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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오래된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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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차이는 없었답니다.
시간을 길게 보는 쪽과 시간이 별로 없다고 보는 쪽의 갈림길이었지.


황석영과 나? 생뚱맞은 조우다. 정치, 투쟁, 현대사, 386, 후일담 등등…개인적으로 별로 흥미없어하는 단어들이 먼저 선입견에 거미줄을 치고.책을 권한 친구는 이 책이 자기가 읽은 최고의 *연애소설*이라며 이런 나를 꼬셨는데.

사랑은 입술에 발린 루주처럼 혓바닥 위에 얹힌 말재간이나 추상적이고 거창한 짓은 아닐거야. 글쎄 즈네들이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간대. 웬만한 자극가지고는 놀라지 않는 세월이니까 말들을 과격하게 해! 사랑은………전체의 절반은 밥 같은 몸이고, 절반의 절반은 끊임없이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 같은 일상이고, 절반 중에 그 나머지의 절반은 주변의 이웃이 완성시켜준단다. 그렇게 늙어가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다들 절반도 못 가서 실패하고 그리고 노년은 쓸쓸한 각자의 고독이야. 절반의 절반까지만 가도 다행이고 거기서 못다한 건 후생에서나 다할까.

하권 191p

연애소설? 그래 속아주지 하는 기분으로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넘겨보는데, 상권을 읽는데 2주일 넘게 걸려버렸다. 나와 정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군! 투쟁하고 혁명하고 거기에 생을 거는 사람들. 그 결과로서 이어지는 불편하거나 지리멸렬한 삶들…아프다. 아퍼 죽겠다 이런 류의 뻔한 후일담? (무식의 소치-_-)

처음 여기 오던 밤에 나는 뼁끼통 위에 올라서서 먼 어둠속 허공에 몇점씩 빛나던 별을 보았소. 별인 줄 알았다가 산동네 가난한 창에서 보내는 불빛임을 이튿날에사 알아보았소. 초저녁에는 산허리에 불빛이 가득하더니 밤이 깊고 새벽이 가까울수록 한점 두점 사라져 저만큼 하나, 다시 저어만큼 하나씩. 그제사 창이 별이 되는 연유를 새겨봅니다. 잠들지 못한 마음 별이 되는 지금, 내 것도 저기서는 별이 되겠지요.

상권 78p

==> 상당 연애스럽다. 50대 아저씨의 문장이라기엔 너무도… -_-

문득 그 자취의 갈피로 둥실 떠오르는 해묵어 잊혀졌던 기억. 학교가 집에서 꽤 멀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안에서 거대한 쇳덩어리들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터널을 굳건히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기둥들을 보다가 ‘저걸 무너뜨린다구? 설마…’ 그게 그때만해도 캠퍼스를 온통 붉게 휘감았던 혁명이란 단어에 대한 개인적인 입장 정리.

나는 정희보다 더 단순하고 조용하게 내 일을 좋아하면서 살아갈 작정을 했다. 학교에서 최루탄가스 때문에 눈물을 흘려도 그때뿐. 교정의 나무들처럼 잎사귀나 몇점 떨어뜨리고 조용히 아무 느낌 없이 서 있을 거다.

하권 110p

겪지 못해서였던 것 같다. 이룰 수 없는 혁명이나마 그게 없으면 살 수가 없어 가슴에 독으로라도 품을 수 밖에 없게 만드던 억울하고 사무치는 그 무엇을. 아니, 그저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미경아, 예술과 혁명이 가는 길은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처음 시작했던 삶으로 되돌리려는 안간힘이야. 지상에서 비롯된 새벽의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 지상에 세워진 한낮의 모든 허접쓰레기 같은 제도를 부숴버리는 일.

하권 190p

책에서 삘이 오기 시작한 건 현우가 갈뫼를 떠날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1권의 후반부쯤. 갈뫼에 머무를 수 없다. 갈뫼에 있었다면 윤희와 현우는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었을거고, 헤어질 필요도 없었을 거고 은결이 웃는 모습 내내 함께 볼 수 있었을텐데…

갈뫼에 있었다면 같이 둘만의 평안한 청춘을 보냈을텐데 청춘이어서 갈뫼를 떠날 수 밖에 없다는. 그랬다면 연애소설이 되지도 못했겠지만.

