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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콩 (King Kong) : 광기에 지지않았다.

2005/12/19

선악구도는 없다. 하지만, 점차 광기로 변질되어 가는 과열된 열정이 있다.

극을 이끌어 가는 것은 금발 미녀 앤도 주인공인 킹콩도 아니다. 헐리우드 역사에 남을 필생의 역작을 찍고 싶어 안달이 난 영화 감독 던햄이다. 찍다만 영화를 이쯤에서 킬하자는 제작진들의 회의를 엿들은 던햄은 재빨리 빠져 나와 배를 빌린 후 스태프와 짐을 꾸려 무작정 남은 촬영을 위해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영화 밖에 없다. 무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찍어야 한다. 연극 대본을 쓰러 돌아 가야 하는데 결국 부두를 떠난 갑판 위에서 뛰어 내릴 용기를 내지 못한 극작가 잭이 말한다. “하지만 난 정말 연극을 사랑했단 말이예요” 던햄은 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한다. “아니, 만약 니가 정말로 연극을 사랑했다면, 거기서 뛰어내렸을거야.” 던햄은 한 치도 주저하지 않고 뛰어내렸다. 시커멓게 파도가 부서지는 비이성의 해골섬으로.

온갖가지 괴상한 공룡들에 쫓기며 생존의 기로에 선 순간에도 던햄은 시종일관 필름만을 가슴에 품고 달린다. 동료의 죽음도 위대한 영화를 위한 신성한 희생일 뿐이다. 자기 목숨도 내걸고 슛팅을 한다. 그런 그가 나쁘게 보였나? 오히려 매력적이다. 그래, 뭔가를 위해서라면 저렇게! 열정이라면 저 정도는!

그런 그가 맛이 가는 건 그 목숨보다 귀한 필름이 망가져 버린 순간이다. 마구 풀어 헤쳐진 필름을 확인하고, 공룡들에게 쏘아댈 때 그건 생존 때문이 아닌 것 같다.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마주한 존재의 광기 같다. 머리가 돌아버린 그는 이제 영화 대신 킹콩을 데려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계획을 세운다. 이제 그토록 소중했던 영화는 이슈가 아니다. 열정은 트랙을 벗어났다. 그 결과는 킹콩쇼의 오프닝을 지켜보는 잭의 말로 정리된다. “그게 그의 특기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파괴하는 거.”

누구에게나 ‘내 인생의 그것’이 있다. 그건 역사에 남을 명화일 수도 있고, 금발머리의 그녀일 수도 있고, 세상의 난치병을 치료할 줄기 세포일 수도 있다. 아버님도 말하셨듯 우린 그걸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M카드에 가입 신청을 하는 것 이상의 노력을 기울인다. 인생을 바친다. 열정을 불태운다. 하지만, 모두 다 가질 수는 없다. 그 사실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온다. (고 나는 추측한다.) 필름이 불타고, 그녀는 딴 놈이 가로채가고, 줄기세포는 오염된다. 그것을 확인, 실감,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은 오고야 만다. 그때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 우리의 실존적 선택이 있다.

킹콩은 그 막다른 골목에서, 운명을 예감했을 때 광기에 압도되지 않고 끝까지 우아하게 자신의 존엄을 지켰다. 사랑하는 대상을 파괴하는 대신, 그녀를 놓아주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올라 고귀한 최후를 맞았다. 헐리우드 영화의 수많은 금발 미남 영웅들과 다를 바 없이. 영화 자체는 그렇게나 심플하다. 하지만, 던햄과 킹콩의 대비로 우리는 그 괴로운 순간에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선택을 했던 존재들을 본다. 빗속에서 서사시를 읊조리던 블레이드 러너의 룻거 하우어, 가질 수 없는 사랑을 갈구하던 AI에서 할리 조엘 오스몬드, 노틀담 성을 오르던 콰지모도…이룰 수 없었던 열망을 품었으되, 그 댓가로 산산히 부서져 내리는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들에게 퀸의 이 노래를 바친다.

⊙ Queen : Too Much Love Will Kill You

정상과 비정상은 한 끗 차이다. 그래서 그 경계를 유지하기가 힘든 거다. 그 한 끗을 지키게 해 주는 것이 상식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 또한 과장하고 상황을 극단화하기 좋아하는 일희일비형 인간이지만, 우리 아무리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고 종종 스스로에게 생활의 발견을 되뇌인다. 특히, 어수선한 요즘 더더욱. Too much love will kill you. 하지만 때론 나만 죽이는 게 아니라는 걸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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