅빈 객실.
홍익회 아저씨가 다가와 ‘밤보다 더 맛난 호두과자’를 권한다.
그런데 과자 파실 생각은 없는 듯, 혼자 무전 여행 가냐고 물어 보더니
껄껄껄 웃으며 선뜻 보디가드를 자처하신다.
“미모가 있어서 위험할텐데!”
“가다 하나 만들죠 뭐!”
기차가 터널로 들어서자 나도 모르게 어둔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을 들여다 본다.
‘아씨..내가 이쁘긴 이쁜가보지?!’
켁-
때론 이런 짧은 만남이 더 따스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최설민 (4살)
잠시 할머니 댁에 살러 가는 거란다.
할머니 큰 가방엔 손주 과자만 가득하고….아마 여기서도 ‘집으로’ 한 판을 찍혀질 모양.
함평역에서 할머니와 손주가 내리자
정말로 객실엔 나만 혼자 남았다.

# 땅끝 가는 길
2:00 (pm) 목포 도착.
목포는 볕부터 다르다. 이 직설적인 과시.
유쾌해진다. 낙조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좋은 예감.
역전 광장을 지나쳐 오는데
여긴 왜 이리 거친 인생들이 모여드는 걸까?
역전의 풍경은 어디나 대개 비슷비슷하다.
삼삼오오 그늘에 모여앉아 대낮부터 소주나 막걸리,
태양에 얼굴을 그을린 거칠고 검은 피부, 깊은 주름살을 가진 사람들.
예외없이 한켠에선 주정과 험한 말싸움
떠남과 도착을 주관하는 곳.
떠남의 출구. 도착의 입구.
생과 사.
그 앞에서 인간은 모두 거친 존재인지 모른다.

2:40(pm) 목포 터미널에서 땅끝으로 출발

이른 아침부터 하루를 꼬박 달려 여기까지 도착했다.
바다…너, 참 간만이네.

우선 민박을 잡고 쉬려는 순간,
음…보길도로 들어가는 막배가 5:30에 남아있음을 확인.
‘에이 그냥 질러버려?’

TTANGKKEUK
좀 과격한 표기
어쩐지 여기서 하룻밤을 머물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30여분간 땅끝 마을을 서성이다가, 지른다.
마음은 보길도에서 버려야 할 것 같다.
# 땅끝을 지나쳐 보길도로

땅끝에서 보리라 마음 먹었던 낙조를
보길도로 향하는 남해에서 맞는다.
구름에 가려 해는 보이지 않아도 바다는 황금빛으로 물들고
하염없이 그 빛 속에 빠져있다.
나의 노쇄한 IXY론 잡아내기는 힘든 그 아름다운 빛 속에.

닿고 싶다……..
문득 스스로 도시를 떠나 살 수 없는 도시의 아해라 규정했던 내가
얼마나 오래 이런 곳에서 버틸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모든 예상을 깨고, 아마 꽤 오래일 수도…
여기까지 와서도 유진이의 미친 셀프샷 놀이는 계속된다.
아싸~!

푸르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V자도 그려보고

때로는 음전모드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려도 보아라~
이렇게 낙조랑 잼나게 노는 동안
저 멀리서 성큼
보길도가 다가온다.

근데 아깐 낙조에 뭐 버린다고 하지 않았냐?…
좀 심각하게 폼 잡으며 말이다. -_-;;
# 예송리 가는 길
예송리가 유명하단다.
걸으면 2시간은 가야 하는 길.

마지막 버스를 놓치고, 운 좋게 동네 아저씨의 트럭에 실려
조약돌이 모래 대신 파도를 맞는다는 예송리로 향한다.
# 몽돌해변 ‘딱!’