그냥 왠지 나도 갈뫼를 떠나야 하는 남자의 심정으로 ,,,한 남자를 그렇게 떠나보내야 하는 여자의 심정으로. 마치 그것이 오롯이 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운명인양. 단 석 달 사랑하고 평생 아스라히 그 추억만을 가지고 존재를 지탱해가야 했던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정은, 잠을 줄여 하권을 전속력으로 달리게 만들었다.

그 뒤의 석달 동안이 우리의 평생을 지배하게 되었지만요. 우리에게는 그 여름 한철이 두 사람의 모든 인생이었어요. 그때는 어쩌면 그렇게 소나기가 자주 내렸던지. 검은 먹장구름이 뭉실거리며 산봉우리를 스치고 몰려오기 시작하면 당신은 울타리를 돌아 뛰어들어오면서 외쳐요.

비온다, 빨래 걷어야지

상권 227p ..부터 233p까지의 절창

하지만 하권의 마지막장을 덮으며 이 소설은 나의 이런 소녀적 감상과도 동떨어진 ‘그 이상의’ 존재감으로 남는다. 백커버에서 염무웅 교수님은 이 소설이 지난 20년간의 문학적 연대기라고 하셨는데, 딱이라고 생각했다. 현재와 닿아있는 가장 가까운 역사의 굵직굵직한 랜드마크들을 죄다 섭렵하고 있는 이 소설에 대한 주석으로는.

어떻게 저런 것들을 다 기억하고, 찾아내서 저렇게 지금 그 자리에 있듯 생생하게 문장으로 재현해 낼 수 있는 것일까. 저 복잡다단한 이모저모를.

한국의 광주와 서울, 변두리의 투쟁사, 차가운 독방에서 대학생들이 뛰쳐나간 공장까지를…베를린에서 소련 그리고 다시 갈뫼까지가. 어린 시절 엄마가 싸주던 김밥의 꼬투리하나 놓치지 않으면서. 켜켜이 괴어놓은 대장경 목판처럼 시간 속에 묵어있는 이야기들을 작가는 징그러울 정도의 명징하게 해상해낸다.

대체 저것들의 소스 확보는 어떻게 한건지. 기억력이 무지X100으로 좋거나, 알바를 풀어(-_-) 채찍질을 해대며 탐욕스럽게 취재를 시켰거나. 작가가 그 속에 있었기 때문이겠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작가란 놀랍다..대단해~~~

문장들을 내 주변의 삶들과 겹쳐 본다. 그 세대를 겪었던 사람들…혹은 겪지 않았던 사람들. 어째 프로필이 엇비슷한 모양새로 겹쳐진다. 정치란 일상적이다. 한 단면의 특수성이 아니라 공기나 물처럼 보편재로서 어디에서든 늘 존재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모두들 매 순간순간 어떤 ‘입장’들을 취한다.

그 선택은 다채롭고 그 결과를 자기 혼자 떠맡아야 하는 외로운 것이지만, 저 위에서 보면 다 거기서 거기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언제든 투쟁하는 전사로 남아 있지는 않는다. 혁명위원회도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내는 아이를 낳거나 식량배급이 늦는다고 투덜대고 좀 일찍 들어올 수 없냐고 바가지를 긁고 생활비가 거덜이 났다고 하소연하고. 식구들은 모두들 끊임없이 먹어대고 마셔대고 싸우다가 성교도 하고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 새옷으로 갈아입고 출근하고 다시 토론해야 한다.

그가 출발했던 땅에서 이제는 아득한 미래로 날아간 하늘 사이에는 무한 천공이 입을 벌리고 있다. 혁명이라고. 그건 정지된 섬광이야. 오현우처럼 유폐되거나 그의 아우들같이 바리케이드 앞에서 연발사격에 쓰러지지 않는 한 그는 출퇴근하는 토론자로 기진맥진 살아가게 될 테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혁명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환멸에 치를 떨게 된다 할지라도 피부를 찌르는 듯한 전율로 나는 살아있다고 중얼거리게 하는 사업.

