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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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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제 뜻이 아니었으나 오히려 감사함을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소서”

임재범 3집 ‘고해’ 中

임재범과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가수들은 많지만 임재범 같은 목소리는 한 개도 없다.

JK 김동욱이 대표적이다.
‘미련한 사랑’을 들으며 처음에 “혹시 이거 임재범?”하고 의심할 정도로 그 느낌과 분위기가 비슷했고
그가 수요예술무대에서 라이브 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리고 제임스 잉그램의 어떤 곡을 불렀다고 기억하는데
그 목소리와 아주 잘 어울렸고 두말할 나위 없는 가창력과 성량을 입증했다.

당연히 2집이 나왔고, 돌아와 제발인지 뭔지 하는 게 요새 여기저기서 꽤 많이 들린다.
좋은 가수가 인기를 끌고 좋은 대접을 받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고
솔직히 말해 JK 김동욱 정도면 돌아와 제발 정도의 곡은 좀 아깝다는 생각이다.
그 정도의 목소리면 더 멋진 곡으로 더 큰 감동을 주고, 더 큰 사랑을 받아야 마땅할 것 같은데,
불행히도 한국에는 퀸시 존스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JK 김동욱 과의 임재범을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난 더더욱 임재범이 그리워진다.

그 수많은 비슷한 목소리들은 거기에 임재범의 그 무엇이 빠져있는지,
내가 임재범의 무엇에 애달파하는 지를 더욱 도드라지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직 임재범에게만 있는 그 ‘무엇’이 너무나도 간절해진다.

그 무엇을 뭐라고 표현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있다기 보다는 없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무엇무엇이 더 있어서가 아니라, 무엇무엇이 결핍되어 있기에 표현되는 느낌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그것은 정말로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밖엔 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이리라.
그것이 느껴져 나는 임재범의 목소리에 ‘뿌리치기 힘든 매력’을 느낀다.
분명히 판별할 수 있다.

나는 유키토에게 뿌리치기 힘든 매력을 느낀다. 이런 생각을 머리 속에서 말로 조립하고 있을 때 긴 머리를 싹둑 잘라버렸을 때처럼 애달파졌다. 유키토와 나는 흠이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우정이나 애정 같은 뭔가를 보태려 하지는 않는다.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확인할 뿐이다. 그리고 상대의 흠에 집착하고 싶다. 흠을 찾으려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흠이 나를 발견해 소리내 말을 걸어온다. 그 소리는 보통 가늘고 희미한 것이지만 유키토의 소리는 분명히 판별할 수 있었다.

유미리 ‘콩나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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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은 지난 주말의 말러 이야기

mahler9.jpg지난 주말엔 정말 오래 간만에 클래식 공연이라는 것을 누렸다.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부천필의 말러 교향곡 9번. 부천 필은 99년부터 장장 5년에 걸쳐 말러 전곡을 연주해 ‘말러 신드롬’을 이끌었고, 지휘자 임헌정 씨는 클래식 매니아 사이에서는 일약 ‘아이돌’로 떠올랐다…고 한다. 특히나 지난 번 8번 천인 교향곡은 합창과 어울어져 대략 감동의 도가니탕이었던 듯 하다. (같이 본 이들이 해 준 얘기 종합)

나는 이쪽이 문외한이라, (뭔들 문내한이랴만은) 졸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공연 전 졸아도 내 인간성을 의심하지는 말라는 둥 미리 포석을 깔았지만, 예상 외로 나 졸지도 산만하지도 않게 꽤나 집중해서 연주를 즐겼다.

좋은 연주였다. 뭐가 좋았냐구? 그냥 다…이건 하나마나한 뻔한 얘기고,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예상 외로 또 그렇게 심한 감동의 물결은 아니었다. 앞 자리 앉은 사람은 연주 듣다가 감동 먹어 눈물을 흘리는데 난 생뚱생뚱 다리 꼬은 방향만 바꾸고 있었고, 보고 나서 사람들에게 가다 만 듯한 느낌이다…고 했다가 순간 싸늘해지며 왕따 당할 뻔 했다. 제 1 바이올린이 너무 약했던 거 아냐? 고 했으면 아마 한 대 맞았을 것이다.