속초나 강릉, 부산의 전문(?) 해변처럼 넓거나 잘 개발되어 있진 않지만
바로 여기가 ‘딱’ 내가 원했던 곳이다.
마구마구 걷고 싶게 만들어 주잖아.
오길 잘 했다. 이것만으로도…

좁은 골목들…돌담…얕은 집들.
왠지 한눈에 정이 가는 동네.
철이 아니라 그런지 관광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좋다.
# 몽돌 해변을 걷다.

여기서는 바다를 바라보는 것보다는
눈을 감고 바다가 만들어 내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파도가 밀려왔다 해변에 부딪쳤다, 조약돌에 쓸려갈 때의 몽글거림.
눈을 감고 이 소리를 듣고 있으면 아무리 어지러운 마음도 편안해질 수 밖에 없다.
천연의 ‘웰빙 사운드’
발이 푹푹 빠지는 자갈 해변을 날이 어둡도록,
그 어둠이 하염없이 깊어가도록 걷는다.
너무 어두워 이 끝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지만
걷고, 걷고, 걷는다.
이로써 마음이 덜어지는가?
설마.
그러나 난 노력형 인간~!!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걸어볼테다.
알 수 없는 우주 속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없이 노력하는 것 뿐
최인훈 ‘회색인’ 中
# 바람과 파도소리의 밤

잠든 머리맡으로 펼쳐진 풍경
자다가 어스름 새벽빛에 눈을 떴는데,
가까이 파도소리 들려온다.
살짝 열어둔 발코니 쪽 창으로 소금기 머금은 바람이 밀려 들어오고
바람이 세지면, 파도 소리도 높아진다.
퉁퉁 부은 얼굴을 창쪽으로 향하고, 반만 깨어
소리에 취해 바람에 취해
엄마의 자궁 안에 들어가 있는 아기처럼 이불을 돌돌 말아 웅크리고 있다.
내가 있으리라 예상했던, 그 보다 더 먼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만큼 행복해 하며
“치료해 줄거야.
아픈 곳이 있다면, 바람이 치료해 줄거야”
열어둔 문틈으로, 밤새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 조약돌들

아침 해변을 걸어야지~!
어제 밤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싱싱하게 피어나는 바다를 만나보자.

그렇게 많은 조약돌들이 굴러다니는데
하나도 똑같이 생긴 놈이 없다.

그런데도 모두 하나같이 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정감어린 모양새들이다.
오랜 세월 파도에 씻기고 쓸리고 뜨거운 볕에 말려졌다를 반복해야만 만들어질 수 있는 느낌.
이 해변에선 깨진 사이다병 조각도 동글동글 유순한 모양새를 갖춘다.

검은 공장에서 태어나 이 먼 해변에서 순한 조약돌이 되어 버린
사이다 병 조각이 어떤지 남같지 않아 말을 붙여본다.
‘슬픔없이 어찌 좋은 사람이 되겠니?’
# 톳
지금은 보길도는 톳철.
한국에서 쓰임새가 적은 톳은 전량 일본 수출인데, 킬로당 5,000원씩.
한 주먹이면 1kg이 된다니 꽤 괜찮은 돈벌이란다.

그래서 관광객이 와도 본 체 만 체, 이른 아침부터 톳 말리느라 모두 정신이 없다.
아무리 서성이며 호객(?)을 부추켜도 아무도 관심도 안 가져준다.
덕분에 밥 한그릇 못 사먹고….
# 고산 윤선도의 자취를 따라
가기전에 우선 중리 해수욕장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 한 판 박아주시고~…

이제 본격적으로 자취 따라가기…요이땅~!
낙서전은 생활하셨던 곳
세연정은 노셨던 곳
동천석실은 공부하셨던 곳
보길도에서 윤선도 선생 관련해서는 이 세 군데 정도만 찍어주면 될 것 같다.