하권 110p

정지된 섬광. 출퇴근 하는 토론자…

난 오래된 정원을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작가적 증언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혼란한 시대 속에 뚫고 지나와야했던 인간 내면의 입장들의 연대기로서 흥미롭게 읽었다. 그래서 훌륭하지 않은가 싶다. 모든 훌륭한 예술작품들이 그렇듯, 그 시대의 특수성을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로 풀어냈기에.

나는 혈육의 정에 시달리는 선배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이 깊은 밤에 변소 창문 앞에 나와 서서 숨죽여 우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아침 운동시간에 얼굴을 마주치면 말짱했지만 나는 그가 사동 빈터를 하염없이 걸으며 가끔씩 푸르게 펼쳐진 하늘을 한참이나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훔쳐보고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은결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풍요했을 건가. 마음이 물결처럼 파동치는 나날을 두려워할게 아니다. 원래 사는 일이 그렇지 않았던가.

하권 115p

동우가 그런 자료들을 모으고 내부 문건에 반영했던 것은 좌편향이었을까. 내가 줄곧 감옥에 있으면서 세상이 바뀌어갔던 길을 돌이켜보면 그런 따위는 차츰 보편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갔다. 세월은 저절로 균형을 잡아간다. 그것 봐라, 별일도 아니었잖아.

하권 128p

책을 읽던 즈음 유효일 국방차관의 5.18진압군 전력시비가 붉어졌다. 책 속에서 그려지는 답답하고 막막한 공기에 푹 묻혀있다가, TV에서 시민단체의 항의가 거세다는 뉴스를 접하고, 갑작 책 속의 대한민국과 지금의 대한민국의 간극이 실시간 비교체험으로 생생하게 다가오며, 신선했다. 앗,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구나. 원래 그랬던 게 아니라, 지금 이럴 수 있게 누군가들이 만들어 온 거구나.

우리 현대사에 이어지는 시민 혁명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를 말하지만, 어쨌든 결국은 그런 것들과 또 다른 어떤 것들이 조금씩 쌓여 무언가가 정말로 바뀌어오긴 해서, 난 그 결과로 이만큼을 누리고 있다.

단 한 큐의 격하고 폭풍같은 도끼질에 지하철 기둥을 무너뜨리는 것 같은 그런 것이 혁명이 아니구나. 바위를 뚫는다는 똑똑 떨어지는 여린 물방울같은 것…사랑이 그렇다고 하는 것처럼, 혁명이란 것도 변화란 것도 그렇게 물처럼 조용히 스며드는 것은 아닐까.

포기하지 않고 싸우고 버텨준 윗세대에게 고맙다는 생각, 무언가 빚졌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들의 지금 행보가 어떠하든.

당신은 그 안에서 나는 이쪽 바깥에서 한 세상을 보냈어요.
힘든 적도 많았지만 우리 이 모든 나날들과 화해해요. 잘 가요, 여보.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나와 다른 걸 겪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별 차이는 없었답니다. 그저 다른 시간 속에 존재해 있었을 뿐. 그렇게 이 소설은 내 속의 한 칸을 넓혀주었다. 같은 질문을 남기며…

살아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하권 308p

3 comments on “황석영, 오래된 정원”

  1. 오랜만에 들러봤어요. 기억하시려나?
    이 글은 뭔가 댓글을 달고 싶게 만들어요.
    그리고 그저 그럴것 같아 제쳐두고 있었는데 몹시 읽고 싶게 만들었어요. 오늘 저녁에 당장 스따뜨~

  2.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그 시절 청춘의 한때 잠시 꿈처럼 살았던 “윗세대”입니다. 그래도 당시 제 친구들의 눈물들이
    그저 쓸모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주는 후배의 마음이 너무 고맙네요. 이제 님같은 후배들이 우리가 꿈꾸었던 나라보다
    훨신 더 좋은 나라를 만들어가겠지요. 항상 행복하시길…

  3. 지난 주 pd수첩에서 선배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늘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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