나는 압박하는 것들이 싫다. 교향곡도 싫고 때려 부수는 락도 싫다. 클래식도 소편성. 현악 4중주나 5중주. 드보르작의 아메리카나 브람스의 퀸텟 정도가 내겐 딱이다. 말러나 베토벤의 교향곡을 내 방에서 혼자 듣고 있는다는 건 …우 피곤하다. 가뜩이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에, 남의 존재감까지 얹을려니 에너지가 딸릴 수 밖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을 들을 때에는, 그땐 음악이 아주 확실하게 나를 압도하기를 바란다. 여리여리한 내 감성을 산산히 깨부수어 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닿는 곳이 지옥이든 천국이든 올라 갈 때 까지 가서는, 내 속에 있는 일말의 잡생각 따위는 단숨에 집어 삼켜 먹어버리는 허리케인 같은 감동을 바란다. 제길..인간이 왜 이러냐.

불행히도 부천필의 연주에서 그런 걸 느낄 수 없었다. 미치겠다. 안 느껴지는 내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그것도 다들 입을 모아 좋기만 하다는 이런 공연에서…그걸 또 음반이 아닌 라이브로 들으면서.

보통 오케스트라는 3번 많아야 대여섯번의 리허설을 하는데, 부천필은 20번 가까이 리허설을 하고, 관 파트는 입이 부르트도록 연습을 한단다. 그러니 애호가들과 언론들이 입을 모아 찬사에 찬사를 외칠 수 밖에. 근데 난 모냐고….이건 연주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불감증이다.

그렇기 집에 와서 또 다시 이런 저런 잡생각에 몸부림치다가, 문득 공연 보러 가기 전에 듣고 가야지 했던 말러 9번을 데크에 걸었다. 내게 말러는 딱 두 개다. 그 중 하나가 우연히도 이 9번. 브루노 발터-콜롬비아 심포니. 발터가 84세에 지휘했다는 연주. 사실 공연 전에 미리 듣고 가려고 꺼내 놨는데, 역시나 대편성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앞에 2분 정도 듣다가 제꼈었다. (그리고 곧바로 스파이시 걸스를 틀었다는 뒷얘기..)

근데 이게 뭐냐. 스피커에서 1악장이 흘러나오는데, 나 대충 반쯤 누워서 듣다가 벌떡 일어나 앉아야만 했다. 아…이건 정말…

지금도 내 귀에는 9번의 4악장 아다지오가 흐른다. 옆집 사는 사람이야 괴롭건 말건 볼륨을 이만큼 높여놓고, 쓰다가 듣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삶과 죽음의 선율이 처절하게 흘러나온다. 이거야말로 내가 바랬던 그런 변태 성향 (최고의 Sub로서 Dom 앞에 굴복당하기 바라는 경향)을 확실히 충족시켜 주는 압박의 정수가 아니더냐. 난 이런 아름다움 앞에서는 자의식 따위는 조금도 남겨두지 않는다. 한 인간이 또 다른 한 인간의 행위 앞에서 99프로 감동받더라도 1프로 지켜야 할 일말의 자존심까지도 내팽개친 채, 기꺼이 무릎 꿇는다.

클래식을 오랫동안 듣지 않았다. 한 8,9년 전 쯤 아주 짧은 한 때 클래식을 ‘들어 보려고’ 했었고, 그 결과로 이런 판도 남겨두게 되었다. 앞으로도 말러는 잘 듣게 되지 않겠지만 그 공연 하나로 묵혀뒀던 CD하나도 발굴했고. 또 아마 이것이 계기가 되어 몇 개의 클래식 CD의 먼지를 더 털어내게 될 것 같다. 그래봤자 오래 가지 못할 사이클이지만. (금방 키스 자렛으로 돌아가지 않겠어?)

부천필에서 못 받은 감동을 내 방에서 받고, 공연장에서 못다한 컴플레인도 이렇게 블로그 에디트 창에 털어놓으며 난 할 일 많은 한 주를 시작한다.