낙서전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잠깐 눈도장만 찍어주고, 동천석실로-

동천석실 입구는 지금 공사 중
지난 저녁부터 쫄쫄 굶어 배고팠던 차였는데
저 멀리서 한 인부 아저씨가 부르신다.
“떡 좀 먹고 가~~~~ 떡 좀 먹고 가~~~~~~~~~”
진짜 이게 왠 떡이냐.
하도 떡을 맛나게 먹었더니(그럴 수 밖에 없다 -_-;;)
아예 컵라면까지 후다닥 끓여주신다.
라면이라는 음식에 대해 아무런 감흥 없어진 지 꽤 돼지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파김치를 얹어 먹은 저 신라면은
혀에서 살살 녹았다. 꿀꺽-
유진이에겐 너무나도 감격스러웠던 밥상

디저트로 커피까지 자~알 얻어먹고 동천석실로 go, go.
이런 작은 인연들이 모자이크처럼 나의 여행을 만들어간다.

한 15분쯤 산을 오르자 나타나는 동천석실
바로 여기서 오우가를 지으셨단다.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탁 트인 보길도의 풍광을 앞에 두고
서책을 넘기시며 공부를 하셨다니.
옛어른들이 누리셨던 그 정취란…캬~….

예전에 좋아했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獨樂堂 對月樓는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옛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獨樂堂 – 조정권 ‘산정묘지’ 中
한참을 시원한 산바람이 넘나드는 동천석실에서
누웠다 앉았다 혼자 놀기에 몰입하다가
세연정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이런 말이 있단다.
윤선도 선생은 날이 화창한 날이면 어김없이 세연정에서 노셨고,
우중충한 날은 동천석실에서 책을 보셨다.보길도지 中
햐…역시 옛날 사람들도 날이 화창하면 필 받아 놀러 나가셨구나. ㅋㅋ
여자도 불러다 춤도 추게 하시고, 술도 한 잔 하시고 그러셨나?
그런데 윤선도 선생의 놂이라 함은 다름아닌 ‘詩文’
시를 짓는 게 노는 거였고, 세연정에서 탄생한 명작이 ‘어부사시사’란다.
그래서 세연정 앞에는 어부사시사라는 밥집이 있다.
하지만 보길도의 매력은 그런 유적지에 있지 않다.
그건 말하자면, 보길도로 나서기 위한 핑계에 불과한 것이고
사람의 매력, 태양의 매력, 길의 매력…
직접 가서 그 길을 걷고, 그 볕을 느껴봐야 알 수 있다.
전남대 식물관인지가 있는데,
거기에 ‘semi-tropical(반열대)’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태양이 뜨거운 보길도는 그렇게 좀 이국적인 데가 있다.

그냥 동네 사람 사는 집인데,
꼭 인도네시아 어디의 리조트 삘이 난다.
이런 집이 아주 많다.

그렇게 보길도 선생의 유적지를 쭉 훑어 걸어내려오며
이 섬의 매력에 흠뻑 빠진다.

다음 번엔…보길도에선 등산을 하고 싶다.
이렇게 바다를 끼고 산을 오르는 정취가 꽤 그럴싸할 것 같다.
낙서전에서 동천석실을 거쳐 세연정…
그리고 배를 타고 나올 수 있는 청별항까지 걸어오는데
약 두 시간 남짓?
뚜벅이 여행으론 최적의 코스일 듯.
하지만 기본적으로 보길도에선 차가 있어야 여행하기 편하다.
아침 8시 버스를 놓치면 11시에나 다음 버스가 온다구요.
ㅎㅎ
# 다시 땅끝
배를 타고 다시 섬에서 뭍으로 나온다.
어제 못 찍어줬던 땅끝 전망대, 땅끝 탑…
열심히 올랐으나 뭐 별 감흥 없었고.
뜨거운 태양 아래 웃통을 벗아제친 한 사내가 내 시선을 잡는다.
화들짝~! ㅋㅋ


땅끝 전망대 가는 길에서 소사나무 묘목 파는 집을 발견했다면
고기람 어린이 (4세)에게 손을 흔들어 주시라.
유진이의 안부와 함께.

조금만 세월이 지나면
너도 햇빛에 그을린 구리빛 피부의 바다 사내가 되겠지?
파도를 두려워 하지 않는.
멋지겠다.
그 때도 웃통은 벗고 있어줘.
^^

그리고 기습 뽀뽀.
으하하…잽싸게 카메라로 포착.
캬..이런 영계 중 영계에게 뽀뽀를 받다니.
기분은 250% 업 & 업~!
이렇게 땅끝을 산뜻하게 정리하고 해남으로 넘어간다.
유진이의 남도기행 Pt. 1
여기까지-
[2004.5] 유진이의 남도기행
- 보길도, 땅끝 : 땅끝을 찾아서
- 해남, 보성 : 마음은 점점 세상을 잊어가고
- 벌교 : 주먹에 관한 세 가지 시선
- 순천…그리고 송광사에서의 4일
웃 염장이닷 ㅡㅠㅡ;; 신라면;;
영계한테 뽀뽀받으니까 좋으셨어요?? ^-^)a
보길도 다녀오셨군요. 세연정 앞에 동천다려에도 들러보시지.. ^-^
영계, 영계 하더니 드디어 성공했군요..
유진님의 여행기…모든게 눈에 잡힐듯 삼삼합니다.
실은, 목포에서 보길도까지 이르는 유진님의 족적 그대로를
작년 여름 휴가차 가까운 친구랑 둘이서 다녀왔답니다.
털털 거리는 구형 세피아를 몰고 엉덩이가 고생은 했지만,
보길도는…특히 좋았지요.
새벽에 텐트에서 일어나니 바다가 코앞에 다가와 있는데,
그 빛깔을 아직도 잊을수가 없답니다.
유진님은 홀로 고독(?)을 즐기며 다니셨으니
저랑은 또 다른 느낌의 여행이 되셨을 것 같네요.^^
+ 젊다는건 좋은거여~ 글치?
+ 그래… 젊을때 좋은거 많이 보고 맛있는거 많이 먹어야해…
+ 자~알 했다!
ㅋㅋㅋ
+ 건강하시죠?
저와 똑같은 해 똑같은 달에 남도에 계셨군요.
충분히 공감하며 구경하다 갑니다.
덕분에 사진 한장, 글 한줄 한줄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
또 놀러오겠습니다.
목포에 오신줄 알았으면
제가 모실텐데…
목포라…
역시 본 게 있으니, 민들레 소식 접하고도
예전이면 무감했을 목포, 고흥, 보성, 해남, …
제가 접했던 그 때 그 풍경들이 비에 젖은 버전으로 머리 속에 화악 그려지며,,새롭게 다가오네요. 관심도 더 생기고, 거기서 만났던 사람들 떠올리며 전에 없던 걱정도 더 되고.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이렇게 새롭게 느끼게 만드네요.
blackbird 검색하다.. 여기까지 와서 지나다 글 남깁니다.
저도 한빛에서 책을 몇권 번역하기도 하고, 책도 내기도 하고…
게다가, 땅끝을 보러 갔다 훌훌 보길도로 들어가는 배를 타게 된 것도.. 비슷하고. 전 벌써 10년도 넘었지만.
저는 예송리 까만 자갈 깔고 앉아서… 바다에 하나 하늘에 하나씩 떠 있는 두개의 보름달이랑, 소주 한병 마시고 왔지요. 뭐가 그리 슬픈일 많았는지… 취해서 민박집으로 돌아가며 한참 울었던 기억이…
님이랑 다른 거라면, 저는 등산을 했었습니다. 꼬불꼬불 한참 산길을 올라가면, 옛날 이야기에나 나올법할 조그만 암자가 나오는데요… 거기 노스님 한분 계시다는 데.. 그분을 뵙지는 못하고… 그냥 내려왔습니다.
정말 멋집니다. 보길도라는 섬.
사진을 보니, 그때 기억이 나서… 몇자 끄적이고 갑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쇼…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